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해 8월 이후 4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인하했다. 한은이 정부와의 정책 공조 차원에서 경기 회복 지원에 나서 기준금리는 사상 최저인 연 1.5%다.
한은의 통화 정책 효과가 실물로 파급되는 데는 6개월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몇 차례의 금리 인하에는 경제 심리를 자극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만큼 시중 자금 흐름이 개선되리라는 기대감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필요한 곳으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
30일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10월 기준 은행의 예금회전율은 4.0회로 나타났다. 이는 2008년 금융위기 때 4.1회~5.1회(2008년 10월~2009년 12월)보다 낮은 수준이다.
◆'돈맥경화'…은행에 묶인 돈
은행 예금회전율은 분기 기준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11년 줄곧 4회를 웃돌다가 2012년 2·4분기 3.9회로 떨어졌다. 이후 지난해 4·4분기 4.1회로 높아졌고, 올해 2·4분기와 3·4분기 4.0회를 기록 중이다.
예금회전율 중에서도 요구불예금 회전율은 22.9회로 올해 들어 20회 대에 머물고 있다. 2008년 10월 35.4회를 한참 밑돈다.
예금회전율은 기업이나 개인이 투자 및 소비 등을 위해 예금을 인출한 횟수로, 돈의 유통속도를 나타낸다. 예금회전율이 낮다는 것은 예금자가 투자처를 찾지 못해 돈을 은행에 묻어두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음을 뜻한다.
한은의 통화지표에 따르면 기준금리를 인하했던 지난 9월 통화승수(계절조정 기준)는 17.6배로 역대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통화승수는 통화 한 단위가 몇 배의 통화를 창출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통화승수 하락은 그만큼 경제 활력이 줄었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유동성 함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 김천구 선임연구원은 "지금처럼 통화승수가 하락세를 보이면 정책효과가 상쇄되고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통화승수 하락은 한국뿐만 아니라 금융위기를 겪었던 미국과 '잃어버린 20년'을 경험한 일본, 경기부진에 따라 최근 양적완화를 단행한 유럽연합(EU)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소비성향' 최저치
우선 현재 유동성이 부족해서 소비나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 게 아니라 소비자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돈을 쓰지 않고 있기 때문에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내려도 소비나 투자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노후 대비 등을 위해 씀씀이를 최대한 줄이고 있다. 통계청의 '가계동향' 자료에 따르면 3·4분기 전국 가구의 연평균 가처분소득 대비 소비지출액 비율, 즉 '소비성향'은 작년 동기보다 1.0%포인트 하락한 71.5%였다. 관련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2003년 이후 3·4분기 기준 최저치다. 소비 부진은 지갑을 잘 열지 않는 고령층 인구 비중이 늘었고 미래에 불안감을 느낀 젊은층마저 노후에 대비해 씀씀이를 줄인 것으로 분석된다.
기업 역시 막대한 사내 유보금을 쌓아두고 있지만 투자에 적극적이지 않다. 한국은행과 통계청에 따르면 기업 투자 여력을 나타내는 설비투자조정압력은 올 3분기 -0.3%포인트를 기록하며 3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행진을 보였다.
갈 곳을 잃은 돈은 시장 주변만 맴돈다. 한국은행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9월 말 현재 단기 부동자금은 약 921조8000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한편 한국은행은 국회에 제출한 통화신용정책보고서에서 지난 4차례의 금리 인하가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과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각각 0.18%포인트, 0.09%포인트 올리는 효과를 낼 것으로 추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