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인형을 좋아하던 내게 '인형놀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활동이었다. 100원짜리 동전 몇 개면 종이인형 몇 장을 든든하게 사서 가위로 오물조물 오려 이 옷을 입혔다가 저 옷을 입혔다를 반복했다. 종이인형의 어깨에 혹시나 너무 자주 옷을 걸쳐 접는 부분이 헐거워질까 봐 불안하면 투명 테이프를 붙여가며 아끼고 또 아꼈다. 종이 인형 뒤에는 항상 '세라', '나나', '엘리스'처럼 흔한 영어이름을 적어놓고 상자에 소중히 다시 넣어놓았다.
가수 '강수지' 언니 이름으로 '보랏빛 향기 쥬쥬'가 나왔을 때 나는 초등학교6학년이었다. 아빠에게 어린이날 선물로 받고 싶은 품목에 '보랏빛 향기 쥬쥬' 인형을 말했다가 아직도 인형을 가지고 놀 나이냐며 놀림을 당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하나 둘 모아놓은 인형들을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소중히 간직했다.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인형들은 졸업하고 모두 친척동생들에게 주라는 엄마의 말에 나이가 찼다고 왜 내 인형들을 누군가에게 줘야하냐며, 좋아하는 것에 졸업이 어디 있냐며 울분에 차 말했었다.
'어른은 왜 인형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가?' 에 대한 고민은 성인이 되어서 소리 없이 내가 다시 인형을 모으게 만들어줬고 그렇게 다시 시집갈 때 까지 모은 인형이 수두룩이다. 결혼 후 남편은 내게 인형들이 무섭다고 서랍장 밖으로 꺼내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내 소중한 바비 인형들은 서재에 잠들어있다.
이 그림은 러시아의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콘스탄틴 소모프(Konstantin Somov/1869-1939)의 작품이다. 그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학교에서 일리야 레핀에게 미술을 배웠지만 이미 어린 시절부터 환경적으로도 예술과 친했다. 아버지는 에르미타주 박물관 큐레이터였고 어머니 역시 음악가였다. 또한 러시아의 발레단을 결성한 디아길레프나 레온 박스트는 그와 가장 절친한 친구였기에 그는 1896년부터 발레무대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이미지들을 그렸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를 떠나 미국과 파리에서 활동했다. 2007년 소더비에서 그의 풍경화가 730만 달러에 팔리면서 러시아 화가 역사상 가장 비싸게 팔린 화가가 되었다.
그가 그린 그림은 숨겨둔 내 인형들을 상기시킨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인 모두가 내가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인형의 드레스를 입고 있고 어릴 적 시간을 기다리면서까지 즐겨보던 만화 의 한 장면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가장 좋아하던 화가는 로코코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는 '와토'와 '부셰'였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그는 십대 시절부터 18세기의 예술을 좋아했다. 로코코 시대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림 곳곳에 등장한다.
그의 작품 속에는 '사랑'이나 '축제'적인 분위기가 자주 등장하고, 신비스럽고 몽환적인 느낌의 이미지가 연출된다. 하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프랑스 미술은 이미 아카데미즘적인 고전미술에서 벗어나, 그림에서 현실과 일상을 이야기하는 인상주의의 움직임이 활발했으며 회화의 본질을 다시 정의하려는 새로운 화파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소모프의 관심은 여전히 과거인 18세기 로코코시대를 향해있었고 심지어 그림 속 주제들도 궁정이거나 귀족들의 모습이다. 다들 그리지 않는 로코코시대의 이미지의 향연을 꾸준히 자신만의 감성으로 독특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가 화폭에 담은 장면들은 로코코 시대 같으면서도 세기말 러시아의 혼란스럽고 야릇한 분위기처럼 다가온다. 결국 세상은 돌고 돌 듯 과거를 그렸지만 현대를 풍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세련됨과 복고적인 느낌이, 불손함과 사랑스러움이, 무거움과 위트가 동시에 공존하는 작품을 남긴 그는 나에게 좋아하는 것을 영원히 졸업하지 않은 인형놀이 같은 화가이다.
이소영(소통하는 그림연구소-빅피쉬 대표/bbigsso@naver.com/출근길 명화 한 점, 엄마로 다시 태어나는 시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