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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미술정치인들의 뒤틀린 욕망

임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현직 문화예술기관장이 은밀히 타 기관 채용에 서류를 넣고 면접을 본다. 뽑아만 주면 지역에 뼈를 묻을 것처럼 말하던 그때 그 사람은 온데간데없다. 막상 자리에 앉으니 한눈부터 판다. 직업윤리나 기관에 대한 책임의식을 묻는 건 시간낭비다.

 

예술이 입신양명의 수단에 불과한 이에게 '노욕'이라는 비판과 절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인정받고 싶고 지배하고 싶은 욕망은 일평생 쌓은 존경과도 기꺼이 교환토록 만든다. 겉은 화려하나 속은 빈궁한 오늘을 냉정하게 평가할 훗날의 역사조차 두렵지 않다.

 

정치계도 그렇지만 미술계에서 또한 더 높은 자리와 권력에 대한 속물적 태도를 지닌 이들을 접하는 건 어렵지 않다. 많은 미술인들은 예술가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미술을 통한 사회적 역할과 본연의 태도를 게을리하지 않으나, 오로지 예술이 출세의 수단인 '미술정치인'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경험상 미술정치인들이 원하는 건 단 하나, 권력이다. 권력의 확보는 존재의 증명과 지위, 욕망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필요로 한다. 그들에게 존재란 권력의 배치이자, 욕망의 배정이고 미술은 그 권력과 욕망을 현실로 변환하는 데 있어 가장 효율적인 매개이다. 또한 권력의 생성은 조직체에서의 직위나 지위에서 획득되며, 질과 무관한 페이퍼상의 화려한 경력은 그 지위 및 직위를 얻기 위한 전략적 수사이면서 일종의 미백제이다.

 

이 중에서도 권력은 욕망과 관계가 깊다. 욕망은 요구된 욕구에 의해 요청되지만, 늘 결핍과 결여만을 남긴다. 플라톤의 말마따나 그것은 각자의 영혼 내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쉽게 충족되지 못하는 속성을 지닌다. 따라서 욕망 앞에 만족이란 불가능하다. 어쩌면 프로이트가 『쾌락의 원리를 넘어서』에서 주장한 것처럼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대상은 죽음 뿐"인지도 모른다.

 

물론 인간에게 욕망은 권력 의지 또는 생의 의지, 자본의지 등의 충족의지에 비례해 본능적 능동태를 유지한다. 욕망 자체는 우리 삶의 에너지이고, 활동성을 부여하는 또 다른 동력으로 기능한다. 일정한 목적을 향한 기회의 제고와 보다 확장적인 세계에 다가설 가능성까지 담보할 수 있다.

 

허나 인간은 곧잘 욕망의 동력을 변질시켜 해악한 이기조차 '선(善)'으로 합리화한다. 미술정치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과할 정도로 분출되는 욕망은 때로 '동물적 욕망'으로 퇴색되기 일쑤이다. 종종 예술의 아름다움을 휘장으로 삼는 타락한 무대의 주인공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미술정치인들이 권력이 되고픈 이유는 '통제하는 힘'과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어떤 사회관계 내부에서 저항을 무릅쓰고까지 자기의 의사를 관철하여야 하는 모든 기회와 개인 또는 집단이 다른 개인 또는 집단의 행동을 자기의 뜻대로 조정하는 방법이다.

 

작품과 재능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상욕구에다 미술계 내 존재감, 어떤 의미마저 바라는 미술정치인들에게 권력의 속성인 통제의 힘은 꽤나 매력적이다. 구조와 계급을 만들고 질서를 부여하며 자신들보다 비열등한 다수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위치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짜릿하다. 남들이 뭐라 하던 남루한 생명이 실존함을 과시할 수 있으니 그보다 고혹적인 게 없다.

 

때문에 내려놓기가 어렵다. 동종세력의 비호를 받으며 끼리끼리 철저한 공생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생명력을 이어간다. 최상위부터 하위에 이르기까지 거미줄처럼 연결된 피라미드형 권력지형도를 만든 채 학연, 지연, 계보 등을 적재적소에서 발현시키는 특유의 방식으로 권력을 가속화, 고착화한다.

 

하지만 미술정치인들은 잠시 거머쥔 권력과 뒤틀린 욕망이 야욕의 결과요, 머잖아 폐기될 것임을 알지 못한다. 라캉의 말마따나 욕망의 독(?)을 수평화 할 수 있는 재량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진 채 결국 끝없는 결여와 결핍만이 남아 자신의 목을 조른다는 사실에도 수긍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의 가치를 권력으로 살 수 있다고 착각하며 자신의 자기장 아래 예술을 둘 수 있다고 믿는다. 욕망의 본질인 소유욕의 폐단이다. 현실권력에 저항하는 미적 자장의 영향력을 모르는 무지함이다. 비울수록 풍요로워지는 삶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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