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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의 명화 에세이] 내 인생의 책가도-유현미

수학능력시험 날입니다. 오늘 밤이 되면 올 한해 고생했던 전국의 모든 수험생들이 거리로 나오겠죠. 누군가는 기뻐하고, 누군가는 한숨짓고, 저처럼 미대를 준비하는 친구들은 수능시험 날부터가 다시 실기시험 전쟁의 시작일겁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신기하게도 수능 날만 되면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선배들의 수능날은 우리에겐 학교를 안가는 노는 날이기도 했고, 앞으로 내가 겪어야할 상상하기 싫은 날이기도 했습니다. 짝사랑하는 선배에게 주기위해 엿과 찹쌀떡을 예쁘게 포장도 해보고, 새벽 일찍 일어나 후배 노릇 한답시고 따뜻한 물을 끓일 수 있는 버너를 챙겨 율무차며, 커피를 끓이며 우리끼리의 추억을 하나씩 더 만들던 그날이 생각납니다.

막상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진짜 수능 날이 되니 응원해주는 후배들도, 엄마의 격려도 도통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날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만큼 수능시험장은 낯선 곳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집중을 해야 하는 장소였습니다. 매일 친구들과 낄낄대며 함께 먹던 급식 대신 혼자 싸온 보온 도시락을 내 학교가 아닌 남의 학교에 앉아 외롭게 먹었던 수능 날의 점심시간이 기억납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3학년 때인 그 시절이 인생에 있어 제게 첫 극기 훈련 같은 시간이었어요. 학교가 끝나고 6시까지 자율학습을 하고, 미대를 준비하는 저와 같은 친구들은 밤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해야 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학교를 나와 삼삼오오 미술학원에 갔습니다. 6시부터 밤10시까지 입시미술연습을 하고 다시 근처 독서실로 가서 밤 10시부터 새벽2시까지 다양한 수능 문제집들을 풀어보고, 졸기도 하다가 독서실 차를 타고 집에 옵니다. 아파트 곳곳마다 우리를 내려주던 독서실 버스 아저씨는 늘 우리에게 "금방 지나간다. 힘을 내라" 라고 이야기했었어요.

그 말이 하나도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그리고 우리가 제일 힘들었으니까요. 생각해보니 수능시험은 나라는 사람이 공부를 얼마만큼 잘하는지를 가늠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모든 인생에 기본이 되었던 인내, 성실함, 버텨보기, 모두가 공부하는 시간에 나도 해보기, 성적이 떨어져도 다시 힘을 내보는 마인드 컨트롤을 알려준 것 같아요.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태어나 처음 제대로 해보면서도 세상에서 고3인 내 처지가 가장 힘들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십장생 책가도_01/유현미/150cmx100cm/비디오. 설치미술/2011/출처: 123갤러리



조선시대 민화의 한 종류인 책가도가 현대식으로 재해석 된 작품인데요. 19세기에 특히 많이 유행했던 책가도는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거나 혹은 책을 방에 가득히 진열해주고 싶은 마음을 대변해주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책이 많이 필요했던 사람은 공부를 하는 사람이었거나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 혹은 문인들이었겠죠? 지금으로 치면 수능과 같은 과거시험을 합격하고자 하는 마음에 있어서도 책가도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그림이었어요.

유현미 작가는 실제 사물이나, 그 사물의 형태를 가진 오브제를 설치 한 후 그 위에 직접 색칠을 합니다. 책꽂이와 책들 모두 다시 색을 입힌 셈이죠. 화가가 캔버스라는 평면에 그림을 그리듯 공간에 있는 입체의 물건에 회화를 하는 것이지요. 조각이지만 회화이고 회화지만 조각인 그녀의 작품은 보는 사람이 느끼기에 현실인지 그림인지 혼란스럽게 합니다. 조선시대의 빼곡했던 책가도 대신 다소 여백이 있는 책가도는 또 다른 새로운 상상을 하게 하기도 하고요.

십장생 책가도_03/유현미/150cmx100cm/비디오. 설치미술/2011/출처:123갤러리



고3 언니를 둔 동생, 고3 동생을 둔 형, 고3 자녀를 둔 부모님, 고3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고3 학생의 옆집에 사는 주민 모두가 고3을 위한 배려를 해주느라 힘들었습니다. 그러니 수능날은 고3 수험생만을 위한 날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날이기도 해요.

그리고 힘내세요. 수험생 여러분. 수능 점수가 내 인생을 평가해주는 점수도 아니고 친구들보다 조금 더 낮은 대학 들어갔다고 해서 내 인생이 그들보다 영원히 낮은 것도 아니더라구요. 대신에 오늘이라는 그 특수한 상황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어요. 그날 느낀 그 긴장감을 반드시 기억하면 좋겠어요.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에 나오니 수능시험 때 느낀 긴장감이 꽤나 매일 닥칩니다. 긴장감이 당연해지고 의연해지면서 용기가 생기더라구요.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조각 작품일수도, 사진이 될 수도, 회화가 될 수도 있는 유현미 작가의 작품처럼 수능시험이 수험생에게 최고의 기쁨이 될 수도, 반전이 될 수도, 처음 경험하는 실패가 될 수도 있지만 그 어떤 과정도 오답은 아닌 것 같아요. 이 관문을 지나고 이젠 정말 내 인생의 책가도를 어떻게 꾸밀지 생각해볼 시기입니다.

이소영(소통하는 그림연구소-빅피쉬 대표/bbigsso@naver.com/출근길 명화 한 점, 그림은 위로다, 명화보기 좋은 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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