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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봉의 도시산책]파헤쳐진 내시 묘역



2년 전 서울 은평구 진관내동에서 북한산 의상봉을 오를 때 약 3만 제곱미터의 땅이 파헤쳐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문제는 그곳이 단순한 산자락이 아니라 국내 최대 규모이자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내시'들의 집단묘역이 있던 곳이었다는 점이다. 파헤쳐지기 전까지 모두 45기의 묘가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광해군 시절인 지난 1621년에 처음 묘비가 세워진 정2품 자헌대부 김충영의 묘로, 그는 왕과 왕비의 명령을 출납하는 승전관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석이나 상석에 관직이 기록된 것만도 14기가 있었으며 내시부의 최고 관직인 종2품 상선의 묘가 5기, 종1품 승록대부의 묘도 2기나 됐다.

그러나 후손들이 한 조경업자에게 4억8000만 원을 받고 땅을 넘기면서 그렇게 갈아엎어지고 만 것이다. 내시의 양자로 이어진 후손들이 자신들의 선조가 내시라는 점을 부끄럽게 생각한 것이 큰 이유였고, 이 집단묘지자 지정문화재가 아니어서 상대적으로 매각이 어렵지 않았던 점도 사태를 부추겼다.

당시 사건은 한 집안의 집단묘지가 없어진 것 이상의 안타까움을 몰고 왔다. 그곳에 안장된 이들 가운데 김성휘나 박민채, 오준겸 등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에 활동 기록이 남아 있는 인물도 있던 데다 내시들의 부인도 사대부의 부인이 받는 정경부인에 봉작됐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비문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내시들의 인물사 연구는 물론 당대의 풍속사 연구에도 귀중한 사료가 되는 것들이었지만 그렇게 갑작스럽게 파헤쳐지면서 모두 흘러간 옛 일이 되고 말았다.

현재 남아 있는 내시의 묘는 은평구 이말산에 있는 4기를 비롯해 도봉구 초안산과 쌍문동, 강남구 신사동, 경기도 고양과 남양주, 양주, 용인, 그리고 경북 청도에 남아있는 것 등 극히 소수다. 그마저도 언제까지 남아 있을 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사대부의 경우와 달리 내시의 묘와 관련해서는 후손들이 부끄럽다는 이유로 쉬쉬하거나 없애버리는 통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시라는 존재가 단순히 거세를 해 남성성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왕조 경영에 필수불가결한 전문가 집단이었다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후손들이 갖고 있는 마음의 벽을 깨기란 쉽지 않아 보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몇 기의 내시 묘지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지 걱정되는 이유다.

/'다시 서울을 걷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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