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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오염된 욕망과 뒤틀린 현실

그리 오래라고 보기 힘든 예전만 해도 우리 미술계는 미술의 존재 이유와 존재 방식에 대해 탐구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시대정신을 논하며 미술의 역할을 진지하게 성찰했고, 영악한 자본주의에 투항하는 대신 공적 담론 형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예술을 하는 이들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비록 가난하게 살지만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는 것도 그것 때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까마득한 옛일처럼 아득해졌다. 지금도 과연 동일한 판단이 가능할까 의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들부터 예전과 오늘의 가치관이 다르다. 그토록 멀리하려 했던 상업성은 지상 목표가 된 지 오래다, 잘 팔리는 작가가 좋은 작가이고, 인기 작가는 성공한 작가로 치부된다. 일부는 예술의 자율성을 포기한 채 시장이 요구하는 스타일을 재빨리 제공함으로써 부와 명예를 손쉽게 거머쥐려 애쓴다.

 

현상의 맥을 짚고 잘못된 방향을 지적할 미술평론가들은 세월의 무게만큼 무기력해졌다. 책임의 방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의 책무란 현장에서 일궈진 미술의 가치를 폭넓은 문화가치로 확장시켜 구성원에게 공급하고 대중의 문화향유와 욕구를 다시 미술현장으로 이끄는 것에 있지만 현실은 보신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불평등과 기회 상실에 대한 절망감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을 보듬지 못하며 각종 당대 현안에도 유구무언이다. 물론 안 그런 이들도 있다. 하지만 소수를 제외하곤 비평의 직능 중 하나인 사회, 제도 등에 관한 조타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저널이 제 소임을 다하는 것도 아니다. 현장 및 제도를 감시, 비판해야 할 저널 또한 작금의 민생고 앞에선 나약하기만 하다. 그들에게 놓인 상황이란 당장의 생존이다. 그러다 보니 일부는 미술 권력의 나팔수 노릇에 충실하고, 천박한 자본에 길들여져 언론으로서의 존재성과 당위성마저 의심스럽게 한다.

 

시대사상을 조형적 문맥으로 끊임없이 재생산해야 할 공공 미술관도 제 기능을 못하긴 매한가지다. 그들은 대체로 낡은 언어로 동시대성을 말한다. 세상이 아무리 엉망으로 돌아가도 강력한 정치적?문화적 연대투쟁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내지 않는다.

 

이런 실정은 관장이 바뀌어도 놀랍도록 똑같다. 그가 과거에 어떤 흔적을 남겼든 상관없다. 이들은 상업적인 작가의 몸값 높이기에 일조하거나 정치권력에 줄 서려 애쓴다. 자신의 이력과 얼굴에 먹칠하는 일도 잦다. 국립현대미술관도, 서울시립미술관도 한 나라의 총체적 미술역량을 가늠하는 척도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비엔날레는 어떤가. 20개가 넘는 비엔날레가 존치되고 있지만 대부분 의무 방어전을 치르는 수준이다. 전위적이며 도발적인 태도로 자본주의를 비롯한 동시대 인류 앞에 놓인 모든 문제를 도려낼 수 있는 날카로운 칼날이 돼야 함에도 한국의 비엔날레들은 개념과 형식, 내용 모두 구태의연하다.(주제 역시 걸핏하면 책에서 차용한다. 온전히 자신의 머리에서 나오는 게 드물다.)

 

심지어 몇몇 비엔날레는 시장에서 할 수 없는 것을 하기보단 시장의 부속처럼 기능한다. 지방의 미술축제로 변질된 지도 한참이다. 지역 미술인을 다독인답시고 마음에도 없는 특별전 따위에 혈세를 떼어 주는 것도 모자라 본질과 무관한 아트페어까지 개최한다. 그러다 보니 미술계는 물론 대중도 무관심하다. 이는 고작 대형 외국 프랜차이즈 아트페어 하나가 열렸을 뿐임에도 화제성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던 부산비엔날레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처럼 미술계는 전반에 걸쳐 뭔가 기우뚱한 상태에 있다. 이젠 어떤 기관과 행사, 인사도 작금의 미술계가 안고 있는 첨예한 사안부터 대중사회가 필요로 하는 미술의 파생적 가치에 이르는 다양한 논의를 촉발시키지 못한다. 분명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하긴 하는데 공적 의미를 지닌 행보와는 거리가 있다.

 

만약 우리에게 아직 건강한 의식이 남아 있다면 세상 흐름이 어떻든 미술 본연의 가치를 말하고 부조리하며 불편한 현상을 예리하게 파헤쳐 공론화해야 한다. 그림과 글과 말과 행동으로 미래지향적인 화두를 제시하는 진보적·혁신적인 나침반을 자처해야만 한다. 이왕이면 혼자보단 더불어가 낫다. 그래야 오염된 욕망에 뒤틀린 현실을 하루라도 빨리 바로 잡을 수 있다.■ 홍경한(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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