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본의 국가정상들이 전면에 나서 외교 전쟁을 벌이고 있다. 손에는 날 선 비수를 든 채 상대방의 등을 노리고 있다. 그 냉엄함을 지켜보자니 피부에 소름이 돋는다.
영국을 국빈 방문중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의회 연설에서 2차대전 중 일본의 만행을 언급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일가가 마련한 만찬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 주석이 70조 원을 뿌리니 아무리 미국의 맹방이라도 영국은 시 주석의 환심을 사기에 바빴다. 자신들의 아픈 기억을 건드리는 이야기지만 경청해야 했다.
영국은 자신이 키워 아시아 최초의 열강으로 만들어 준 일본에 참혹한 배신을 당한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2차대전 동남아 전선에서 영국은 해군의 자존심인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고작 일본 뇌격기 공격에 잃었다. 그리고 겨우 두달 정도 지난 1942년 2월 싱가포르 주둔군은 제대로 된 전투조차 없이 일본의 자전거 부대에 항복했다. 영국군의 아서 퍼시발 장군은 항복 회담장에서 자신의 어이 없는 항복 결정을 후회하며 망설이다 일본제국군 야마시타 토모유키 장군에게 "예스냐, 노냐"라는 고함까지 들어야 했다. 이 일화는 역사에 기록돼 영국의 오점으로 남았다.
이때 포로가 된 10만 가까운 영국군은 동남아의 밀림에서 '죽음의 철도'를 건설하다 죽어 나갔다. 1만3000명 가량이 굶어 죽고, 맞아 죽고, 병들어 죽었다. 역사상 존재했던 어떤 포로수용소에서도 벌어진 바 없는 대규모 참사였다. 얼마나 악명이 높았던지 전후 명장 데이비드 린 감독이 영화화 하기도 했다. 잘 알려진 '콰이강의 다리'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영국인들의 아픈 기억을 건드리니 일본이 당황하지 않을 리 없다.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언론인 산케이신문은 "시 주석이 이상한 연설을 했다. 만찬에서도 일본의 잔학성을 반복했다"고 비판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라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베 총리는 22일 중앙아시아 순방을 떠났다. 기자들에게는 대놓고 '중국을 노리고 나서는' 순방길이라고 말했다. 중앙아시아는 중국이 야심차게 추진 중인 일대일로(일대:실크로드경제벨트, 일로:해상실크로드길) 프로젝트의 한 축이다. 일본이 개입하면 중국은 골치 아파진다.
중앙아시아의 자원도 있다. 일본은 2010년 9월 센카쿠 제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두고 중국과의 일전을 외치다 중국의 희토류(첨단제품의 필수원료) 수출 중단 협박에 물러서는 굴욕을 당해야 했다. 이후 일본은 절치부심 수입처 다각화를 추진했다. 이번 순방 길에서는 확실한 성과를 내겠다는 속내다.
일본은 미국의 편에 서서 중국의 해양 진출을 봉쇄 중이다. 중국이 건설 중인 남중국해 인공섬을 두고 미중 간 일촉즉발의 상황인 지금, 자신들의 치명적인 약점을 없애겠다는 이야기다. 이 정도 수준이면 단순한 수사가 아닌 말 그대로 '외교 전쟁'이다.
그 치열함에 놀라다보면 떠오르는 게 우리 외교에 대한 아쉬움이다. 지난 미국 방문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입도 뻥긋 못했다. 되레 '한국은 왜 미래를 보지 않느냐'는 투의 핀잔을 오마마 대통령에게, 그것도 공개석상에서 들어야 했다. 한국의 '중국 쏠림' 비판을 씻어내기 위한 행보라지만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대략난감이다. 남중국해 문제에서 '미국이냐, 중국이냐, 선택하라'는 요구를 받은 일이나 북중 관계 변화 등 방미 직전 달라진 정세에 대한 고려는 고사하고 업데이트조차 하지 않은 '대북 공동성명'은 말할 나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