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없는 말이 인식을 해방시켰다. 시야에서 벗어난 뜻밖의 사건이라도 내 일처럼 알 수 있었다. 활자 인쇄술은 기억을 해방시켰다. 기록을 찍어낸다는 것은 누구의 기억도 모방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다음으론 세탁기가 기념비적이다. 바야흐로 시간을 해방시키는 전자시대의 발로다.
"한스야! 빨래는 세탁기에 맡기고 우리는 도서관에 가자꾸나."
한스 로슬링이 '팩트풀니스'에서 기록한, 어머니와 세탁기에 대한 인식을 필자는 지금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아무튼 사람들은 세탁기를 쓰면서 빨래시간에서 해방되었고, 그 시간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활자 인쇄술로 책을 찍어낸 것만큼이나 세탁기로 빨랫감을 돌리는 것이 지식 생산의 큰 공헌이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사이에 '텍스트의 포도밭'이 펼쳐졌다. 책 속의 텍스트가 마치 포도밭 이랑을 타고 뻗어나가 듯 하였고, 지혜의 열매는 마치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열리 듯 하였다.
이반 일리치 신부님(1926~2002)은 이를 "여럿이 웅얼거리면서 암기하던 것이 혼자서 학자식으로 읽으며 사유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책 중심 텍스트는 내 고향이며, 책 읽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나의 '우리'안에 포함되어 있다"고도 하였다.
이렇게 세탁기는 식자(識者)들만이 지식을 독점하던 시대를 누구나 읽고, 쓰고, 생각할 수 있는 대중문해의 시대로 전환시킨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세탁기는 멈추지 않았다. 기계식이 전자식으로 대체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제는 사물 통신이 가능한 스마트 세탁기가 대세다. 빨랫감을 잘 돌리는 데 그치지 않고 정보를 세탁하는 기능까지 도맡기 시작했다. 세탁기가 스마트폰에게 말을 걸고, 소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사람의 언어가 아닌, 0과 1의 이진수로 조합을 이룬 기계언어를 통해서 말이다.
'세탁기가 스마트폰에게'는 디지털 전환 시대의 상징이다. 이 것은 '기억의 해방'에서 '시간의 해방'으로, 다시 '인간 사유의 해방'으로 이어지는 전환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세탁기는 여가 증대에 영향을 미치고, 여가의 증대는 다시 독서 시간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었다.
기계가 인간의 학습에 직접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사유, 즉 개념, 구성, 판단, 추리 따위를 행하는 인간의 이성 작용은 오직 사람만의 몫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렇다는 말이다.
지금부터는 사람 밖에서 학습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애써 지식을 구성하지 않아도 학습된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세탁기와 스마트폰이 소통하며 방대한 양의 책을 데이터화하고, 사람처럼 '우리'의 공동체를 이루게도 될 것이다. 사람은 사람끼리, 기계는 기계끼리 구별지어 있다가 이제는 사람과 기계가 한통속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를 통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얼마든지, 인간의 전매특허인 '인간 사유'를 구매할 수 있다. 그러니 인간 사유의 해방이 아닌가? 50년 동안 구축된 구성주의 학습이론이여 이제는 안녕이다. /임경수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교수/성인학습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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