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국 객원논설위원 대학에서 사회학, 통신공학(석사)을 공부했다. 한국정보통신(주)팀장, 현대그룹 그룹홍보실 부장, 오리온 홍보실 실장 역임
이준용 대림그룹 명예회장은 재계의 신사다.
말수가 적지만 말과 행동이 같아서다. 그에게선 강압된 권위라는 것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또 30대 그룹에서 대림그룹만큼 홍보를 안하는 기업도 드물다. 이재준 고 명예회장이 소탈하고 부지런했다면 이준용 대림그룹 명예회장은 행동으로 세상과 소통한 경영자였다.
4년전 가을 어느날 병원에서 이 명예회장을 만났다. 병원 접수실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자리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는데 훤칠하게 생긴 노년의 신사분이 들어왔다. 나는 그분을 대번에 알아봤다.
같이 따라온 대리정도 되어 보이는 직원이 접수직원에게 얼마나 기다려야 되는지 물었다. 접수를 보는 직원은 미안한 표정으로 환자가 많아 좀 기다리셔야 한다고 했다. 수행비서인 어린직원은 난감해 했지만 그분은 환하게 웃으며 수행비서에게 손짓을 했다.
나는 옆에 계신 그분께 인사를 했다. 그분은 "나를 어떻게 아냐"고 웃으며 물었다. 그러면서 나는 곁눈질로 힐끔 그분의 차림새를 다시 봤다. 구두끈이 없는 팬디구두 스타일에 회색양복 차림이었다.
"이준용 대림그룹 회장님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했더니 이 회장은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진료를 마치고 1층 약국에 내려갔더니 이준용 회장은 약국 앞에서 직원이 약을 타오는걸 기다리고 있었다.
"증상이 어때서 왔나요? 가을만 되면 콧물이 나고 재채기를 해서요" 했더니
이준용 회장은 "나도 그래"라며 웃었다. "근데 내 얼굴을 어디서 봤죠?"라고 내게 물었다.나는 "9시 뉴스에 전경련 얘기만 나오면 회장님 얼굴이 나오는 걸요"라고 말했다. 어떤 일을 하냐고 내게 물어 H 그룹 홍보실에 다닌다고 했더니 "아하, 그랬구먼"하시며 웃었다. 나는 아직도 그분의 맑은 눈빛과 환한 웃음을 잊지 못한다.
이 명예회장은 미국유학을 했고 대학 강단에도 있었다. 그런 그가 1966년 대림산업 계장(대졸 신입사원 직급)으로 입사를 해 굵직한 일감을 따내며 회사의 성장을 주도했다. 미국유학과 교수라는 신분이 무색하게 밑바닥부터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 명예회장은 1994년 대림그룹의 회장으로 취임을 했다. 그룹 55주년 창립기념식에서 주력 건설업과 여기에 석유화학을 더한다는 전략을 밝혔다. 당시 그룹매출은 2조원에 계열사가 11개 였다.
작년 대림의 매출은 1조원 가량 줄어든 14조 8000억원이었지만 여전히 재계 20위내를 지키고 있다. 이중 대림산업과 대림코퍼레이션(석유화학 등)의 매출이 그룹매출의 8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지난 7월 장남인 이해욱 부회장에게 사실상 그룹을 물려주기 까지 20년을 한우물만 팠다.
대림그룹의 지배구조는 이준용 부자의 지분변화만 생겼을 뿐 큰 틀은 바뀐게 없다.
이 명예회장(42.7%) 이해욱 부회장(52.3%)→대림코퍼레이션→대림C&Sㄱ컴텍, 대림산업→대림자동차, 삼호, 고려개발 등을 지배하는 구조다. 그는 경영자로서의 권리보다 책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기업 총수였다.
이 명예회장은 IMF때 개인 돈 350억원을 회사에 내놓았다. 전문경영인에 회장직을 물려주기도 했다.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은 선친처럼 겉치레를 싫어한다고 한다. 그룹관계자는 "대림그룹이라 불리는 것도 싫어"한다고 한다. 대림그룹의 홀딩스 회사인 대림코퍼레이션의 기업이념 도" 보이기 위한 일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핵심에 집중 하라. 알맹이 없는 겉치레와 내용 없는 형식을 거부하라"다.
이 명예회장의 집무실은 4층이었다. 대부분 비상계단으로 사무실에 출근 했다.다른 대기업 총수의 집무실이 건물 가장 높은 층에 위치한 것과 다른 모습이다.혹자는 이준용 회장의 집무실이 4층인 것은 비상시 빨리 대피하려는 거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임직원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자신의 방에 아무 때나 찾아오기 쉽게 하기 위한 이준용식 배려였다. 자신의 차문을 열거나 회사현관문을 여는 것도 직접한다.
이 명예회장은 원칙을 중요시한다. 평소에 말이 없다가도 원칙에 맞지 않으면 어느 자리에서나 작심하고 말을 한다. 살아온 길이 그랬다. 1988년 5공 청문회 때 "저 쪽에서 달라는데 어떻게 안 줄 수 있느냐"는 일화는 유명하다.
2007년 전국경제인연합회장 선거 때도 소신발언을 해 재계를 놀라게 했다.
자식들 결혼 청첩장에 날짜를 박지 않고 보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아무도 모르게 상을 치렀다. 얼마 전에는 자신이 가진 재산 2000억원을 기부하기로 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대림산업은 포항제철, 광양제철, 이순신대교, 청계천 복구공사, 청계천 복원공사, 국회의사당, 한국은행 ,올림픽경기장, 독립기념관에 걸쳐 기념비적인 것을 만들었다. 1975년 사우디 슈아이바 정유공장건설은 석유파동으로 어려운 우리경제에 단비 같은 역할을 했다.
대림그룹은 우리경제가 어려울 때 희망을 보여줬다. 그 뒤에는 이 명예회장이 있었다. 그는 국민들 앞에 말보다는 행동으로 세상과 대화하려 애썼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시 세상에 내 놓았다. 혼탁한 이 시대 이 명예회장이 더 그리운 이유다. 또 그의 DNA가 이해욱 부회장에 고스란히 살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