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증권가를 가장 떠들썩 하게 한 인물을 꼽으라면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다. 그는 대우증권을 품어 자본금 8조원에 육박하는 '공룡 증권사'를 탄생시켰다. 더 나아가 국내 금융투자업계에 대규모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증권사는 앞다퉈 '몸집 불리기' 경쟁에 나서는 모양새다. 차별화된 사업 모델을 찾는 움직임도 치열해졌다. 현대증권은 타오로는 인수합병(M&A) 시장과 업계 재편에 기름을 붓는 형국이다.
◆박현주 회장 등 M&A로 성공신화
"한국 자본시장은 M&A역사다." 국내 시장에서 활동하는 외국계 증권사는 종종 이런 평가를 내놓는다. 300년간 차근차근 시스템을 만들어온 서구 주식시장과 달리 국내 주식시장은 반세기도 안 된 짧은 시간 동안 선진국 증시에 버금가는 압축성장을 이뤘다는 이유에서다. 서구 최초의 주식거래소는 17세기 초 네덜란드에 만들어졌다.
반면 국내 증권영업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49년이다. 국내 최초의 증권사인 대한증권(교보증권의 전신)이 설립돼 장외시장에서 국채와 땅문서 거래 업무를 맡아 했지만 증권거래소가 없어 오늘날의 '증권'과는 개념이 달랐다.
'제대로 된' 증권업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가 설립되면서부터다. 이 후 대한증권을 비롯해 서울·신영·한양·부국증권 등이 제도권 안에서 주식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영난으로 청산한 증권사는 2003년 건설증권과 2004년 모아증권중개 두 곳 뿐이다.
금융위기를 겪은 이후 오히려 숫자가 늘었다. 금융감독원 금융통계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07년 54개(외국계 포함)에서 2009년 62개로 늘었고, 2013년까지 이 숫자를 유지했다.
하지만 눈덩이 처럼 쌓여가는 적자에 증권사들도 허리띠를 졸라매거나 시장을 떠나야했다.
지난 2008년 설립된 애플투자증권이 그동안 누적된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2014년 시장에서 사라졌다. 비엔지증권도 금융투자업 인가를 반납했다.
◆한맥·LG증권 등 역사속으로
한맥투자증권의 경우 주문실수로 파산했다. 그러나 몇몇 증권사에는 위기가 기회였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97년 미래에셋자산운용, 99년 미래에셋증권이 설립될 때만 해도 토종 금융사인 미래에셋그룹이 이렇게 빨리 글로벌 시장에 진출할 줄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10년 전인 2006년만 해도 중소형 증권사에 지나지 않던 미래에셋증권을 KDB대우증권을 덥썩 물며 독보적인 1위 증권사로 올려놨다. 박 회장 두고 국내 최고의 투자 귀재라 칭할만 하다.
농협 계열의 NH투자증권도 M&A로 급성장한 곳이다. 농협금융지주가 인수한 우리투자증권과 NH농협증권이 합병해 출범한 'NH투자증권'은 총자산 42조원(2014년 10월)으로 대우증권(28조원)을 제치고 단숨에 증권업계 1위를 꿰찼다.
반면 범 LG계열로 증권업계 2위를 달리던 LG증권(2004년 3월 자산규모 4조6600억원)은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LIG투자증권도 시장에 매물로 나와 있다.
효성증권이 모태인 신한금융투자도 업계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73년 설립한 효성증권은 1983년 쌍용그룹에 인수되면서 사명을 쌍용투자증권으로 바뀌었다. 쌍용투자증권은 '증권업계 사관학교'로 불렸다. 선진 금융노하우와 글로벌 경영체계를 받아들여 업계를 선도한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1995년에는 업계 최초로 성과급제를 도입해 월스트리트저널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쌍용그룹이 사실상 해체되면서 쌍용투자증권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외국계 사모펀드와 신한금융계열로 잇따라 주인이 바뀌었다.
1962년 탄생한 동양증권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2014년 10월 대만계 '유안타(元大)증권'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