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여 전인 지난 2009년 10월 13일 한국거래소 이정환 이사장이 자리에서 물러난다. MB정부가 들어선 이후 참여정부 쪽 '마지막 인사 청산'의 희생양이었다. 이미 대분의 공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은 자리를 내놓은 상황이었다. '공기업 개혁'이란 대의명분 아래 이들을 물러나게 하고, 새 부대에 새 술을 담은 것.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5월 대선이 현실이 됐다. 전 정권에서 막차를 탔던 금융권 CEO들이 '단명' 위기에 처했다는 분석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5월 대선에 단명위기 CEO 노심초사
"직간접적인 사퇴 압력을 많이 받았다."(2009년 10월 15일 거래소 임직원에게 보낸 전자우편) 이정환 전 거래소 이사장(현 세계미래포럼 대표)은 당시 이명박 정부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특히 자본주의의 꽃이요, 시장인 거래소에서 가장 반시장적인 일이 벌어졌다고 개탄했다.
'바람에 등불'인 박근혜 정부 시절 마지막 부름을 받은 공기업 CEO. 이들의 심정은 어떨까.
가장 큰 관심사는 한국거래소(KRX) 정찬우 이사장의 거취다.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출신으로 '최순실 게이트' 발생 직전 한국거래소 수장 자리에 오른 정 이사장. 정 이사장은 국정감사에서 "자본시장법과 정관에 정한 바에 따라 투명하게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낙하산 인사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정의당 심상정 의원은 "주총도 깜깜이로 진행되는 등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를 위한 요식절차였다"고 지적했다.
정 이사장은 '금융계 황태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자랑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지난 수 년 간 금융권에서는 '만사정통'이라는 말이 유행어 처럼 떠돌았다"면서 "정 이사장을 통하면 금융업계의 각종 현안이 해결된다는 뜻"이라고 전했다.
취임 초기만 해도 "소통하는 이사장. 역대 이사장님 중에 가장 (직원들) 반응이 뜨겁다" 며 직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거래소 한 직원은 "글로벌 거래소들과 경쟁에 뛰어 들어야 할 상황에서 사실상 조직이 멈춘 상태다. 정권이 바뀌고 또 다른 수장이 오면 인적 청산과 업무보고로 올 한해를 보내야 할 판이다"고 우려했다.
지난해 12월 취임한 정지원 한국증권금융 사장도 정중동 행보다.
소리없이 막차를 탄 다른 낙하산들도 완주가 걱정이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정일영 사장은 국토해양부 항공정책실장 출신이다. 총선 출마를 위해 기관장에서 사퇴한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자리를 채운 성일환 한국공항공사 사장은 공군참모총장 출신 퇴역 장성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도 국토교통부 기획조정실장을 역임한 박상우 사장이 선임됐다.
지난해 11월에는 백창현 대한석탄공사 사장, 장재원 남동발전 사장, 정하황 서부발전 사장 등이 취임했다. 모두 TK 출신으로 정 사장을 제외하고는 경북고 동문들이다. 백 사장은 경북 칠곡 출신으로 경북고와 영남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1982년 3월부터 석탄공사에서 근무했다. 장 사장은 경북고와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한전에서 근무해 왔다. 정 사장은 대구 계성고와 중앙대 행정학과를 졸업했으며 한전 기획처장과 한수원 기획본부장 등을 지냈다.
서금회도 걱정이다. 박지우 KB캐피탈 사장(전 국민은행 부행장), 정연대 코스콤 사장 등이 대표적인 서금회 멤버다.
◆좌불안석, 정치권 줄대기 바빠
이것이 다가 아니다. 지난해 10월이후 4개월여 동안 정권 말 막차 티켓을 놓고 '관피아' '정피아' '금피아' 등 낙하산 인사들의 보이지 않은 각축전이 벌어졌다. 박 대통령의 탄핵 작업이 속도를 내면서 스텔스 인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시민단체 사회공공연구원에 따르면 최순실 게이트가 본격화한 지난해 10월부터 1월까지 4개월 동안 공공기관장에 임명된 44명 중 24명(54.5%)이 전직 관료였다. 이는 박근혜 정부 초기인 2013년 6월 공공기관 295곳 중 108곳(36.6%)이 관료 출신이었던 것과 비교해도 높은 비율이다.
관료 출신이 기관장으로 취임한 공공기관은 강남훈 한국에너지공단 이사장, 문창용 한국자산관리공사 사장, 이관섭 한국수력원자력 사장, 이재홍 한국고용정보원 원장, 심경우 근로복지공단 이사장 등이다.
'모피아'(기획재정부+마피아)의 공공기관 득세는 더욱 두드러졌다. 지난해 11월 한국자산관리공사 사장에 문창용 전 기재부 세제실장이, 올해 1월 기술신용보증기금 이사장에 기재부 출신인 김규옥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이 취임했다.
공기업 한 관계자는 "몇몇 CEO들은 업무 보다는 차기 유력 정당에 줄대기하는 경우가 많다. 나라도 걱정이지만, 당장 조직이 어떻게 될 지 걱정이다"고 하소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