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은 그림이나 조각과 같은 어떤 물리적 결과물을 내놓는 것을 넘어 관람자들의 미적 경험을 유도해 새로운 예술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기도 한다. 또한 장르, 학제 간 경계 없는 혼용, 융합, 공존의 방식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맥락화하며, 하얗게 칠해진 갤러리가 아닌 살아 있는 장소를 무대로 한 '관계'에 무게를 둔 예술형식도 드물지 않다. 이를 흔히 경계 없는 '상호 지향적 예술'이라 부른다.
상호 지향적 예술에서의 방점은 불특정 다수의 참여를 이끌거나 그들이 곧 예술가, 예술작품의 완성에 근접할 수 있도록 하는 '제안과 공유'에 있다. 따라서 예술의 주체는 곧잘 작가로부터 관람객 혹은 참여자에게 이양되거나 전도된다. 결과물보다 관객의 반응을 우선시하며, 예술적 가치 역시 어떤 시각적 오브제가 아니라 삶의 과정 및 미적 경험의 지속성을 복원하기 위한 상호작용 자체에 둔다.
일례로 아르헨티나 태생의 태국작가인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의 작업에서 작가의 존재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관람객들이 채운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0년 뉴욕의 한 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 이후 자주 선보여 온 '무료-무제'이다.
사람들에게 태국 카레 또는 팟타이를 요리해 접대하는 이 프로젝트는 음식을 매개로 일시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서로 교감하며 의제를 생성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예술의 완성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나아가 수동적 감상자였던 관객들을 능동적인 참여자, 소통의 대상으로 전환시켜 오랜 시간 유지되어 온 예술과 관객 간 불균형을 깨뜨렸다는 점 또한 하나의 의의다. 물론 이 모든 것에는 동시대 사회적, 문화적 상황이 투영되어 있다.
같은 선상에서, 지난 2일 부산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창작공간인 '홍티아트센터'에서 펼쳐진 글로벌 요리 경연 프로그램 '미술가와 미식가의 미친 레시피'도 예술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내세운 기획이다.
1년에 한두 번씩 작가 작업실을 개방해 시민들에게 작품을 소개하고 교류하는 오픈 스튜디오 세부 행사로 진행된 이 프로그램은 갤러리를 주방처럼 꾸며 화이트큐브라는 공간에 대한 고정관념에 변화를 주었다. 또한 각 나라별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관람객과 예술가의 관계를 평등하게 위치시켰으며, 각자 만든 음식을 먹고 대화하면서 국가와 인종, 세대를 넘어선 다양한 소통의 길을 텄다. 덕분에 작업의 일부가 된 시민들을 비롯, 경남예술창작센터,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감만창의문화촌 등, 행사에 적극 참여한 인근 예술 공간들은 관계와 연대, 한시적 공동체라는 특별한 경험을 맛봤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예술행위의 주체를 관람객에게 돌렸다는 데 있다. 실제로 홍티아트센터 운영자들과 입주작가들은 시민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고 경연을 펼치는 만남의 장에 동참했을 뿐 주인공 역은 그곳을 찾은 방문객 모두였다. 작가들은 그저 지역과 문화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 내는 '자발적' 중간자로 국한됐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음식 만들기는 누구나, 모두의 예술이 될 수 있었다.
'미술가와 미식가의 미친 레시피'는 100여개가 넘는 국내 창작 공간들이 한번쯤은 해보는 작디작은 행사 중 하나였지만 기존 전시 관행에 대해 질문하며, 보는 것과 지각하는 것, 세계 속에서의 관계란 무엇인지를 되묻는 예술적 시도였다. 음식 만들기와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지역이 당면한 문제와 사회적 관계를 탐구하려 한 과정의 예술이었다. 모르긴 해도 그곳에서 시민들은 새로운 형식의 미적 경험을 하거나 현대미술의 여러 갈래 중 하나를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소통과 교감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 현대미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결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을 상상하던 그것이 곧 예술일 수 있음 역시 동시대 미술이 선사하는 재미있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