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낮은 덥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에 인파로 북적거리는 수상 버스 바포레토를 타고 10만 평 규모의 넓은 전시공간을 오가다 보면 땀이 줄줄 흐른다. 그런데도 제59회 베니스비엔날레(베네치아 비엔날레: La Biennale di Venezia: 2022.4.23~11.27)를 찾는 관람객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127년 역사를 자랑하는 베니스비엔날레는 크게 본전시와 국가관 전시로 구성된다. 옛 무기고이자 국영 조선소였던 아르세날레 지역은 주로 본전시인 주제전을 열고, 공원인 지아르디니에서는 한국을 포함한 29개의 고정 국가관 전시가 개최된다.
하지만 비엔날레가 전부는 아니다. 개최 시기에 맞춰 베니스 도시 내 곳곳에선 수십 개의 다양한 기획전과 병행전시가 다발적으로 펼쳐진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1984년에 문을 연 박물관 팔라초 시니는 독일 태생의 미국 작가 요셉 보이스를 초대했다. 194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 제작된 둔중하고 과묵한 조각과 수채화, 드로잉이 주를 이룬다. 요셉 보이스 예술의 키워드인 '사회적 조각'의 바탕이 되는 작품들이다.
인도 태생 영국 작가 아니쉬 카푸어는 주변의 모든 빛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벤타 블랙의 감각적 단순함과 물성 넘치는 붉은 안료 덩어리를 아카데미아 미술관과 만프린 팔라초 전시장에 흩뿌려놨다. 벽면을 향해 대포에서 발사된 색 덩어리는 시각적 충격을 동반한 메스꺼움을 일으킨다. 이때 관람객들은 물질과 정신이라는 상반된 해석의 영역에서 주저하는 자신을 본다.
무겁고 진지하며 고요한 히스테릭이 내재된 작품들을 옛 궁전 팔라초 그라시에 가득 내건 마를렌 뒤마의 작품전 'open-end'는 인기가 많다. 그의 작업은 생생한 현실의 이미지를 도구로 삼아 통제되고 억압된 모든 것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미학적으로 재구성된 이미지를 통해 파생되는 수천의 의미가 습관적 타자성을 흡수한다는 게 특징이다. 때문에 뒤마의 작품 앞에 서면 보편적 인간의 고통과 비극, 말살된 인간성과 정체성에 대한 집요한 자문에 처한다. 당장 정답을 구할 순 없어도 질문의 여진은 오래간다.
베니스를 무대로 한 미술의 향연은 이 밖에도 더 있다. 에로틱과 환상적 아이러니가 불편하게 중첩된 작품을 선보인 작가 라킵 쇼를 비롯해 사회에 대한 사적 서사를 커다란 컬러 평면 추상과 하드 엣지에 새긴 마리 웨더포드, 자연의 개입에 따른 작품의 변화와 불완전함의 순응을 삶의 존재성에 연결해온 보스코 소디, 예술가들의 예술가로 유명한 사진 작가 사빈 바이스 등이 그 잔치의 주인공이다.
베니스비엔날레 병행전시로 진행 중인 안토니 곰리와 루치오 폰타나 2인전도 화제다. 팔라초 두칼레에 열댓 점의 초대형 작품을 출품한 안젤름 키퍼와 페기 구겐하임의 '초현실주의와 마술' 특별전 역시 볼 만한 팝업 행사로 꼽힌다. 미국의 여류 조각가 루이스 니벨슨, 우고 론디노네, 브루스 나우만, 얀보의 작품전도 베니스에 왔다면 놓쳐선 안 될 전시다.
특히 '여기는 우크라이나: 자유를 수호하다'(This is Ukraine: Defending Freedom)도 관람 동선에서 제외할 수 없다. 참여 작가 중 한 명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진실과 자유가 러시아의 공격을 받고 있다"며 "이는 전 인류에 대한 범죄이기에 우리 모두 맞서야 한다"고 했다. 그만큼 이번 전시엔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예술가들의 명료한 메시지가 배어 있다. 우크라이나 작가들과 울라퍼 엘리아손, 무라카미 다카시, 데미안 허스트 등의 예술가들이 함께 꾸렸다. 14세기 초 지어진 옛 건물인 스쿠올라 그란데 델라 미세리코디아에서 8월까지 이어진다.
베니스비엔날레가 특정 주제 아래 각각의 예술적 발언을 연결하는 구조라면, 동기간 내 베니스 개별 공간에서 펼쳐지는 기획전들은 미적 다양성을 얼개로 한다. 그리고 베니스는 그러한 다양성을 실현할 수 있는 여력과 여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모두 문화예술이 지닌 유·무형적 가치에 관한 행정당국의 적극적 소통과 시민들의 동의가 전제된 결과다.
이는 30여 년이 다 되어감에도 여전히 자신의 지역에서 뭐가 열리는지도 모르는 시민이 수두룩한 한국의 비엔날레들과는 다른 양상이다. 2년마다 수백억 원의 혈세가 투입되지만, 비엔날레가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 자문하지 않은 채 공직자들의 성과주의와 무기력한 이들의 아마추어리즘에 비엔날레가 관치화, 도구화되는 우리의 현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요소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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