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 돈이 '4대문(은행권)' 안에 갇혀 있다. 초저금리 기조가 계속되면서 은행에 돈을 넣어두면 사실상 '마이너스(-)금리'를 받는데도 예금잔액은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다. 돈이 소비나 투자부문으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정부의 경기 부양책과 한국은행의 저금리 정책에도 이러한 '돈맥경화' 현상이 심화되자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사실상 마이너스 금리에도 은행에 몰리는 돈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4차례에 걸쳐 연 2.50%에서 1.50%로 1.0%포인트 내렸다.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는 연 1.81%(2015년 12월 기준)까지 떨어졌다. 현재는 연 1.5%도 안 되는 상품이 많다.
3일 전국은행연합회 공시에 따르면 KB국민은행 국민수퍼정기예금(1.4%), KEB하나은행(옛 하나·외환은행) 통합 행복투게더(Together) 정기예금(1.4%), 우리은행 우리유후 정기예금(1.35%), 신한은행 신한S드림 정기예금(1.3%), 한국씨티은행 프리스타일예금(1.3%), 광주은행 플러스다모아예금(1.24%) 등이 대표적이다.
상호저축은행의 정기예금(1년 만기) 평균금리도 연 2.47%에 머물고 있다.
금리 연 1.3% 상품에 1년 동안 4000만원을 넣어두면 만기 때 받는 이자는 52만원인데, 이자소득세와 주민세를 더해 이자의 15.4%를 세금으로 내면 손에 쥐는 이자는 약 43만원9920원이다. 연 1.1%의 이자를 받은 셈이다. 여기서 한은의 올해 물가성장률 전망치 1.4%를 빼면 손해보는 장사다.
그럼에도 은행에는 돈이 쌓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말 기준 예금은행의 총수신잔액(말잔액 기준)은 1492조원으로 1년 전 1356조원보다 10.03%(136조원) 늘었다. 이는 직전 1년(2013년 11월∼2014년 11월) 증가율인 6.43%보다 3.60%포인트 높다.
◆유동성 함정 빠지나
돈이 필요한 곳으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
한은의 통화지표에 따르면 기준금리를 인하했던 지난해 11월 통화승수(계절조정 기준)는 17.46배로 최근 2년래 최저수준으로 떨어졌다. 통화승수 하락은 그만큼 경제 활력이 줄었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유동성 함정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유동성 함정이란 돈을 풀어도 기업이나 가계 등 경제주체들이 돈을 움켜쥐고 사용하지 않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현상을 뜻한다.
현대경제연구원 김천구 선임연구원은 "지금 처럼 통화승수가 하락세를 보이면 정책효과가 상쇄되고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통화승수 하락은 금융위기를 겪었던 미국과 '잃어버린 20년'을 경험한 일본, 유럽연합(EU) 등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예금회전율도 부진하다. 예금회전율은 인출을 근거로 일정 기간 동안 시장에서 돈이 얼마나 활발히 돌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예금회전율이 낮다는 것은 예금자가 투자처를 찾지 못해 돈을 은행에 묻어두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음을 뜻한다.
한은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3.9회였다. 전달(4.0회)에 비해 0.1회 감소한 것이다. 예금회전율은 지난해 6월 4.4회로 깜짝 반등하며 시중에 돈이 돌기 시작했다는 희망을 줬다. 그러나 다음달 4.3회, 8월 3.8회, 9월 3.9회 등 다시 하락세로 돌어섰다.
예금회전율 중에서도 요구불예금 회전율은 22.6회로 3개월 연속 하락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예금 금리가 낮은데도 이처럼 예금잔액이 불어나는 것은 가계나 기업, 공공부문 등 경제주체들이 마땅히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금리 장사하는 시중은행들
시중 은행들은 이 돈으로 금리 장사를 하고 있다.
은행연합회 자료에 따르면 작년 12월 취급액 기준으로 16개 은행 가운데 14개 은행의 분할상환식 주택담보대출(만기 10년 이상) 평균금리가 연 3%대로 올라섰다.
2%대 금리를 유지하는 곳은 SH수협은행(2.99%)과 광주은행(2.92%) 등 두 곳뿐이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1.5%로 내린 지 한 달 만인 작년 7월 연 3% 밑으로 떨어진 주택담보대출 상품이 등장했고, 두 달째인 8월부터는 시중은행 대부분의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2%대로 내려앉았었다.
담보대출 규모가 가장 큰 KB국민은행은 3.24%, 2위인 우리은행은 3.26%로 파악됐다. 신한은행은 3.24%, KEB하나은행은 3.20%이고 외국계인 한국씨티은행과 SC은행은 3.15% 수준이었다.
금융공공기관인 산업은행(3.78%)과 기업은행(3.22%)도 3.0%를 훌쩍 넘었다. 지방은행 중에는 신한금융지주 계열인 제주은행 금리가 연 3.21%로 가장 높았고 전북은행(3.15%), 부산은행(3.13%), 대구은행(3.12%)이 그 뒤를 이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최근 주택담보대출 금리의 기준이 되는 코픽스와 금융채 금리가 모두 올라 평균 대출금리가 전반적으로 상승했다"고 말했다.
고객이 많이 찾는 정기 적금 금리도 기간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연 2%대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