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정성스럽게 준비한 작품들을 내건다. 행여 삐뚤어졌을까 전체적인 강약을 조절하며 나름 공들여 벽에 붙인다. 남들은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별 관심마저 없을 부분까지 세심하게 어루만진 후 설치를 끝낸다.
오프닝 시간이 되면 때 맞춰 하나 둘 씩 전시장으로 들어선다. 작가는 한 명 한 명 반갑게 맞이하고, 전시장을 찾은 이들도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 그리곤 옹기종기모여 대화를 나누다 헤어져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는 전시 첫 날의 흔한 풍경이자, 언뜻 정겹고 따뜻하게 느껴질 수 있는 장면들이다. 허나 평화로운 겉과 달리 속은 그리 평온하지 못하다.
우선 작가는 짧으면 일주일, 길어야 한 달여에 불과한 전시를 위해 농사를 짓듯 1년 혹은 수년에 걸쳐 작품을 만든다. 그러나 그 작품은 대개 온갖 일거리를 찾아 전전한 돈으로 구입한 재료와 피로를 억누른 시간의 결과물이다. 가끔은 예술가가 직업인지, 한 달에 서너 개씩 하는 부업이 본업인지 스스로조차 헷갈려 하면서 생산한 통고의 산물이다.
전시를 열어도 마음은 편치 않다. 전시장을 찾는 이들의 다수는 거의 지인이다. 그나마 전시 이튿날부턴 관람객도 발길이 뜸하다. 많은 예산을 투입하는 대형 갤러리들의 마케팅, 지명도 높은 작가가 아니라면 그들의 전시는 그야말로 그들만의 잔치로 머문다. 때문에 화려한 주인공으로써의 무대는 하루일 뿐, 대체로 텅 빈 공간에 을씨년스럽게 덩그러니 앉아 있다 전시를 끝내는 게 다반사다.
전시 종료란 현실로의 귀환을 의미한다. 민생고 해결을 위한 숱한 고민과 다시 대면하는 것과 같다.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까 대신 뭐 먹고 살까가 앞선다. 그림이라도 팔렸다면 다소 낫겠으나, 언제나 그렇듯 그림 매매는 쉽지 않다. 몇몇이 값을 물어보긴 해도 실제 구입할지는 미지수다. 그림 값이 입금되기 전까지 그림은 팔아도 판 것이 아님을 대부분의 작가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설사 그림을 매도했다 손쳐도 작가가 손에 쥘 수 있는 건 손톱만하다. 마치 쌀의 50%를 지주에게 헌납한 후 농사짓는 비용까지 제하고 나면 고작 10~20%의 몫밖에 돌아가지 않았던 일제강점기의 농부처럼, 예술가들 또한 화랑이 50%를 떼어간 뒤 재료비, 액자비, 운송비, 자료제작비 등을 계산하면 사실상 남는 게 없다.
그러고 보면 척박한 토양에서 억척스럽게 생산한 쌀 한 톨조차 쉬이 넘길 수 없었던 당시 농부나, 거칠고 모난 세상을 비옥하게 변화시키는 데 일조함에도 정작 80%의 예술가가 극빈한 현실은 묘하게 닮았다. "신분제를 공고화해야"한다는 교육부 나향욱 정책기획관의 정신 나간 바람(?)처럼 사회적 위치도 그리 대단치 않게 취급된다. 차이라면 농사의 형태가 다르다는 사실 정도다.
그럼에도 농부는 생명 연장과 지속성을 위해 수확과 결실로 보답하듯,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 현대인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며 심성을 보듬는다. 넓게는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열람케 하며 한 시대의 모더니티를 창출한다. 사유하는 방식과 세상을 보는 관점을 새롭게 제시하는 것도 예술가들이다.
다만 묵묵히 터전을 일굴 뿐 아무 말 않는 농부마냥 예술가들 역시 예술의 의미와 쓸모를 알아달라고 강요하진 않는다. 물론 가난이 삶의 명예를 갉아먹진 못함을 믿은 채 소신껏 작업하는 이들을 고마워하는 이들도 찾기 어렵다. 심지어 작가들이 있기에 화랑, 미술관, 미술저널, 평론 등이 존재할 수 있다는 태생적 진실 앞에서조차 고개를 수그리는 건 작가들이기 일쑤다. 참 야릇한 구조요, 개떡 같은 현실이다.
※홍경한은 미술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다. 월간 '미술세계', 월간 '퍼블릭아트', 월간 '경향아티클' 등, 국내 주요 미술전문지를 두루 창간했으며 편집장을 맡아왔다. 현재 비평과 강의, 방송과 집필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