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가 20년 만에 국제 금융시장에서 신용등급이 하향 조정되는 수모를 겪었다. 지난달 31일(현지 시각) 글로벌 최대 신용평가사인 S&P가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 신용등급을 'A-'에서 'BBB+'로 하향 조정한데 이어 지난 1일 무디스도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의 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조정(등급은 Baa1 유지)했다.
"한국 기업들은 지난 3년여 동안 차입금을 감축해 왔지만 최근의 무역분쟁 심화, 기업의 공격적인 재무정책, 규제위험 등으로 인해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있다. "
지난 8월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이 같이 밝힌 '예언'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S&P를 포함해 무디스와 피치 등이 국내 대기업에 심심찮게 경고장을 보내고 있다.
당장은 경고장이지만 한국경제에 큰 부담이다. 특히 기업들은 수출길과 자금 조달 길이 막힐까 좌불안석이다. 신용등급에 민감한 글로벌 자금시장에선 이들을 '추락한 천사(fallen angel)'로부른다. 이들의 경고가 신용등급 하락으로 이어진다면 한국경제가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위기가 한꺼번에 겹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 韓경제 이끄는 쌍두마차, 현대차 이어 다음 타깃은?
가장 앞장 서서 한국 기업에 대한 우려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는 신평사는 S&P다. 지난 10월 S&P는 앞으로 우리나라 국가신용 등급이 올라가기 위해선 "한국 경제가 현재 우리의 예상보다 상당히 빠른 속도로 성장해서 경제적 번영과 회복력이 더 개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S&P는 문재인정부의 재정 확대 정책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S&P는 "문재인정부가 사회적 혜택과 일자리 창출을 늘리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정부 지출(government spending)이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대차그룹 계열사가 결국 타깃이 됐다는 분석이다. S&P 측은 "중국 시장의 소비자가 현대·기아차에 갖는 부정적 감정은 몇 달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미국 등 주요 자동차 시장에서의 경쟁 심화, 현대·기아차의 취약한 제품군, 통상임금 및 노동조합의 파업 등도 신용등급 하락의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경고장이 다른 기업으로 확산할 가능성도 크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3.0%에서 2.8%로 0.2%포인트 낮췄다. 또 내년 성장률 전망치는 2.9%에서 2.6%로 0.3%포인트 하향조정했다. IMF가 전망하는 내년 한국 성장률은 우리 정부의 전망치(2.8%)보다 0.2%포인트 낮은 2.6%로, 현대경제연구원(2.6%), LG경제연구원(2.5%) 등과 비슷하다. 이들은 "반도체 수출 외엔 뚜렷한 성장 엔진이 없고 고용 악화로 내수 부진이 심화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내렸다.
문제는 반도체 전망마저 어둡다는데 있다. 지난 10월 PC용 D램(8기가비트 DDR4) 가격이 10% 남짓 빠지는 등 메모리 가격에 대한 우려가 점증하고 4분기 글로벌 반도체 시장 성장률마저 6%(전년 동기 대비·IC인사이츠 보고서)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에 실적 기대감도 뚝 떨어졌다.
NH투자증권 도현우 연구원은 "4분기 영업이익은 3분기보다 5% 감소한 16조7000억원으로 추정된다"며 "2년 만의 D램(DRAM) 가격 하락이 반도체 부문 실적 둔화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의 불똥은 한국경제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코스피 상장사 181곳의 올해 영업이익 추정치는 196조6781억원 가량이다. 지난 해 말(210조2366억원)을 100%로 봤을 때 93.55% 수준이다. 내년 영업이익 추정치는 207조8966억원으로 작년 말에 제시된 220조8969억원의 94.11% 수준이다.
◆ 경제 비효율 제거해야
국내 기업들의 전반적인 신용등급 변화 방향은 하향 추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 중장기 등급 방향성을 가늠할 수 있는 기업 등급 전망이 '부정적'인 기업이 '긍정적'인 기업보다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한국기업평가의 '2018년 3분기 누적 신용등급 변동현황'에 따르면 9월 말 기준으로 부정적 신용등급 전망을 부여받은 기업은 22개였다. 긍정적 신용등급 전망을 받은 기업은 19개다.
유완희 무디스 연구원은 "신용등급이 부여된 한국 26개 비금융 기업(민간기업 23개, 상장 공기업 3개)의 상반기 재무실적은 대부분 신용도에 부정적이거나 신용도에 중립적"이라고 지적했다. 무디스에 따르면 26개사 중 11곳은 상반기 재무실적이 신용도에 부정적이었고 9곳은 중립적이다. 신용도에 긍정적인 기업은 6개에 그쳤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의 국제신용등급이 국내 등급보다 현저히 낮은 탓에 일각에서는 등급 인플레이션 논란도 존재한다. 실제로 국내에서 AA~AAA급의 초우량 기업들이 해외에서는 대부분 BBB급에 속해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국내 신용평가사 관계자는 "등급논리 자체가 달라 직접적인 비교는 큰 의미가 없다"며 "국제신용평가사들이 한국 기업들에게 소버린 리스크를 부여하는 것이 대표적"이라고 설명했다. 소버린 리스크는 해당 기업의 국가적·지역적 요인과 관련된 위험을 뜻한다.
문제는 기업 신용리스크 자체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데 있다. 가계나 국가 경제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신용등급 하락→투자 위축→실적 악화→소비 위축→경기 침체'의 악순환 고리가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
다만 급격한 크레딧 리스크에 빠질 가능성은 낮다. 스티븐 슈바르츠 피치 국가신용등급 아태지역 총괄 등 피치 평가단은 지난 1일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을 면담하면서 최근 한국경제가 여전히 양호한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앞으로도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한 관리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