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씨의 자살 시도는 아프다. 아프다는 말 이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안타깝다거나 말도 안 된다거나 같은 말은 비루하다. 그는 영웅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유일무이하게 빛이고 소금이었던 사람이었다. 어린 생명을 구하고자 사투를 벌였던 그였다. 그런 그가 구하지 못한 생명에 대한 책임감에 무너졌다. 그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나. 세월호 참사에 울대를 치켜세웠던 제3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사회가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은 그렇게 거대한 것이 아니다. 거대한 것이 아닌 그 근간을 이루는 주춧돌이어야 한다.
다큐테인먼트라는 장르가 있다. 영화나 TV방송 등에서 쓰여지는 컨텐츠의 형태다. 오래 전부터 분류체계에 포함돼 있던 것이 아닌 현대사회에서 만들어진 구성이다. 실제 사건을 기획자나 연출자의 시각에서 재구성하고 해석해서 만든, 완성된 컨텐츠는 마치 그 전체가 사실을 나열하고 정리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여지도록 편집한 영상물이다. 문학의 소설과 비슷하지만 사건을 객관화시키는 소설에 비하면 다큐테인먼트는 제작자의 의도가 많이 가미된다. 공통점은 제3자에게 사실관계에 대한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무상급식을 제공하는 것보다 우선될 수 있는 건 무엇인지 논란이 있다. 어른사회가 아이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관심과 사랑에 우선 순위를 정하는 셈이다. 문제는 이런 행보가 대의를 위한 고민과 결단의 과정으로 보이지 않는 다는 점이다. 그저 일부 정치인들의 이해관계와 행정인들의 안이한 업무 습관이 결탁해 만든 조롱거리로 전락됐다. 형평성이라는 혹은 정의라는 것에 대해 편리한 잣대를 썼기 때문이다.
인내심을 기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삼키기조차 힘든 고추를 쌓아 놓고 많이 먹는 게임을 한다. 살갗이 찢어질 듯한 찜질 공간에서 모래시계를 뒤집으며 기절할 때까지 견디기도 한다. 이런 건 인내가 아니라 자학이고, 무모하고 유치한 미생의 행태에 불과하다. 인내란 육체적 고통을 이겨내는 게 아니라 그 고통의 근원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임도 마찬가지다. 드러내는 것보다 드러내기 전에 갖춰야 할 태도가 핵심이다. 그래야 중요한 걸 지키고 보호하는 책임이 가능하다. 이른 바 온전한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