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거의 모든 예술 지원 기관은 '전문 평가위원'이란 제도를 두고 있다. 전시나 공연 등이 열리면 전문가들이 관람한 후 평가하는 일이다. 세금이 투입된 사업 운영의 적절성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주로 현장 평가를 통한 소통 활성화, 의견 환류에 따른 예술계 내 건강한 토양 마련 차원에서 시행한다.
최근 모 지역 공공기관으로부터 '문화예술지원사업 전문 평가위원'으로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동안 종종 해왔던 것이었기에 이번에도 흔쾌히 수락했다. 전시 관람을 핑계 삼아 평소 방문하기 힘들었던 전시 공간을 둘러볼 수 있고, 지역 미술계의 현장 흐름과 작가들의 현주소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자발적 '사퇴'로 끝났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건당 20만원으로 책정된 평가 사례비가 지나치게 초현실적이었다. 노동이 발생하면 당연히 그것에 따른 합당한 보상이 이뤄져야 하는데 어떤 근거로 책정했는지 알 수 없는 20만원은 그야말로 터무니없었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 전시 하나를 보려면 수십~수백 킬로미터를 왕복해야만 한다. 하루라는 시간이 꼬박 투자된다. 여기에 현장사진을 찍고 필요하면 인터뷰도 거쳐야 하며 A4 두 장짜리 보고서까지 작성해 제출하는 과정도 있다. 더구나 그 20만원에는 실질경비인 톨게이트비와 주유비 등도 포함돼 있다. 심지어 8.8% 세금도 뗀다. 그러니 일은 일대로 하고 가계경제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의 착취수준인 보상도 문제지만 사퇴를 결정하게 된 결정적 원인은 기관 관계자의 태도에 있었다. 내 판단에 평가위원이라는 미명하에 기관은 사실상 '재능기부'를 해달라고 한 것과 진배없었다. 그런데도 태도는 당당했다. 간담회란 명목으로 위촉한 전문 평가위원들을 모아 놓곤 1시간 가까이 평가제도에 대해 길게 설명하면서도 정작 보상에 관한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다. 책임은 강조하는 반면 권리에는 침묵했다.
이에 간담회가 끝날 무렵 평가료는 얼마냐고 질문했고 그때서야 20만원이라는 얘길 들었다. 나는 당장 개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지적에는 공감하지만 예술가들을 지원하느라 예산이 없다느니 '내부규정'이 어떻다느니 하더니, 결국 기관의 한 책임 관계자는 20만원의 보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퇴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발언을 내뱉었다.
보상을 비중 있게 볼 것인지 평가위원으로서의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유무형의 가치에 무게를 둘 것인지는 내 몫이다. 말도 안 되는 보상 체계를 인지하고 있으나 당장 개선할 수 없는 환경이라면 기관 관계자는 후자를 선택하게끔 유도하는 것이 현명한 자세다.
적어도 평가자의 시간과 경비를 줄여주려는 노력이라도 보였어야 옳다. 전문가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역할을 소중히 여긴다면 그게 맞다. 그동안 여타 기관에서의 유사한 활동에서도 보상 부분은 그리 흡족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간간이 참여했던 건 내가 하는 일이 비록 돈벌이는 안 될지언정 기여의 흡족함과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관 관계자는 되레 평가위원이 무슨 권력이라도 되는 냥 안 하면 네 손해라는 식의 무례한 사고를 내비쳤고, 행정의 원활함을 위한 소모품이라는 인상마저 심어줬다. 이에 작가들의 작품과 전시를 두고 대화하는 것이 '동행'의 연장일 뿐, 그 어떤 권위 혹은 권력이라 여기지 않는 나는 바로 그만두기로 했다. 한편으론 기성세대로서 후배들의 열악한 대우와 권리 보장을 회피할 수 있는 하나의 사례나 기준이 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하지만 나 하나 그만둔다고 변질된 기부개념이 작동하는 우리 예술계의 악습이 달라질 것 같진 않다. A4 1장당 1만3000원에 불과한 평론비처럼 예술 매개자들의 열악한 현실이 개선될 여지도 별로 없어 보인다. 부당함에 관해 우리가 한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그들은 모든 문제에서 도피할 수 있는 만능키격인 '내부규정' 타령을 끝없이 해댈 것이고, 비현실적인 대우에 관한 자각도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이미 나의 1시간을 앗아간 간담회 참석에 대한 보상에 대해서도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 과연 이 부분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궁금하다. 너희의 행정업무가 중요한 만큼 우리의 시간도 귀중하다. 지켜볼 일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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