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지구촌을 달군 기업 10 ⑩]화이자의 미국탈출, 'M&A의 해'를 뜨겁게 달구다
#메트로신문은 다가오는 2016년을 가늠하기 위해 올해 지구촌을 달궜던 글로벌기업 10곳을 골라 되돌아본다.
미국 뉴욕에 있는 본사 건물 앞에서 화이자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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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신문 송병형기자] 미국 기업들은 20세기 전반 과학의 발전과 함께 하면서 세기의 발명품을 쏟아냈다. 듀폰의 나일론과 화이자의 페니실린은 그중 단연 발군이었다. 특히 화이자의 페니실린 대량생산은 인류사의 일대 전환점이었다. 1944년 미군과 함께 노르망디에 상륙한 페니실린은 수백만의 부상자를 살려냈다. 세균과의 전쟁에서 인류가 처음으로 거둔 대승이었다. 승전국 미국은 화이자의 페니실린으로 또 하나의 개가를 올렸다.
이 같은 역사를 가진 화이자가 지난달 아일랜드 회사가 되겠다며 인수합병(M&A)에 나섰다. 자신보다 덩치가 작은 아일랜드 제약사 앨러건에 인수되는 형식이었다. 미국이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화이자와 앨러건과의 합병은 꼼수합병이면서도 규모까지 컸다. 지난 2일 미국은 사상 최초로 올해 M&A 규모가 2조 달러를 넘어섰다. 또 전 세계의 M&A 역시 2007년의 4조2960억 달러를 뛰어넘는 4조3040억 달러를 기록해 사상 최대 규모가 됐다. 이런 중에도 화이자의 합병은 독보적이다. 올해 이뤄진 M&A 중 최대이자 제약업계 사상 최대인 1600억 달러 규모였다. 올해 델이 EMC를 인수한 금액(670억 달러)의 두배가 넘는다. 정보기술(IT)업계의 기록적인 M&A라는 평가가 무색해진다. 심지어 올해 맥주업계 1위인 안호이저-부시 인베브가 2위 업체인 사브밀러를 인수하며 지출한 비용(1080억 달러)도 이에 못미친다. 막대한 규모의 꼼수합병은 더욱 논란을 키웠다.
◆화이자, 미국 대선 쟁점으로 부상
화이자가 미국에서 내야하는 법인세는 25%다. 선진국 가운데 가장 법인세율이 낮은 아일랜드(12.5%)의 법인이 되면 17~18% 수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화이자로서는 끌릴 수밖에 없는 유혹이다.
이전부터 미국의 높은 법인세 문제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대립하는 문제였다. 공화당의 법인세 감면 주장에 민주당이 반대하는 양상이 계속돼 왔다. 여기에 미국 대선과 맞물리면서 화이자 문제는 워싱턴 정가의 화두로 떠올랐다.
특히 공화당의 선두주자인 도널드 트럼프는 조세 회피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민주당보다 더욱 비판적이다. 트럼프는 화이자의 합병 직후 비즈니스인사이더에 성명을 보내 "대규모 실직을 가져올 화이자의 미국 이탈이 역겹다. 우리 정치인들은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아웃사이더인 트럼프의 돌풍에 곤욕을 치르고 있던 당내 엘리트들의 고민은 더 커졌다.
민주당의 유력주자들은 일제히 화이자를 비판하고 나섰다. 힐러리 클린턴은 "세금 바꿔치기라 불리는 이번 합병은 미국 납세자들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격"이라며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성장과 혁신, 미국 내 일자리 창출 등을 위해 미국 조세 시스템을 개혁할 것이다. 우리의 조세 기반을 잠식하는 이런 세금 바꿔치기에 대한 단속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말했다. 버니 샌더스는 "이번 합병은 처방약 값을 가장 비싸게 내는 미국 소비자들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며 오바마 행정부가 이번 거래를 중단해 줄 것을 촉구했다. 실제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법인세 법규 개정안을 발표했다.
◆오바마 '경제적 애국주의'에 대한 도전
오바마 행정부의 개정안은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를 통과할 수 있을까. 오바마 대통령은 이전부터 '경제적 애국주의'를 내세우며 기업들의 조세회피를 막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는 화이자 합병이 있기 몇달 전 "비록 소수지만 점점 더 많은 미국 대기업들이 세금 회피를 위해 조국을 떠나고 있다. 이들은 경제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미국 재정에 해를 입히고 재정적자를 키우고 있다"고 비난했다. 심지어 "그 기업들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한 것"이라며 "이런 기업들을 '기업 탈영병'이라고 부른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비서나 건설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기업들도 세율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는 없다"며 "한 국가와 국민으로서 동고동락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를 '경제적 애국주의'라고 규정했다.
법인세 탈루를 조장하는 세금 시스템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주장은 화이자의 합병으로 힘을 얻게 됐다. 하지만 합병 직후 일방적이던 화이자에 대한 비판여론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미국내 유력지에는 화이자가 기업활동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기고글이 올라오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경제적 애국주의'에 대한 반박이다.
◆화이자 이전 구글세 논란도
법인세 문제는 화이자가 택한 '법인 바꿔치기' 방식만이 문제가 아니다.
구글과 애플은 지식재산권 거래를통한 수익 대부분을 저세율 국가로 이전하는 방식으로 절세를 해 왔다. 스타벅스, 아마존 등 글로벌 기업들도 유럽에서 거둔 엄청난 수익을 세금이 낮은 지역의 법인에 몰아주는 방식으로 조세를 회피하는 사례가 다수 발견됐다. 이를 막기 위해 이른바 '구글세'를 도입하자는 선진국들의 노력이 시작됐다. 지난달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각국은 구글세 도입을 담은 보고서를 승인했다. 구글 등이 세계 각국에서 얼마를 벌어 세금을 어디에서 얼마나 내는지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G20은 OECD와 각국의 법인세율 차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가 바라던 바이기도 하다. 여기에 '법인 바꿔치기'에 대한 규제가 강화된다면 조세회피를 노리는 글로벌 기업들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