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창에서 내다보는 공포의 풍경
[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18> 헤르타 뮐러의 '마음짐승'(1994년)
-슬픈 창에서 내다보는 공포의 풍경
200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헤르타 뮐러(1953~)의 '마음 짐승'은 작가의 개인사가 녹아 들어간 자전적 소설로 독재자 니콜라예 차우셰스쿠 지배 시기 세상을 떠난 작가의 두 친구를 기린 작품이다. 뮐러는 차우셰스쿠의 24년 철권통치가 막내리기 2년 전인 1987년 독일로 망명했다.
◆차우셰스쿠 독재시기 개인적 비망록
뮐러는 독일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루마니아 사람이다. 프란츠 카프카가 독일어를 쓰는 체코인이었던 것과 비슷하다. 거대한 세력들이 각축한 중부 유럽에서 민족적 정체성과 국적의 불일치는 흔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루마니아는 로마에서 떠나온 로마 둔전병의 후예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적잖은 세월이 흐른 데다 그곳이 민족 교류가 활발한 곳이어서 '로마의 후예'라는 말이 실질적 의미를 지니지는 않겠지만 따지고 들면 루마니아인은 원천적으로 고향을 떠난 사람인 셈이다.
뮐러의 가계는 조금 더 복잡해진다. 루마니아라는 근대국가에서 독일어를 쓰는 루마니아의 소수민족에 속한다. 그렇다고 뮐러를 독일인으로 볼 수는 없다. 자전 소설 '마음짐승'이 드러내듯 그는 루마니아인의 정체성을 갖는다. 물론 히틀러가 발호할 때 뮐러의 아버지가 나치에 부역한 데는 아무래도 소위 민족이라는 게 영향을 미치긴 했겠지만 그때는 민족과 국가의 개념이 혼란에 빠진 격동의 시기였다. 아버지가 독일어권에 속하는 아리안족의 이등 국민으로서 나치 행세한 것은 어머니가 (루마니아인이 아닌)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옛 소련의 강제노역에 끌려가 희생한 것과 충분히 상쇄된다. 뮐러의 가계와 자신의 삶에 현대사의 비극이 이렇게 고스란히 투영됐다. 전체주의를 비판한 이 책을 읽을 땐 그러한 시대 배경을 참작해야 한다.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방식에서 이 책은 일인칭 시점을 취했다. '1984'와 다르다. '마음짐승'은 철저하게 역사적 관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에 휘말린 인물이 당대를 대표해서 관찰하고 기록한 결과이다. 역사성이 있지만, 개인성도 강하게 드러난다. 이 소설이 가진 강점이자 한계이다. 전체주의의 폐해를 확고하게 지적한 '1984'가 오세아니라는 가상의 국가를 배경으로 보편적 역사성의 시야를 표명한 것과는 비판 방식에서 온도 차이 같은 게 느껴진다. '마음짐승'은 20세기 특정 시기 루마니아의 특정 인물들이 겪은 이야기이다.
'마음짐승'이 표현한 전체주의 폭압은, 예민한 청년들을 자살로 내모는 등 공포스러운 것이지만, 실제로 차우셰스쿠 정권에서 전체주의 국가기구를 통해 자행된 폭력은 소설보다 훨씬 잔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주의는 체계적이고 만연한 공포 시스템을 통해서 사회를 작동하지만, 그 공포 시스템에는 항상 구체적인 폭력의 본보기가 제시돼야 한다. 폭력의 본보기가 일상적으로 구축되어야 하고 이것에 근거한 공포와 복속의 시스템이 가동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그랬고 루마니아도 그랬을 터이다.
'마음짐승'은 당시 서독으로 망명한 뮐러처럼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의 기록이 주가 되기에 전체주의의 폭력성이 낮은 수위로 묘사된다. 현실은 낮은 수위와 높은 수위의 억압이 공존하는 것일 텐데, 작가는 저지대의 풍경을 통해 그 뒤의 비극적 풍경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파시즘과 같은 독재체제가 국가를 운영할 때는 이데올로기적인 국가기구와 폭력적인 국가기구를 같이 작동하는데 두 기구는 나날이 거대 체계로 발전한다. 체제가 개인들을 통제하는 구조에서 국가기구들을 최고 압력으로 올리면 개인은 압착돼 소멸한다. 전체가 하나가 되고 하나가 전체가 되는 게 전체주의에서 흔히 표방하는 구호이다. 다만 '마음짐승'은 개인이 전체에 맞서 아직은 개인을 주장할 수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어 당시 루마니아의 전체주의가 어쩌면 정점에는 도달하지 않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리바이어던이 아닌 마음 속의 짐승
제목에서도 이런 생각이 든다. '마음짐승'에 해당하는 독일어 '헤르츠티어(Herztier)'는 마음(Herz)과 동물(Tier)을 합성했다. 전체주의와 관련해 가장 고전적인 동물은 성서에 연원이 있는 리바이어던이다. 리바이어던은 외부에 실재하는 거대 짐승이다. 제목의 'Herztier'는 심지어 전체주의에 복무한 소설 속 경감에게도 존재한다. '마음'은 개인의 영역인만큼 'Herztier' 또한 모든 개인이 다 갖는다. 작가는 리바이어던을 지목하지 않고 개인 영역의 'Herztier'를 다루는 형상화 전략을 선택했다. 그러다 보니 사회를 전체적이고 전면적으로 지배해서 개인들이 전혀 숨을 쉬지 못하는 공포스러운 전체주의 상황보다는, 오히려 혼란과 불안 속에 빠진 현대인의 실존적 모습과 흡사하다.
