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후 정동사거리 인근에서 '돈의문 AR'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해 봤다./ 김현정 기자
조선 태조는 한양 도성을 축조할 때 4개의 대문(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숙정문)과 4개의 소문(창의문·혜화문·광희문·소의문)을 세웠다. 서울 성곽 서쪽 대문으로 창건된 돈의문은 사대문 중 유일하게 미복원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서울시는 2009년 '서울성곽 중장기 종합정비 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일제강점기 때 철거된 돈의문을 비롯한 서울성곽 전 구간을 원형 복원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초 계획은 교통난과 보상 등의 문제로 무산됐다. 이후 시는 '디지털 복원 프로젝트'를 추진해 증강현실로 되살아난 돈의문을 시민에게 공개했다.
◆문화재와 테크놀로지의 이색 만남
21일 오전 '돈의문 터'를 찾았다./ 김현정 기자
지난 20~21일 한 세기 만에 돌아온 돈의문을 만나기 위해 종로구 평동 '돈의문 터'를 찾았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로 나와 3분(262m) 정도를 걸으면 야트막한 언덕이 모습을 드러낸다.
언덕 한켠엔 나무를 돌담 모양으로 쌓아 올린 목재벽과 한 뼘 높이의 낮은 계단이 있는데 이는 안규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공간 조형 작품 '보이지 않는 문'이다. 일제가 팔아넘긴 돈의문의 목재 파편을 상징한다고 한다. 당시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1915년 3월 조선총독부 토목국 조사과 주도로 경매가 진행돼 돈의문의 기와와 목재가 205원 50전에 경성 거주자 염덕기에게 낙찰됐다.
돈의문 터에 도착해 앱스토어에서 미리 내려받은 '돈의문AR' 애플리케이션을 실행시켰다. 스마트폰 카메라 렌즈를 정동사거리쪽으로 돌렸더니 화면에 '돈의문을 복원 중입니다. 움직이지 말아주세요'라는 문구가 떴다. 약 20초 후에 돈의문이 나타났다. 견고하게 쌓은 돌축대 한 가운데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들어진 홍예문이 나 있었다. 축대 위엔 우진각(정면에서 보면 사다리꼴, 측면에서는 삼각형 모양) 지붕의 초루가 세워졌고 낮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국보 1호 숭례문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직장인 이승일(35) 씨는 "증강현실이나 가상현실은 게임에나 적용되는 기술인 줄 알았다"면서 "문화재를 이걸로 복원해 놓은 걸 보니 정말 신기하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2018년 서울시는 문화재청, 우미건설, 제일기획과 '문화재 디지털 재현 및 역사문화도시 활성화 협약'을 맺고 9개월간 돈의문 복원 작업을 진행했다. 시와 문화재청은 프로젝트 총괄 기획을 맡았고 우미건설은 프로젝트 제안과 예산 지원에 나섰다. 제일기획은 증강현실 복원 작업과 체험관 제작 등을 담당했다.
◆실물 복원 안 돼 아쉬워
정동사거리 인도변에 설치된 키오스크 앞에서도 돈의문 AR체험을 해볼 수 있었다. 21일 오전 옛 돈의문 터 인근에서 만난 시민 황모(27) 씨는 "전 세계에 딱 하나뿐인 문화유산을 가상현실로 체험해야 하는 현실이 참 씁쓸하다"며 "돈이 좀 많이 든다고 해도 이런 건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1일 오전 한 외국인 관광객이 정동사거리 인도변에 설치된 키오스크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김현정 기자
종로구 옥인동에 사는 김모(42) 씨는 "중국이 국토 개발 사업을 하겠다면서 만리장성을 부수고 AR로 만들어놓으면 관광객들이 거기 찾아가겠냐"면서 "그리고 이렇게 스마트폰 앱으로 만들어 놓으면 50~60대나 노인들은 보기 어렵다"며 혀를 끌끌 찼다.
지난 20~21일 양일간 돈의문 터에서 30분 정도를 기다려봤지만 키오스크를 실행시켜보거나 스마트폰 앱으로 돈의문AR 체험을 해보는 시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원래 돈의문은 강북삼성병원 앞 정동사거리 일대 제 위치에 복원될 예정이었다. 2010년 시는 사대문 복원 사업을 추진하면서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돈의문 현판을 찾아내 원형에 가까운 복원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2015년에는 돈의문 시계의 개방감을 확보하고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서대문 고가차도를 철거했다. 하지만 1300억원이 넘는 사업비와 공사 중 교통난 등 현실적인 문제로 좌절됐다.
시는 디지털 복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2018년 새로운 '돈의문 프로젝트'를 공개하면서 정동사거리 인근에서 스마트 기기로 비추면 화면에 옛 돈의문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는 신개념 복원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지난해 8월 돈의문은 디지털 기술로 복원돼 104년 만에 시민 품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