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불사(大馬不死)'. 큰 말은 죽지 않는다는 뜻으로, 세계 금융위기의 주범이었던 거대 투자은행들이 부실에도 살아남은 것을 빗대 자주 사용됐다. 과거에는 통했다. 대기업은 문제가 생겨도 어떻게든 살아 남았다. 정부나 채권단이 발 벗고 나서서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포스코 계열사였던 포스코플랜텍이 증시에서 퇴출됐다. 현대그룹 계열의 현대상선은 채권단 공동관리(자율협약)에 들어갔다. 그 영향으로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산 투자자들은 원금을 날릴 처지에 놓였다.
대마(大馬)들이 위기에 놓이면서 서울 여의도 증권가에 적색 경보등이 발동됐다.
◆주식시장 '상장폐지 경보'
한국거래소는 3월 31일 포스코플랜텍의 상장폐지를 확정했다.
이 회사는 정준양 전 포스코 회장 시절 포스코그룹에 인수됐지만 이후 적자 상태가 지속되면서 '고가 인수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지난해 9월 기업재무구조개선(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포스코 계열사에서 제외됐다.
2011년 만 해도 5975억원의 매출에 94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리는 알짜 기업이었다. 하지만 경기침체와 온갖 의혹, 부실 등이 터지면서 2015년 한 해 동안 연결 기준으로 1272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특히 울산 공장은 적자가 수년째 지속됐다.
포스코도 포스코플랜텍을 살리기 위해 그동안 5000억원이 넘는 돈을 쏟아부었다. 2010년 성진지오텍을 인수할 때 1600억원을 들였고 이후 두차례 포스코플랜텍 유상증자에 3600억원을 투입했다.
'포스코'란 이름값을 믿었던 애꿎은 개미(개인투자자)들은 낭패를 보게 됐다. 지난해 말 기준 소액주주는 16.27%이다.
개미들의 시련은 포스코플랜텍 한 곳에 그치지 않는다.
기한 내에 사업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은 보루네오가구, 상장적격성 실질심사 대상 법인인 고려개발·동부제철·삼부토건, 상장공시위원회 심의 예정 기업인 한국특수형강·현대페인트 등 6개사가 상장폐지 우려 법인 명단에 올라 있다. 이 중 보루네오가구는 4월 11일까지 사업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을 경우 4월 27일 상장폐지된다.
거래소는 사업보고서 미제출과 자본금 50% 이상 잠식 등을 이유로 현대상선, 세하, 핫텍, 보루네오가구 등 4개사를 관리종목으로 신규 지정했다.
코스닥시장에서는 플렉스컴을 포함해 총 12개사에서 상장폐지 사유가 발생했다. 이 중 피엘에이도 자본 전액잠식으로 상장적격성 실질심사를 통해 상장폐지 여부가 결정된다. 용현BM, 현진소재, 아이디에스는 4월 11일까지 사업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을 경우 상장폐지 절차를 밟게 된다. 이밖에 아이팩토리, 엔에스브이, 세진전자, 엠제이비, 인포피아, 파이오링크, 제이앤유글로벌은 감사의견 거절 등으로 상장폐지 사유가 발생했다.
◆'신주인수권(워런트)'에 발목잡힌 개미들
현대상선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산 투자자들도 원금 손실 걱정에 가슴을 졸이고 있다.
지난해 9월 발행된 현대상선 분리형 BW의 신주인수권이 관리종목 지정으로 지난 25일 상장폐지되면서 거래가 불가능해졌다.
사채에 신주인수권이 부여된 BW는 일반 회사채 발행이 힘든 기업들의 자금 조달처이다. 일반 회사채보다 이율은 낮지만 주가가 오를 경우 신주인수권을 행사해 적잖은 차익을 얻을 수 있다.
현대상선은 지난해 9월 1500억원 규모의 분리형 무보증 BW를 발행하면서 연 3% 금리와 7%의 만기보장 수익률을 제시해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당시 이틀간의 청약에 4조원이 넘는 자금이 몰렸다.
하지만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현대상선이 지난 29일 채권단 공동관리(자율협약)를 받게 됐다. 현대상선이 채권단에 진 부채는 대출액 1조원에 회사채 2000억원을 더해 1조2000억원이다. 또 채권단은 실사 결과를 바탕으로 출자전환을 포함한 현대상선의 채무 재조정 방안도 세우기로 했다.
덕분에 일부 투자자들은 원금까지 날릴 처지이다.
상당수 기관들은 이미 발을 뺀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상선은 지난해 9월 초만해도 7000~8000원대였다. 당시 유동성 위기설이 돌면서 주가는 급락했고, 기관 투자자들은 채권 대용납입 방식으로 주당 5000원짜리 신주인수권을 행사해 적지 않은 이익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채권 대용납입은 신주인수권을 행사할 때 현금으로 주식을 사지 않고 기존 채권가치를 활용해 납입대금을 충당토록 하는 것이다.
대용납입으로 현대상선 전환사채(BW)의 전체 채권가치는 애초 1500억원에서 540억원으로 3분의 1 토막이 났다.
현대상선의 문제에 국한된다면 다행이다.
한국기업평가는 지난 해 신용등급이 하향 조정된 기업이 총 61개사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이는 1998년 외환위기 당시 신용등급 강등 기업 63곳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이들 중 일부와 평가 대상에서 뻐져있는 적잖은 기업들이 CB와 BW 발행해 왔다.
전문가들은 최근 글로벌 경기 침체와 실적악화로 신용등급이 투기등급으로 떨어진 기업들이 많아 올해 이들을 중심으로 CB와 BW 발행 물량이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CB나 BW를 발행하는 기업은 신용등급이 낮아 일반 회사채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이 어려운 곳들이 대부분이다.
증시 전문가들은 "전환사채(CB)나 BW는 일반적으로 주가가 내릴 때는 채권 이자를, 주가가 오를 때는 이를 행사해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상황이 달라지면 현대상선 꼴이 날 수 있다"며 "특히 기업가치가 좋은 기업의 경우 권리 행사시 경영권까지 위협할 수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