작가의 강점은 응축된 시정과 산문의 진솔함이다. 시의 기본은 비유이다. 시라는 건 디테일을 무시함으로써 디테일을 강하게 만드는가 하면 디테일을 강화함으로써 추상을 강화하기도 한다. 이런 두 경향을 결합해, 뚜렷한 스토리라인 곳곳에다 심리적인 묘사나 의식의 흐름을 적절하게 배치한다.
낮은 수위로 포착한 전체주의가 분위기로는, 이런 효과 때문에 더 공포스럽게 드러날 수 있다. 드러난 사실보다 풍기는 이미지가 훨씬 더 무시무시하다. 괴물과 싸우는데, 괴물이 끝까지 안 보이고 주변에 안개가 쌓여 있는 영화 '미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괴물 자체가 무섭지만 괴물의 정체를 몰라서 사람들은 점점 더 미쳐간다. 뮐러가 이 소설에서 전체주의의 공포를 그리는 방식은 '미스트'가 공포를 그리는 방식과 비슷하다. 공포의 시적 전개이다. 공포의 산문적 전개와 분명 다르다.
내용상으로는 전통적인 소설에 가깝다. '나'랑 같이 기숙사 생활을 하던 롤라가 무슨 사건에 휘말려서 자살한다. 자살할 때 '나'의 허리띠를 이용함으로써 롤라와 주인공 간의 연결고리가 생긴다. 이어 친구들이 나오고 그걸 계기로 전체주의와 대립 전선이 생기고, 친구들과 자기가 해고당하고, 누구는 거기서 죽고 누구는 떠나서 죽고, 그다음에 살아남은 자들이 얘기하는 구성이다.
이야기가 단순하기에 작가는 시공간의 전통적인 배열을 의미 단위별로 쪼갠다. 쪼개서 섞어버린다. 중요한 것은 섞는 기술이다. 중간에 이미 결론이 나와 있지만 어색하지 않다. 이 책은 전통적인 수미쌍관 구조로 앞과 끝이 연결된다. 흐름의 연결이 어색하면서도 자연스럽다. 작가가 하려는 말은 소설의 첫 문장 "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진다"에 함축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제안이 유효하지 않은 게,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무지 침묵할 수 없는 상황에 소설의 인물들이 놓여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자랑스럽지 않다.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어느 정도 사악함을 갖게 되기에.
◆작가의 고통을 외면할 우회로가 없다
이 소설을 두고 여백이 많다고들 한다. 내가 판단하기에 오히려 꽉 차 있기에 그런 느낌이 들지 싶다. '마음짐승'을 산문으로만 보면 여백이 많다. 산문의 측면에서 여백이 있게 끌고 나가면서 산문 곳곳에 시적인 서정을 꽉꽉 채워놨다. 따라서 여백이 많은 것 같으면서 동시에 꽉 차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소설이 어렵게 받아들여지고 전개의 미적거림이란 착시가 생긴다. 산문으로만 보면 시작과 끝이 너무 간명하다. 시적 할큄으로 꾸역꾸역 산문에 생채기를 내어놓았기에 독자는 텍스트를 뚫고 나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작가의 고통을 독자가 외면할만한 우회로가 없다.
그렇게 결국 'Herztier'라는 것이 결국 뭐냐는 문제에 도달하면서 그게 누구나 가진 것으로 정의된다. 사회에 존재하는,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거악은 아니고, 누구나 마음 속에 가진 짐승인데, 그 짐승은 사회적으로 연대해서 공포 이외의 것을 만들기도 하기에 짐승의 야수성을 잘 극복하는 한 어쩌면 인간다움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끝까지 인간의 존엄한 생존을 기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루마니아의 그 시기엔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다.
철학적으로는 상당히 복고적인 성향이다. 현대 소설이지만 여전히 20세기 초중반의 틀에서 인간을 파악한다는 한계가 지적될 법하다. 특정 역사의 특정 개인의 삶에 집착하였기에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탁월한 소설인 이유는 철저하게 1인칭 시점에 입각해서 작가 자신이 던져진 역사적 국면에서 그 시공의 비극과 공포를 자신이 가진 산문적이고 운문적인 작가의 모든 역량을 투입해서 돌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역사소설이 아니라서 '1984'와 다른 전체주의를 다루는 방식의 독특한 성취를 해내었다. 내재적이고 동시에 초월적이란 뜻을 갖는 수학용어 '초한적'이란 표현을 쓰는데, 종교학이나 신학에서도 사용할 법한 이 어휘는 "초한적이라는 건 사라지지 않는 창문이야" 같은 예문에서 활용된다. 소설에서 친구는 이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누군가 뛰어내려서 그 너머로 가버리는 창으로 '초한적'이 구체화한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이 소설은 그러한 특정한 창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본다. 특정한 창이 가진 명확한 전망이 소설에는 있다.
특정한 창이 가진 한계 또한 있다. 조감을 못 한다. 그러니 조감도를 못 그린다. 특정한 창을 통해서 세상을 보면 원근법과 초점이 분명해진다. 어느 창을 보느냐에 따라서 풍경이 달라진다. 어떤 곳에 있는 창에서 어떤 각도로 내려다보느냐 이런 것들이 그 창에서 보이는 풍경의 품질을 좌우한다. 이 소설은 뮐러라는 작가의 '초한적' 창이다. /안치용·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ESG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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