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는 1882년부터 1967년까지 살았던 미국의 리얼리즘 작가이다. 황량한 도시 또는 시골 환경에서 외로운 인물을 묘사한 그의 그림들은 시대를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고요한 절망과 소외, 나른한 권태를 보여준다. 바쁜 도시인들의 심리적 그늘과 공허함이 '정지된 시간'에 담겼다.
호퍼의 국내 첫 개인전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오는 8월 20일까지 개최된다. 그와 관련된 기록 4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미국 휘트니미술관과 공동 기획했다.
작품들은 20세기 초 미국의 생활 풍경 화가들의 모임인 애시캔파(派: Ashcan School)의 일원이면서 호퍼의 스승이었던 로버트 헨리의 영향을 받은 인상파 경향의 그림에서부터, 신비적 이상주의자 겸 사상가인 랄프 왈도 에머슨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수채화, 드로잉 등을 아우른다. 모두 160여점이다. 전시는 이를 연대기가 아닌 파리, 뉴욕, 잉글랜드 등 작가의 활동지역(여정)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눈에 띄는 작품은 긴장감 역력한 에칭(etching)들이다. '밤의 그림자'(1921), '이스트사이드 실내'(1922) 등의 작품을 통해 렘브란트를 좋아했던 작가의 성향을 읽을 수 있다. 명암대조에 의한 극적 표현을 특색으로 한다. 때문에 일부에선 그를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이들을 지칭하는 화파인 테네브로시(tenebrosi)로 분류한다.
전시에선 작가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장부, 사진, 편지와 같은 기록물 110점도 함께 선보인다. 호퍼는 40대가 돼서야 주목을 받았는데, 30대 초반이었던 1913년 뉴욕에서 개최된 미국 최초의 국제 현대 미술전인 아모리 쇼(Armory Show)에서 처음으로 작품을 판매한 것을 제외하곤 벌이가 신통치 않아 생계를 위해 광고·출판물 삽화, 잡지 표지 디자인 등을 그렸다. 이들 자료는 호퍼의 예술이 구축되는 과정과 그의 삶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필 수 있도록 돕는다.
유화는 50여점이다. 그가 남긴 유화가 400여점인 것에 비춰 다소 적다. 그러나 갈수록 도시화되고 산업화되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느낄법한 불안과 초연함,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만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상황들, 그리고 정서적 공허 못지않은 인간의 온기는 남아 있다.
대표작은 당시 78세였던 아내 조세핀을 모델로 한 '햇빛 속의 여인'(1961)이다. 휴식 같은 장면 속 왠지 모를 무상함이 감도는 게 특징이다. '푸른 저녁'(1914) 또한 강렬한 느낌을 전달한다. 같은 공간에서조차 익명의 존재로 머무는 당대 우리 모습을 옮긴 듯해 공감도가 높다. 이 밖에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밤의 창문'(1928)을 비롯해 말년의 밝고 화사한 색감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이층에 내리는 햇빛'(1960) 등도 눈길을 끈다.
다만 올 상반기 가장 기대를 모은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알맹이는 거의 빠졌다. '해외 소장품 걸작 전'의 일환이라는 설명이 무색할 정도다. 일례로 호퍼하면 떠오르는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1942)은 목탄 습작으로 나왔다.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2013)에 영감을 준 '객차'(1965) 등의 작품들과 대공황을 겪은 1930년대 이후의 시대상과 군상들의 쓸쓸한 내면이 짙게 묻어나는 '호텔 방' 시리즈, 1920년대 주요 작품군인 '자동판매기(식당)'(1927)와 '찹 수이'(Chop suey, 1929) 역시 누락됐다. 판화, 스케치 등도 가치가 있지만 혹자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고 할 법하다.
이들 작업이 출품되지 않은 건 휘트니미술관 소장품이 아니어서는 아닌 듯싶다. 뉴욕현대미술관이나 톨레도 미술관 등 여타 미술관에서 빌려 온 작품들도 내걸렸기 때문이다. 특히 한 여성이 침대에 홀로 앉아 무표정하게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아침 햇살'(1952)과 같은 작품은 지난해 휘트니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임에도 이 또한 만날 수 없다.
사실상 이번 전시는 에드워드 호퍼 '아카이브 전'에 가깝다. 전시 제목도 아카이브 전으로 바꿔야 정직하다. 전시 성격과 별개로 동시대미술을 선도해야 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굳이 4개월 동안 전관을 내주면서까지 상업적 성격의 블록버스터 전시를 해야만 했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반세기 전 죽은 망령을 소환해 오랜 기간 박제할 만큼 세상이 한가한지 되묻게 된다.
외국 유명 미술관 소장품을 돈 주고 끌어와 재탕하는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의 기획 역시 긍정적으로 보기 어렵다. 관람객 수가 미술관 운영의 주요 성과지표 중 하나임을 모르진 않으나 '브랜드 장사'는 일반 전시기획사들이 해도 된다.■ 홍경한(미술평론가·LHC Larchiveum 총괄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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