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부터 배기가스까지 온통 발암물질
WHO 40여년간 1000건 발암물질 조사…단 1건만 비발암 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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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신문 송병형기자] 세계보건기구(WHO)가 1970년대부터 40여 년 동안 화학물질과 이를 다루는 직업을 포함해 약 1000개 품목에 대해 발암물질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 중 거의 반 정도가 발암물질 판정을 받은 것으로 27일 확인됐다. 여기에는 유해화학물질뿐만 아니라 커피, 술, 생고기, 가공육, 염장생선 등 먹거리도 포함됐다. 또 자동차 배기가스, 대기오염, 미세먼지 등 일상생활에서 피하기 힘든 물질도 포함됐다. WHO는 유해물질에 노출되기 쉬운 미용사나 화가 등에게 암 발병 경고를 하기도 했다.
WHO가 조사한 대상 중 발암물질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은 1999년 발표한 '카프로락탐'(화학섬유인 혼성폴리아마이드를 합성하는 원료)뿐이었다. 나머지 500개가 넘는 절반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 발암물질인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
◆발암물질 여부 5개군 분류
WHO는 발암물질을 5개군으로 분류한다. 제1군은 인간에게 암을 유발할 것이 확실한(definitely) 그룹이다. 발암물질로 잘 알려진 석면, 비소 등이 여기에 속한다. 제2A군은 암을 유발할 가능성이 큰(probably) 그룹이다. 제2B군은 암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possibly) 그룹이다. 2A군과 2B군은 영어 표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probably'가 'possibly'보다 가능성이 더 크다는 표현이다. 제3군은 미분류 그룹이다. 발암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없어 분류를 유보한 그룹이다. 제4군은 발암 가능성이 없을 것으로 판단되는 그룹이다. 물론 전혀 가능성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룹을 나누는 기준이다. 5개군은 현실적인 위험도가 어느 정도냐를 기준으로 나눈 것이 아니다. 증거가 얼마나 확실하냐의 여부로 나눈 것이다. 현실에서 암 유발 정도가 높지 않더라도 1군에 포함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평상시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서 유해물질에 노출되는 일을 피했을 때 나타나는 경우다. 이를 소홀히 한다면 암이 발병할 수 있는 셈이다.
WHO가 조사한 1000개 가까운 대상 중 1군에 속하는 것은 100여개가 넘는다. 2A군에 속하는 것은 70여 개 가량이다. 2B군에 속하는 것은 300개 가까운 숫자다.
◆커피, 술, 고기 등 발암물질 판정
WHO가 발암물질이라고 판정 내린 것에는 일상의 먹거리와 기호식품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커피의 경우 방광암 유발 물질로 2B군 판정을 받았다. 알콜 음료는 1군 판정을 받았다. 씹는 담배(smokeless tobacco), 담배 연기, 간접 흡연도 모두 1군 판정을 받았다. 중국인들이 즐기는 염장 생선도 1군에 속한다.
WHO는 전날 가공육과 생고기까지 발암물질로 판정했다. 가공육은 1군이다. 매일 50g을 먹으면 직장암에 걸릴 위험이 18%로 높아진다는 설명이다. 가공육은 햄, 소시지, 쇠고기 통조림, 말린 고기, 훈제 고기 등 여러 처리를 거친 고기제품을 아우른다. 생고기는 2A군이다. 대장암, 직장암, 전립선암을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말고기, 염소고기 등 갖가지 종류의 고기가 포함된다.
◆배기가스, 미세먼지도 발암물질
먹거리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매일 접하는 물질들도 발암물질 판정을 받았다. 미세먼지, 대기오염, 목재가루, 낡은 가죽에서 날리는 가루, 자외선 태닝기, 자외선 복사, 광범위한 태양 복사, 연탄이나 석탄도 실내에서 피우면 암을 유발하는 1군의 물질이다. 1군에는 디젤자동차의 배기가스도 들어간다. 가솔린자동차의 배기가스는 1군이 아닌 2A군에 속해 다소 차이가 난다. 석탄과 달리 실내에서 나무를 태울 때 나는 연기도 2A군에 속한다. 배기가스가 아닌 가솔린이나 디젤 그 자체는 2B군에 속한다.
직업에 따라 발암물질 경고가 나오기도 한다. 유해물질을 접하는 직업들이 이에 해당한다. 고무공장 근로자, 화가는 1군으로 분류된 대표적인 직업이다. 미용사와 이발사는 2A군에 속한다.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하는 세탁소는 2B군에 속한다.
◆조사의 공정성 논란
발암물질로 판정나면 관련 업계는 직격탄을 맞기 마련이다. 발표 즉시 업계에서 강력한 반발이 나올 것은 불문가지다. 실제 전날 WHO가 가공육과 생고기에 대한 발암물질 판정 결과를 발표하자 세계의 육류업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AP통신에 따르면 북미 육류협회는 "가공육과 생고기를 발암물질로 규정한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고기와 암이 상관관계가 없다는 사실은 수많은 연구에서 밝혀졌다"고 반박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탈리아 전통 햄인 '파르마 햄' 제조업자들이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한국의 육가공협회 관계자도 "가공육을 발암물질로 규정한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간단히 규명할 수 없는데도 이론적으로 단순화한 결과를 발표했다"고 반발했다.
소비자들도 즐기는 식품이 발암물질로 규정되자 발끈하는 분위기다. 특히 육류를 즐기는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그럼 무엇을 먹으라는 말이냐"는 격한 반응이 나왔다는 보도가 전해진다.
이 같은 타당성 논란은 물론이고 공정성 시비까지도 WHO가 의식하고 있는 문제다. 조사 실무를 맡은 곳은 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이다. 여기에는 업계, 학맥, 특정 국가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각국의 과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