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란 제목의 책은 프레임의 힘을 설명하고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오히려 몸집이 크고 코가 길며 귀를 펄럭이는 코끼리 이미지를 떠올린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프레임을 부정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프레임이 강화되는 이치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14일 KB금융 등 8대 금융지주 이사회 의장들과 간담회를 갖고 "최고경영자(CEO) 선임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이 원장은 금융위원회가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에게 라임펀드 사태와 관련해 향후 3년간 금융회사 취업이 제한되는 중징계를 내린 다음 날인 지난 10일에는 기자들과 만나 "(손 회장이)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이라 생각한다"는 발언을 했다.
금융당국이 금융권 인사에 대해 개입할 생각이 없다고 밝히면서도 '반항하지 마라'는 경고 메시지를 던지는 알쏭달쏭한 현상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금융당국의 인사 불개입 선언을 믿을 만한 순진한 금융인은 없을 것이다. 우선 금감원장이 금융지주 이사회 의장들을 모아서 만난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다. 무엇보다 이번 간담회의 시점도 논란거리다. 이미 물러났거나 내년 3월 임기가 종료되는 금융지주 CEO만 4명이나 된다. 손병환 NH금융지주 회장의 임기가 다음달 끝나고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과 조용병 신한금융회장 임기가 내년 3월 만료된다. 내년 3월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던 김지완 BNK금융지주 회장은 지난 7일 조기 사임했다. 은행장 중에서도 진옥동 신한은행장과 권준학 NH농협은행장의 임기가 다음달 끝나고 윤종원 IBK기업은행장 임기도 내년 1월 종료된다.
금융권에서는 손태승 회장 중징계와 김지완 회장의 중도 퇴진을 '정치 금융'의 서막으로 보고 있다. 내년 3월까지인 임기 후 연임을 염두에 두고 있던 손 회장에게 문책경고라는 중징계는 그야말로 치명상이다. 여기에 징계와 관련해 법원에 소송이나 가처분 청구를 하지 말라는 '경고장'도 받았으니 손 회장 입장에서는 옴짝달싹도 못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억울하기는 김지완 BNK금융지주 회장도 마찬가지다. 2017년 9월 27일 취임한 김 회장은 그 해 4분기 당기순익 4031억원, 총자산 107조4000억원, ROE(자기자본이익률) 5.77%던 경영지표를 2022년 3분기 당기순익 7632억원, 총자산 160조, ROE 10.69%로 끌어올리는 탁월한 경영 실적을 거두었다. 경영 성과나 남은 임기 5개월을 보면 김 회장이 명예롭게 임기를 마치도록 배려하는게 당연하다. 그러나 회장 자리를 노리는 인물들이 정치권과 야합해 '자녀 특혜 의혹'을 문제 삼아 김 회장을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정치권과 금융당국은 김 회장 퇴진 압박과 병행해 내부 인사가 CEO를 승계하도록 한 '최고경영자 경영 승계 규정'도 바꾸도록 해 외부 인사도 CEO가 될 수 있는 길까지 만들었다. 벌써부터 부산 출신 관료나 윤석열 대통령 캠프에 있었던 금융인 출신이 회장으로 온다는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금융공기업이나 국책은행 CEO들의 인사 면면과 금융지주사 차기 CEO들에 대한 이런저런 하마평이 들리면서 금융권은 정권 교체를 실감하고 있다. 지금까지 인사 흐름을 보면 '관치 금융'에서 '정치 금융'으로 무게 중심이 넘어오면서 금융 CEO 자리가 대선 전리품으로 전락하는 분위기다. 이왕 사태가 여기까지 왔으니 한마디만 당부한다. 전문가가 존경받는 금융권 풍토 좀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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