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림 테크노마트의 한 휴대폰 대리점 스마트폰 전시유리에 '금액 언급 절대금지'란 메모가 부착돼 있다. /유재희 인턴기자
"휴대전화가 동네 통신사 대리점보다 무려 30만원이나 저렴해 일주일 동안 테크노마트에서 쓰는 은어와 방문팁을 공부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24일 서울 구로구 신도림 테크노마트 9층. 불법 보조금의 '성지(聖地)'로 통하는 휴대폰 집단 상가는 연말연시 연휴를 맞아 단말을 저렴하게 구입하려는 손님들로 성황을 이뤘다.
휴대폰 집단상가 가운데 서울 신도림 테크노마트를 찾는 소비자의 상당수는 이처럼 사전에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등을 통해 올라온 불법 페이백(공식 보조금 외에 추가로 현금을 돌려주는 것) 정보를 확인하고 스마트폰을 구매하고 다녔다.
◆'폰파라치'로 몰리기 싫으면 가격언급은 절대 금지
신도림 테크노마트에 들어가니 고객들의 눈치싸움이 주식시장을 방불케 했다. 저렴한 스마트폰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최소 10여곳을 거쳐야 한다. 가격 시세도 매일 변하기 때문에 테크노마트 방문에도 '눈치싸움'이 필수다.
이날 매장을 방문한 최모(23)씨는 "7곳을 들려서야 시세(불법보조금)에 맞는 대리점을 찾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자가 테크노마트에 입점한 한 매장에 가보니 직원이 대뜸 "가격 어떻게 알아보셨어요?"라고 물으며 계산기를 건넸다. 이곳에서는 소비자가 입밖으로 단말 판매 금액을 말하면 거래는 바로 중단된다. 불법보조금을 신고하고 보상금을 받는 '폰파라치'를 가려내기 위해서다.
신도림 테크노마트에는 손님인 척 가장해 대화내용을 녹취해서 신고하는 폰파라치와 단속반이 종종 나타난다. 때문에 이날 매장 곳곳에는 '금액언급절대금지', '녹취나 촬영하시는 분은 폰파라치로 생각합니다' 등 여러 안내문이 부착돼 있었다.
단속을 피하기 위한 은어도 빈번하게 사용됐다. 가령 "신도림 스크번이 갤8+ 좌표 좀 찍어주세요"라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이 문장에서 '좌표'는 신도림 테크노마트에 입점해 저렴하게 단말을 구입할 수 있는 상점 번호를 의미한다.
통신사 명도 은어다. SK텔레콤은 '스크', KT는 '크트', LG유플러스는 '르그'로 통칭된다. '번이'는 번호이동을 뜻한다. 단말기 현금완납은 '현아', 페이백은 '표인봉'이라고 불린다. 은어를 모르면 단말의 구매후기 등을 해석할 수 없을 정도다.
실제 휴대폰 정보를 공유하는 커뮤니티나 대형 포털에 '신도림 아이폰' 또는 '갤럭시'를 검색하면 '신도림세상', '알고사' 등 스마트폰 구매 커뮤니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 매일 오늘의 스마트폰 날씨(가격시세)가 어플 밴드를 통해 공개된다. 가격시세는 '스마트폰 구매후기 게시글'의 평균 구매가의 평균을 산출해 계산된다. / 유재희 인턴기자
◆단통법 지원금 상한제 폐지에도 불법보조금 성행하는 이유는?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단통법)의 지원금 상한제가 폐지됐어도 이처럼 아는 사람만 아는 불법보조금과 페이백이 난무하는 이유는 프리미엄 스마트폰 지원금 책정에 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2014년 10월 시행된 단통법의 핵심 조항 중 하나인 지원금 상한제는 지난 10월 예정대로 일몰(폐지)됐다. 지원금 상한제는 출시된 지 15개월 이내인 단말기에 실리는 지원금을 최대 33만원으로 제한하는 제도다.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통로를 막아 오히려 단말을 비싸게 구입하게 돼 그간 소비자 사이에 불만이 가장 많았던 제도이기도 하다.
지원금 상한제 폐지 이후 이동통신사들이 지원금을 높일 것이란 기대도 있었지만 실제 상황은 다르다. 상한제 일몰 후에도 '갤럭시S8', '아이폰8' 등 신형 프리미엄 스마트폰에는 지원금이 대부분 10만원대 초반으로 일몰 이전과 비슷한 수준에 그쳤다.
애플 아이폰 탄생 10주년 기념으로 나온 프리미엄 스마트폰인 '아이폰X(텐)'의 경우 이통3사의 지원금은 11만~12만원에 그쳤고, 25% 선택약정할인을 선택할 경우 2년 간 총 66만원을 할인받을 수 있어 대다수 소비자들은 선택약정할인을 통해 스마트폰을 구매하고 있었다.
불법 보조금이 성행하는 데에 우려의 시각도 크다. 현행 단통법상 모든 온·오프라인 유통망은 동일한 규모의 보조금을 지원해야한다. 이를 위반할 경우 모두 이용자 차별 행위 원칙 위반으로 단속대상이 된다.
이날 신도림 테크노마트에서는 스마트폰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나이가 지긋한 중년 남성에게는 같은 기종의 기기를 '45만원', 정보에 밝은 20대 커플에게는 '30만원'을 부르는 게 목격되기도 했다. 이용자 차별을 막기 위해 시행된 단통법이 '무용지물'로 전락하는 현장이다.
지난 4~5월 삼성전자의 '갤럭시S8' 출시 전후에는 이동통신 3사가 불법 지원금을 일부 지급한 사실이 드러나 방통위가 시정조치안을 발송하기도 했다.
휴대폰 대리점을 운영하는 신모(31)씨는 "일부 제조사는 지원금을 높이는 대신 유통점의 리베이트를 실어 음성적으로 고객 유치에 나서는 경우도 빈번해 공식적인 단말기 구매가격을 낮추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유통망에서 전략적인 지원금으로 활용되는 리베이트가 '불법보조금'으로 변질돼 소비자 차별과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