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를로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더불어 프랑스 보르도 와인을 받치는 두 기둥이다.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맛과 멋을 풍긴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지롱드 강의 서쪽 메독 지방에서 최상위 등급의 와인을 만들어 내는 주류 품종이다. 이 곳에서 메를로는 블렌딩이 허용되는 5개 포도품종의 하나로서 카베르네 소비뇽의 조연에 머무른다. 참고로 5개 포도품종은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 말벡, 쁘디 베르도를 일컫는다.
반면 같은 보르도 지방이지만 강의 동쪽에 위치한 쌩떼밀리옹과 뽀므롤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곳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 이 곳의 맹주는 단연 메를로다. 사실 메를로는 메독을 제외한 보르도의 다른 지방에서 대체로 생산량 우위에 선다.
메를로와 카베르네 소비뇽은 와인으로 변신했을 때 유사한 아로마(포도가 풍기는 향)를 풍긴다. 둘 다 블랙베리·체리 등 검은색 계통의 과일과 블랙커런트 등의 향이 난다. 그래서 종종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둘을 헷갈리기도 한다. 약간의 차이라면 메를로의 경우 가죽 혹은 흙내음이 느껴진다는 점 정도다.
향은 비슷하지만 둘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졌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만생종이어서 추위에 강한데다 화강암 등 척박한 토양을 좋아한다. 만들어진 와인 역시 거칠고 강건하며 탄닌이 풍부해 아주 떫다. 메를로는 반대로 조생종으로 가을에 접어들면 바로 수확기에 들어가며 진흙 섞인 땅을 좋아한다. 그래서 와인도 진흙을 만질 때의 느낌처럼 비단결 같고 부드럽다.
이렇게 반대되는 성격이면서도 둘이 블렌딩되면 기막힌 궁합을 자랑한다. 카베르네 소비뇽이라는 턱시도에 메를로 나비 넥타이로 멋을 내었다고나 할까?
메를로는 그러나 주연으로도 손색이 없다. 최근에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팔색조가 됐다. 메를로가 자랄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인 뽀므롤 지방의 샤토 페트뤼스는 99% 메를로 와인으로 애주가들의 칭송을 받아왔다.
요즘은 신세계 국가를 중심으로 메를로 100%의 훌륭한 와인이 다수 나온다. 특히 미국 서부의 최북단 워싱턴 주의 메를로는 세계 와인시장의 빛나는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