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는 한 해도 더 갈 수 없다는 절박감에 만들었습니다. 늘상하는 얘기로 치부하지 말아주십시오".
재계가 대권주자들과 차기 정부에 '장기적 경제 비전'을 요구하고 나섰다. '장미대선'을 앞두고 대선주자들이 앞 다퉈 경기부양책을 내놓고 있지만 대부분이 재원 마련책 등 구체적인 실현 방안이 없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을 의식한 정책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재계는 이 같이 단발성 정책이 남발될 경우 기업의 고용과 투자를 크게 위축시키고 결국 우리 경제가 벼랑 끝으로 내몰릴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이에 재계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단 명의로 대선후보들에게 건의하는 경제계 제언문을 22일 내놨다. 그동안은 대선후보들에게 백화점식으로 100여 건의 정책 리스트를 건의해 왔지만 이번엔 ▲공정사회 ▲시장경제 ▲미래번영의 3대 틀을 중심으로 한 9개 경제 어젠다를 꺼냈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특정 이슈에 대해 찬반을 얘기하는 것도, 절박감에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떼쓰는 것도 아니다"라며 "장기적으로 선진국 진입을 위한 변화, 누구나 지적하지만 고쳐지지 않는 정책, 시장경제원칙의 틀을 흔드는 투망식 해법 등에 대해 신중히 고민해 달라"고 강조했다.
재계는 공정사회의 틀을 구축하기 위한 방안으로 '노사정 신뢰회복'과 '시장 주도의 기업지배구조 개선', '고용의 이중구조 해소'를 제시했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두터운 불신의 벽에 갇혀 있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정부는 기업을 믿지 못해 일일이 규제하고, 기업은 규범보다 실적을, 정치권은 대립프레임 속에 공전을 계속하면서 불신이 커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이에 대한 대변혁을 주문한 것이다.
특히 재계는 '새 정부 신드롬'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새 정부가 들어서는 5년마다 정책방향이 바뀌면서 중장기 개혁들이 매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책시계가 5년이 아니라 10년, 30년을 내다볼 수 있어야 기업도 그에 맞는 사업계획을 짤 수 있다는 점에서 '장기적 경제 비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병연 서울대 교수는 "경제에 대한 안정성이 확보돼야 미래 예측가능성도 높아져 기업들이 사업을 펼칠 수 있다"며 "차기 정부는 일관적으로 정책을 펴 경제의 안정성을 높이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재계는 제조업 매출이 3년 연속 줄어 '메이드 인 코리아' 신화가 저무는 상황에서 정부주도형 성장공식인 '대한민국 주식회사'를 과감히 버리고 민간주도의 파괴적 혁신을 유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내놨다.
미래번영을 위한 제안으로는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 교육혁신, 인구충격에 대한 선제대응을 들었다. 재계는 복지분야 정부지출이 OECD 최하위 수준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복지확대에 대해선 찬성 입장을 밝혔다. 다만 복지부담을 지나치게 높이면 경제가 위축되고, 경제가 창출하는 가치샘이 고갈된다는 점에서 고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재계의 이번 제언문은 지난달부터 72개 전국 상의를 통해 기업들의 의견을 수렴한 뒤 기업 편향성을 줄이기 위해 보수·진보학자 40여명에게 두루 자문을 받았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오는 23일 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의당 등 5개 정당 대표를 찾아 이런 내용을 담은 '제19대 대선후보께 드리는 경제계 제언문'을 전달할 계획이다.
이동근 대한상의 상근부회장은 "정치시계가 빨라지면서 대선후보들이 자칫 '선명성 함정'에 빠질까 우려된다"면서 "첫 단추를 잘못 채우면 국가 전체적으로 시행착오를 겪게 되는 만큼 한국사회와 한국경제의 현실을 잘 진단하고 미래비전과 해법을 설정하는데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