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안이 예상보다 수월하게(?) 본회의를 통과했다. 정기국회 종료일인 9일까지 지연되는 게 아니냐는 예상은 빗나갔다. 개정된 국회 선진화법의 위력이다.
매년 12월 31일을 밤새우게 만들었던 관행은 전설로 남았다.
'자동부의'때문에 11월 30일로 못 박은 위원회 심사 기간이 끝나자 야당은 손발이 묶였다.
반면 최경환 부총리를 비롯한 정부는 유리해진 상황에 표정 관리하느라 바빴다. 여당은 11월 30일까지 버티면 끝나는 간단한 게임이 돼 버렸다. 야당은 자동부의 앞에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자동부의 조항에 묶이면서 국회 심의 없이 정부 원안 처리가 가능해진 것은 큰 문제다. 국회 심의권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올해 처음 자동부의가 실행되기 전까지 여야는 이런 상황이 올 거라는 예측을 제대로 못했다. 그저 관례대로 야당도 버티면 뭔가 되겠지란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막상 개정 법조항에 따른 절차를 쫓으니 닭 쫓던 개처럼 멍한 상황이 연출됐다.
새정치연합 신기남 의원은 국토부 예산 심의과정에서 국회가 예산 심의권밖에 없는 점을 한탄했다. "국회가 무슨 권한이 있어요. 가면 끝인데. 이거 개헌해야 합니다. 국민의 대표가 뭐하는 겁니까"라며 "예산 편성권이 정부에 있고 국회는 심의권만 있을 뿐 증액도 못 시킨다"고 고백했다.
국민들은 예산 심의를 국회에서 하면서 큰 폭으로 예산이 깎이거나 바뀌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렇지 않다. 국회에서 수정할 수 있는 부분은 겨우 3조~5조원 수준이다. 내년 예산안도 정부 제출 376조원 중 3조6000억원을 깎고 3조원을 늘려 결과적으로 6000억원 줄였을 뿐이다.
신 의원의 고백처럼 국회는 증액하려면 장관의 동의를 받아야 하고, 기재부에 애걸복걸해야 하는 서글픈 처지다. 국회가 국민의 대표인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온당치 않다.
법안 제출권도 정부와 공유하면서 실제로 통과돼 실행되는 법률은 대부분 정부안이다. 게다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정부가 마음대로 만드는 시행령에 중요한 사항이 다 들어가 있는 점은 두말하면 입만 아프다. 예산도 법안도 모두 정부 손아귀에 있는 셈이다.
요즘 개헌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의원들도 정부에 끌려다니는 국회가 돼선 안된다는 생각에 개헌파에 합류하고 있다. 여야 싸움만 부각시키는 선정적인 정쟁위주의 정치기사 홍수 속에 우리가 잊으면 안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국회의원이 혐오받고 사회악으로 취급당하고, 국민이 본인들의 대변인인 국회를 버리면 견제받지 않는 정부는 어부지리를 챙긴다. /유보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