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너머로 보이는 초대형 크리스마스카드 한 장이 정겹다. 시내 길모퉁이 건물 앞 광장에 현란하게 치장한 트리! 꼬마전구가 반짝반짝 불을 밝히며 크리스마스 시즌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나절 내린 함박눈은 트리 주변을 수북수북 새하얗게 색칠해놓았다. 어릴 적에 투박한 도화지로 만든 크리스마스카드가 그랬다. 엉성하고 손때 묻어 꼬질꼬질했어도 요모조모 갖출 건 다 갖췄다. 거리 곳곳에 집채만 한 트리 옷을 입고 있는 카드들보다 훨씬 더 속이 알찼다.
흰 눈, 산타할아버지, 동네 아이들, 눈사람, 종, 동산, 썰매까지도 담겨 있었다. 하지만 함박눈 구경하기가 힘들었던 내 어릴 적 고향에선 이런 조합은 꿈같은 얘기였다. 그래서 내 카드엔 눈에 대한 동경이 스며있었다. 반짝이 종이를 붙인 트리만이 알록달록 불을 밝혔을 뿐, 온통 눈을 덮고 있었다. 눈은 현재 진행형으로 내렸다. 하얀색 크레용으로 펑펑 그렸다. 빨간 산타 모자에도 흰 눈이 날렸으며, 하얀 털실을 덕지덕지 붙인 산타의 수염도 나풀거리며 눈보라가 쳤다.
그러니 내가 만든 크리스마스카드는 소품만 앉힌 단순한 정물화가 아니었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별천지 눈에 대한 동경을, 갈증을 도화지 위에 한 편의 그림동화를 썼다. 동네 아이들은 솜이불 같은 눈 위를 뒹굴며 뛰놀았다. 더러는 눈사람을 만들며 눈썰매를 탔다. 동산은 하얀 고깔을 쓰고 있었으며, 흰 털옷을 입은 트리는 불을 환히 밝힌 채 산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만치 크리스마스 선물보따리를 든 산타할아버지가 그 풍경 속으로 들어왔다.
그런 꿈을 꾸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이맘때 카드의 뜰에 이야기를 담은 소품들을 붙이고 그렸다. 그런데 늘 아쉬운 게 있었다. 캐럴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는데 어른이 된 어느 날 멜로디 크리스마스카드가 시중에 나온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소리가 나는 종이. 세상은 상상하는 대로 이뤄지는구나! 그런데 정작 스피커에는 캐럴 소리가 쉬 나지 않는다. 이따금 카페에서 흘러나오긴 해도 잔뜩 움츠려 있다. 젊은 날에 거리 곳곳을 채우던 그 흔한 징글벨이.
그게 세상 밖으로 함부로 나오지 않게 된 건 저작권인가 뭔가 하는 문제 때문이란다. 게다가 온라인 다운로드로 바뀐 음반구매 패턴도 한 몫 했을 터다. 이런 처지의 캐럴이 이맘때면 귓속에서 여전히 쟁쟁거리는 건 어떤 설렘이 꿈틀거려서다. 학창시절 종로거리를 거닐다 어디선가 캐럴 소리가 들려오면 괜스레 들뜨곤 했더랬다. 눈이 금방이라도 내릴 것만 같았다. 바람은 매서웠지만 마음은 포근했다. 대형 스피커가 있는 레코드 가게 앞은 청춘들로 북적거렸다.
수북이 쌓인 눈 위를 뛰어다니며 눈싸움을 하는 아이들! 그 정다운 풍경이 또 다른 크리스마스카드로 다가온다. 아이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릴 적 그런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어쩌면 옛 추억이 점점 아련하게 가물거리기에 캐럴이라는 소리를 그리워하고 집착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스친다. 추억의 풍경은 오래된 무성 영화처럼 색이 바래지만 캐럴은 그 때처럼 변함없이 재생해 생생하게 들려주니 말이다.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공식이 어디 있겠나. 세대와 시대에 따라 느낌이 다른 까닭이다. 동네 꼬마들은 반짝이는 트리, 눈사람 같은 풍경을 그릴 것이고, 청춘들은 약속, 함박눈, 돌담길 같은 낭만을 떠올릴 것이다. 장년층은 극장, 레코드 가게, 사탕, 크리스마스카드 같은 추억이 스치고, 노인층은 빗자루, 빙판길 같은 냉혹한 현실이 아른거릴 것이다. 내 추억의 산타가 크리스마스카드 창문을 열어젖히고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외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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