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人 머니 산업 IT·과학 정치&정책 생활경제 사회 에듀&JOB 기획연재 오피니언 라이프 AI영상 플러스
글로벌 메트로신문
로그인
회원가입

    머니

  • 증권
  • 은행
  • 보험
  • 카드
  • 부동산
  • 경제일반

    산업

  • 재계
  • 자동차
  • 전기전자
  • 물류항공
  • 산업일반

    IT·과학

  • 인터넷
  • 게임
  • 방송통신
  • IT·과학일반

    사회

  • 지방행정
  • 국제
  • 사회일반

    플러스

  • 한줄뉴스
  • 포토
  • 영상
  • 운세/사주
오피니언>칼럼

[홍경한의 시시일각] 한국 전위예술의 선구자 김구림

1950년대 중반을 여명기로 하는 한국현대미술은 헤게모니와 이분법의 역사다. 미학적 차원이 아닌 양식적 측면에서 전개된 서구 추상을 한국적 추상으로 둔갑시킨 60년대 앵포르멜이 그렇고 일부 일본인들의 관심에서 비롯된 기묘한 집단현상인 70년대 단색화도 그렇다. 결국 제도권에 편입된 채 또 하나의 권력이 된 80년대 민중미술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한국현대미술사는 소위 주류를 중심으로 한 권력과 위계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양성에 관한 인정이 야박한 현실과 예술 식민주의 구조에 의해 '주변'으로 낙인됐을지언정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하며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개척한 이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작가 김구림(1936~ )이 있다.

 

집단화에 의한 서술에서 소외되고 기득권에 밀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해왔을 뿐 김구림은 한국현대미술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문화예술 특권층의 헤게모니에 저항하며 한국미술의 진정성이 서구와 대비해 무엇이 같고, 서구미술의 무엇을 빌려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이끈 동인이었다. 우리 미술계의 이면에서 미학적 가능성과 조형적 풍성함을 제시해온 장본인이다.

 

김구림의 작품은 동일한 시기를 공유하는 작가들과는 사뭇 달랐다. 일찌감치 형식주의에서 벗어나 있었고, 소재나 매체 측면에서도 인위적 혹은 작위적이지 않았다. 그의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즉흥성, 우연성, 물성을 통한 탈물성화라는 역발상, 해체의 지향은 문화적·경제적 특권을 누리던 작가들과의 차이를 명료하게 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50년대 초반부터 김구림의 작품들은 일본화된 서구풍의 구상성에서 이탈하고 있다. 60년대엔 실험미술계열의 행위 미술을 주도하며 한국 아방가르드의 선구자적 면모를 내보였다. 일본과 미국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되는 70~80년대엔 오브제를 중심으로 한 평면, 설치, 입체, 영상 등의 다양한 개념작업을 펼쳤다.

 

이 중 김구림의 해체적 성향은 '음양'을 토대로 주류 밖에서 지속적으로 진행됐다. 일례로 1950년대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회화 'Moon Night'(1958)이 비교적 회화성에 안주하며 '음양'에 대한 기초를 담았다면, 나무 패널에 유화물감으로 비정형적 이미지를 거칠게 옮긴 (행위의 흔적이 뚜렷한) 1960년대 'Untitled' 연작은 탈고정성을 드러내 온 김구림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아쉬움이 없다.

 

이밖에도 나무 패널에 신문지를 오브제로 덧대어 일정한 도식을 첨가한 작품 'Work 8-63'(1963)은 플라스틱과 비닐을 조합해 미적 대상의 규칙성에 균열을 가한 'Space Construction A-B'(1968)와 함께 동일성의 논리를 부정함으로써 의미화의 과정 자체를 해체하는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현상에서 흔적으로'(1969) 시리즈는 작가 특유의 전위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설치작업으로 꼽힌다. 한국 최초의 대지 미술로 거론되는 '현상에서 흔적으로-김구림의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1970) 등의 작업은 캔버스라는 물질성의 배격이자 예술에 대한 새로운 관점 및 사고를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시도로 인정받고 있다.

 

이렇듯 김구림은 한국 실험영화사의 중요한 작품인 '1/24초의 의미'(1969) 외에도 '태양의 죽음', '매스미디어의 유물', '걸레' 등 시대변화에 발맞춘 실험적이고 기념비적인 작업을 남겼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단체인 '제4집단'을 만들어 사회 전반의 영역과 통합돼야 할 예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기도 했다.

 

김구림의 행보는 실력보단 학연에 얽매인 채 관념적, 현학적, 위선적 예술에 함몰된 화단과 확연히 구분된다. 판화에서부터 사진, 설치, 비디오, 대지미술, 퍼포먼스, 무용, 무대미술, 의상, 도자, 메일 아트, 연출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저돌적인 양태는 자칫 안일함에 빠질 수 있었던 한국 미술계에 신선한 자극이 됐으며, 그의 삶은 같은 작업을 무한 반복하고 있는 매너리즘 작가들과는 결이 다른 것이었다.(시장에서 주목 좀 받는다고 동일한 작업을 재탕, 삼탕하고 있는 작가들을 보라. 취향 집단의 간택이 그리 신 나는 일일까.)

 

근대적 사유방식의 대전제를 흔드는 김구림의 미적 태도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시대가 변하면 사고가 변하고, 사고가 변하면 작품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그의 예술관도 유효하다. 다만 주류가 만든 인식과 제도는 오랜 시간 그를 외면했고 기존 틀에서 벗어나 행동하는 그를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거의 90평생을 그렇게 대우했다.(그래서 선구자는 항상 외롭다.)

 

늦은감이 없진 않으나 김구림의 개인전이 내년 8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최된다. 2013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의 개인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후 10년 만이다. 허세와 욕망으로 가득한 부르주아적 예술이 활개치는 당대, 이제라도 한국 미술의 새로운 비전을 열고 예술의 시대적 소명을 저버린 적 없는 작가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전시다.■ 홍경한(미술평론가)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Copyright ⓒ 메트로신문 & metr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