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가 청와대를 전시 중심의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방안을 최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발표했다. 일명 '청와대 미술관'으로, 태양왕 루이 14세의 권력과 재력을 내외에 과시했던 바로크 양식의 대궁전인 프랑스 베르사유처럼 건축물 원형을 보존하면서 품격 있는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게 요지다.
문체부에 따르면 청와대 본관 1층 로비와 세종실 등의 일부 공간은 미술품 상설 전시장으로 운영한다. 관저 내 거실과 별채에도 미술품이 설치된다. 영빈관 역시 특별 기획전시장으로 탈바꿈한다. 이곳에선 청와대 소장품을 비롯해 이건희 컬렉션, 국내외 유명 작가 작품전이 유치된다.
녹지원에는 야외 조각공원이 들어선다. 개방 1주년 등 필요시마다 특별 전시와 종합 공연예술 등이 무대에 오른다. 시민소통공간인 춘추관 2층 브리핑실 또한 민간에 대관하는 특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다. 첫 전시로 8~9월 장애인문화예술축제를 추진한다.
문체부의 청와대 활용방안에 미술계를 중심으로 한 문화예술계단체들은 환영하는 분위기다. 한국미술협회를 비롯한 54개 단체는 정부의 방침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25일 발표했다. 이들은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의 결단을 적극 지지·지원하며 협조를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졸속 추진에다 전시 콘텐츠 계획조차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600여 점의 소장품과 이건희 컬렉션 등을 활용한다는 방침이지만 장기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에 대해선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 인력을 포함한 예산 등의 디테일한 부분 또한 아직 밝혀진 게 없다. 단지 베르사유 궁전을 모델로 한다는 게 전부다.
문제는 국민적 합의가 없었다는 점이다. 필자 역시 청와대 미술관 조성에 앞서 제대로 된 공청회 한번 열었다는 얘긴 들은 바 없다. 국가공무원노동조합 문화재청 지부가 25일 비판 논평을 낸 것을 보면 하다못해 가장 가까이 있는 기관과도 불통이었던 모양이다.
청와대는 나라의 유산이자 국민이 주인이다. 그런데 그런 청와대 용도를 정부는 여론 수렴 한번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사회적 합의가 빠졌다. 이는 민주주의적 태도가 아니다. 여론 수렴 누락, 소통 배제 등은 제왕적 국가의 특징이다. 일단 발표하고 난 뒤 여론을 살핀다. 문체부가 지난 21일 활용 방안을 보고한 가운데 대통령실이 뒤늦게 자문단을 구성하고 청와대를 관리할 로드맵 발표를 예고한 것이 그 사례다.
일각에선 18세기 후반 프랑스 왕정 시대의 면면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베르사유에 빗대는 것만으로도 왕권으로의 퇴행이라 꼬집는다. 필자의 판단엔 베르사유 운운하며 선진국 보증서라도 내놔야 품격 있다 여기는 정부의 인식부터가 전근대적이다. 더구나 5년 후엔 청와대가 본래의 공간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있다. 그럼 그때 가서 또 막대한 혈세를 들여 뜯어고칠 것인가.
문화예술단체들의 입장에도 온전한 동의는 어렵다. 환영을 밝히는 성명 서두엔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에 대해 제왕적 대통령제의 종식, 민주화의 완성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왕권신수설에 바탕을 둔 군주제를 파하고 근대적인 '민주혁명'을 완성했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서술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이 민주혁명의 완성이라는 주장에 대해 문화예술계 구성원 모두가 동의할지 의문이다. 막대한 세금이 투입된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국민도 많다.
청와대 인근엔 이미 적지 않은 갤러리와 미술관·박물관이 있다. 굳이 청와대 미술관이 아니어도 문화예술단체가 언급한 문화예술 클러스터는 충족된다. 머잖아 '이건희 기증관'도 근처에 세워질 예정이다. 그럼에도 왜 또 하나의 거대한 미술 공간을 조성하겠다는 것인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특히 현재의 정부 구상대로라면 장소만 예전 청와대였다는 것일 뿐 변별력조차 희미하다. 어째서 청와대가 미술전시장이 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마저 약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보다 멀리 내다보는 관점과 고민을 바탕으로 한 청와대 활용 방안을 강구하는 게 마땅하다. 앤디 워홀 작품 한 점 구입하려면 수십~수백 년간 돈을 모아야 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초라한 소장품 예산이나 올려주고 새로운 미술관 조성 운운하는 게 순서다. 미술 공간 하나 더 생긴다고 마냥 좋아할 것이 아니라 있는 것부터 잘 운영하자는 것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전시기획자)
Copyright ⓒ Metro. All rights reserved. (주)메트로미디어의 모든 기사 또는 컨텐츠에 대한 무단 전재ㆍ복사ㆍ배포를 금합니다.
주식회사 메트로미디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17길 18 ㅣ Tel : 02. 721. 9800 / Fax : 02. 730. 2882
문의메일 : webmaster@metroseoul.co.kr ㅣ 대표이사 · 발행인 · 편집인 : 이장규 ㅣ 신문사업 등록번호 : 서울, 가00206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2546 ㅣ 등록일 : 2013년 3월 20일 ㅣ 제호 : 메트로신문
사업자등록번호 : 242-88-00131 ISSN : 2635-9219 ㅣ 청소년 보호책임자 및 고충처리인 : 안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