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난성 북부에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뾰족한 첨탑을 위아래로 길게 늘여놓은 듯한 기이한 형상의 산과 바위를 품은 장가계가 있다. 영화 '아바타'의 배경이 되면서 유명세를 탄 관광지로, '지상의 무릉도원'이라고 불린다.
일본 내 인구 15만명의 작은 도시 오타루는 '겨울'하면 떠오르는 영화 '러브레터'의 촬영지로, 훗카이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꼭 들러야 할 장소로 손꼽힌다.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엔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관광지들이 한 두 곳씩 있지만 한국엔 이런 명소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 2월 LA에서 열린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4관왕을 차지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장가계, 오타루 같은 '영화 속 명소'가 생겼다.
빈부격차를 다룬 작품 '기생충'은 전원 백수이지만 가족애는 돈독한 기택네와 글로벌 IT기업의 CEO인 박 사장네 식구들이 과외를 계기로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계급갈등 문제를 그려냈다. 영화가 큰 인기를 끌면서 극중 배경이 된 종로 자하문 터널 계단과 마포 아현동 일대에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해리포터 9와 3/4 승강장 같은 '자하문 터널 계단'
지난 2일 오후 '기생충'의 배경이 된 청운동 자하문 터널 계단과 마포구 손기정로 일대를 찾았다. 종로 1가에서 1020번 버스를 타고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내린 후 약 2분(134m)을 걸으면 5층짜리 아담한 별빛고운아파트가 나온다. 아파트 앞에는 터널로 진입할 수 있는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이 굴 밖으로 나오면 자하문 터널과 함께 거대한 회색 담벼락과 길고 높은 계단을 볼 수 있다.
영화에서 기택네 식구들이 캠핑을 취소하고 돌아온 박 사장네 가족을 피해 도망 나와 달려가던 장소다. 비를 쫄딱 맞은 기택의 가족들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뛰어 내려가는 모습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이날 창의문로 인근에서 만난 윤희영(가명·32) 씨는 "반려견을 산책시키기 위해 나왔다"며 "최근에 이 동네로 오게 됐는데 부암동으로 이사 간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기생충에 나온 곳'이라면서 아는 체를 해 재밌었다"고 말했다.
윤 씨는 "동네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풍경도 좋고 주민들 인심도 좋다"며 "사람들이 키우는 개들도 다 온순하고 착하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대학생 이모(22) 씨는 "코로나19 때문에 개강이 미뤄져서 놀러나왔다"면서 "영화 속 장면이 눈앞에 그려져 신기하고 특히 자하문 터널은 해리포터에 나오는 9와 4분의 3 승강장 같이 신비롭다"며 활짝 웃었다.
이 씨는 "기생충에 나온 곳을 관광 명소로 만드는 것이 가난을 상품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관광객들은 가난을 체험하기 위해 오는 게 아니라 문화를 즐기기 위해 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동네 사랑방 아현동 '돼지쌀슈퍼'
영화 속 또 다른 촬영 장소를 방문하기 위해 종로구에서 마포구로 이동했다. 아현동에 위치한 돼지쌀슈퍼는 기생충의 이야기가 시작된 곳이다. 오래된 슈퍼 앞 파라솔 밑에서 영화 속 두 인물이 술잔을 기울인다. 이 자리에서 주인공 기우는 친구 민혁으로부터 고액 과외 아르바이트를 제안받는다.
지하철 2호선 충정로역 4번 출구로 나와 아현동 가구거리쪽으로 약 8분(503m)을 걸으면 정겨운 주황색 간판이 인상적인 '돼지쌀슈퍼'가 나타난다.
이날 가게에서 만난 돼지쌀슈퍼 주인 이정식(77) 씨는 "영화 기생충이 해외에서 상을 받고 나서부터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왔다. 아카데미상을 받은 날에는 가게 안이 방송국 사람들로 꽉 찼다"면서 "그런데 코로나바이러스가 엄청나게 퍼지고 나서부터는 요 며칠 사람이 통 없다"며 울상을 지었다.
이 씨는 "기생충을 본 사람들이 슈퍼에 와서 껌 하나, 음료수 하나 사 먹고 가고 해서 매상에 소소하게 보탬이 됐다"며 "코로나 사태 전까지는 일본분들이 제일 많이 왔었다"고 말했다.
동네주민 박모(77) 씨는 "저녁 먹고 심심해서 가게에 와봤다. 돼지쌀슈퍼는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라며 "영화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관광지가 되다시피 해서 참 좋다"며 밝게 미소 지었다.
박 씨는 "예전에는 좀 썰렁했는데 영화 때문에 젊은 사람들도 많이 오고 해서 동네에 생기가 도는 것 같다"고 말했다.
슈퍼 오른쪽에는 박 사장의 집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영화에서 기정이 복숭아를 들고 박 사장네 집으로 가는 장면이 촬영됐다.
아현동에 사는 최모(33) 씨는 "우리 동네가 관광명소가 돼서 참 자랑스럽다"며 "가난을 전시한다는 얘기도 있던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 씨는 "기생충을 본 외국인 관광객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지하철을 타는 게 가난한 사람들의 냄새를 맡기 위한 것이겠느냐"며 "문화 콘텐츠를 개발해 지역 경제를 살리는 것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기생충 속 촬영지를 배경으로 '영화 전문가와 함께하는 팸투어'를 기획, 이를 관광 코스를 개발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시는 "기생충 촬영지 탐방코스를 통해 한국 영화의 위상을 높이고 한류 도시 서울의 매력을 알리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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