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보다 게임을 우선시하는 것을 '질병'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최근 세계보건기구(WHO)가 게임 장애를 질병으로 공식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국내 게임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22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WHO는 오는 5월 열리는 국제질병분류기호 개정(ICD-11)에서 게임 장애를 질병으로 등재하는 방향을 검토하려고 하고 있다. WHO가 게임중독을 ICD에 포함하면, ICD를 기초로 만드는 한국질병분류코드(KCD)도 게임 중독을 질환으로 진단할 가능성이 커진다.
WHO의 ICD-11 초안에 따르면, 게임 장애는 '다른 일상생활보다 게임을 우선시 해 부정적인 결과가 발생하더라도 게임을 지속하거나 확대하는 게임 행위의 패턴'이라고 정의한다.
홍콩대 연구팀이 지난 2014년 발표한 '게임 및 인터넷 의존 행동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약 6%(약 4억2000만명)가 게임이나 인터넷에 의존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추정됐다. 게임 중독을 일종의 '질병'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이유다.
WHO에 따르면 게임 장애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진단기준은 ▲게임에 대한 통제 기능 손상 ▲삶의 다른 관심사나 일상생활보다 게임을 우선시하는 것 ▲부정적인 결과가 발생해도 게임을 중단하지 못하는 것 등이다.
이에 게임협회는 지난 19일 공식 성명을 내고 WHO의 이 같은 움직임이 게임 장애와 관련된 과학적인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명확한 데이터에 기반하고 있는지 우려를 나타냈다.
게임협회가 앞장서 WHO의 움직임을 저지하려는 이유는 최근 게임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는 상황에서 또 다시 게임을 '중독' 물질 중 하나로 취급하는 등 부정적인 프레임이 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 등이 반대해 무산되긴 했지만 지난 2016년 복지부는 정신건강 종합대책에 인터넷, 게임, 스마트폰 중독을 질병코드에 포함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국내뿐 아니라 미국게임협회인 ESA도 WHO 발표 이후 반대 성명을 내는 등 글로벌 게임 관련 단체들이 이에 반발하고 있는 모양새다.
협회는 "세계에서 온라인, 모바일, 콘솔 등 다양한 게임을 즐기는 이용자들이 약 20억명에 달한다"며 "이런 정의와 진단기준으로 20억명이 일상적으로 즐기는 문화콘텐츠를 질병으로 분류할 수 있는지 상식적 차원에서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우려되는 점은 WHO의 판단으로 게임이 '질병'이 될 경우 게임중독, 사행성 우려 등으로 게임을 보는 시각이 곱지 않게 되고 정부 규제가 더해지면서 게임 산업이 침체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 국내 게임 업계에서 정부의 규제는 오래 묵은 숙제다.
청소년들에게 심야시간(자정~오전 6시) 동안 온라인게임 제공을 금지하는 '셧다운제'가 대표적인 규제로 꼽힌다.
2014년 정부가 도입한 고스톱·포커 등 웹보드게임 규제 방안도 국내 게임 업체들의 성장 동력을 가로막고 있다. 3월 일몰을 앞둔 웹보드 게임 규제는 한 달에 50만원, 1회 베팅 한도가 5만원으로 정해져 있다.
한국게임산업협회는 '웹보드게임 사업자 대상 규제 검토 보고서'에서 국내 웹보드게임 시장 규모가 규제 신설과 시행의 영향으로 지난 2011년 기준 6370억원에서 2016년 기준 2268억원으로 5년 새 4000억원 이상 급감했다고 밝혔다. 연구개발비 비중과 연간 고용규모, 온라인게임 제작투자도 모두 줄어드는 등 관련 산업 위축 현상도 나타났다.
게임 업계 관계자는 "제4차 산업혁명의 첨병으로 나서고 있는 게임 산업이 질병으로 분류될 경우 국내에도 관련 법규나 제재가 가해져 규제의 늪에 또다시 빠질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