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밤 20여년만에 헤어졌던 대학 시절 선배를 만났다. 긴 시간 궁금했던 서로의 소식을 묻고 답하다가 마크 리퍼트 주한미국대사 피습사건 이야기가 나왔다. 미국에서 자라 버클리대와 서울대를 오가며 동양학을 전공했던 선배라 관심이 많았던 때문이다.
그는 리퍼트 대사의 침착한 대응을 칭찬하며 과거 에드원 라이샤워 주일미국대사 피습사건을 말해줬다. 버클리대 시절 강의시간에 교수들이 많이 이야기하곤 했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라이샤워 대사는 1964년 한일수교 협상차 일본을 찾은 김종필 당시 공화당 당의장을 만나러 가던 중 일본의 극우파 청년에게 칼부림을 당했다. 라이샤워 대사는 일본인에 대한 적대감 대신 "(수혈로) 내 몸 안에도 일본인의 피가 흐르게 됐다"는 감동적 성명을 발표해 사태를 진정시켰다. 우리 언론을 통해서도 잘 알려진 내용이다.
선배는 "라이샤워 대사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며 "그럼에도 학자로서는 일본의 뿌리가 백제에서 비롯됐다는 학설을 주창했던 지극히 객관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일본 사랑과 객관적 판단 능력이 감동적 성명의 배경 중 하나였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선배는 라이샤워 대사의 성명은 무엇보다 정치적인 결정이었다고 강조했다. 패전 이후 급격히 성장한 사회주의 세력에게 세 확장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한 고려가 작용했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이케다 하야토 자민당 내각이 테러 직후 '미친 자의 돌출행동'이라고 정치적 논란을 차단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라이샤워 대사 피습이 있기 4년 전 일본은 '안보투쟁'으로 온 나라가 홍역을 겪었다. '미일상호방위조약 개정은 미국 주도의 냉전 가담'이라는 이유로 사회주의 세력은 물론 전 시민사회가 들고 일어나면서 전후 보수정권이 위기를 맞았다. 일본의 보수세력은 기시 노부스케 내각의 퇴진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악몽 같은 기억이 생생한 시점에 미 대사 테러사건으로 꺼진 불씨를 되살려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들의 정치적 판단은 빛을 발했다. 10년마다 연장해야 하는 미일방위조약은 1970년 첫 위기를 대중의 미온적인 반응으로 무사히 넘겼고 이후 미일관계는 '록히드 사건' 같은 악재에도 끈끈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라이샤워 대사를 피습한 범인이 극좌파 인물이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대동소이'했을 거라는 데 우리는 의견을 같이 했다. 이케다 내각은 사회주의 세력을 자극해 분란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라이샤워 대사 역시 미국 지지세력을 돕는 '외교관다운'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50여년이 지난 한국에서도 사태 전개는 역시 정치논리를 따르고 있다.
중국의 굴기로 이른바 2강시대가 열리자 한미일 동맹은 미국에게 더욱 중요해졌다.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을 입안했다는 리퍼트 대사가 이를 간과했을 리 없다. 리퍼트 대사는 침착하게 상황을 관리했고 미국 내 반응도 이번 피습을 '개인의 돌출행동'으로 보는 시각이 대세다.
새누리당은 한달여 남은 보궐선거를 앞두고 '종북세력에 의한 한미동맹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하고 야당에 대한 공세에 활용하고 있다. 한미관계 악영향에 대한 부담도 크지 않은 상황이다. 계산 빠른 미국이 국내정치용 행보임을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반면 새정치민주연합이 사태 확산 방지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정치논리가 우리사회에 남길 부산물이다. 벌써 극우보수단체들의 종북세력 척결 시위로 서울시내가 요란하다.
피습 사건의 범인인 김기종씨는 통일부나 외교부를 출입했던 기자라면 취재현장에서 몇 번은 마주쳤을 인물이다. 과거 취재현장에서 마주쳤던 김씨는 영화 '택시드라이버'의 주인공 트래비스를 연상시켰다. 베트남전 참전용사였던 트래비스는 택시기사로 일하며 사회에 적응하려고 하지만 연이은 좌절에 삶의 탈출구로 대통령 후보 암살을 꾀한다. 하지만 감히 실행에 옮기지 못한 그가 결국 살해한 이들은 매음굴의 포주들이었다. 대통령 후보 암살범으로 지탄의 대상이 됐을지 모를 그는 사회정의를 실현한 영웅 대접을 받았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세상에 대한 분노를 품은 김씨는 암살범도 영웅도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가까이 1950년대 미국에서의 매카시즘은 생존을 위해 지인을 공격하는 비정한 미국사회의 단면을 드러냈다. 멀리 19세기말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사회의 분열은 물론 시오니즘 운동의 단초를 제공했다. 김씨의 꼬인 인생사는 물론이고 종북논란 역시 우리의 아픈 과거사가 남긴 유산이다. 리퍼트 대사 피습사건이 우리사회의 아물어가는 상처를 헤집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