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의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1924년). 인력거꾼 김첨지의 아내는 한달째 아파 누워 있었고, 세 살 먹은 아이는 어머니의 빈 젖을 빨 정도로 굶주려 있다. 하지만 그 둘을 집에 두고 일하러 나선 김첨지의 하루는 운이 좋았다. 아침 나절에만 30전 거리 한 번, 50전 거리 한 번을 달렸다. 또 당시엔 큰 돈인 1원 50전 거리를 달리는 행운도 따라 붙는다. 하루에만 2원90전을 번다. 1920년대 1원이 약 5만원의 가치였음을 감안하면 14만원 조금 넘게 번 셈이다. 이 같은 행운에도 왠지 불안해진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가야할 주인공은 친구와 평소보다 많은 술을 마신다. 아침에 김첨지의 아내는 일을 나서는 남편을 붙잡기도 했다. 집에 온 주인공은 이미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 있는 아내와 마주한다. 아이는 아내의 마른 젖을 빨고 있다. 슬픈 결말이다. 작자는 가장 비극적인 날의 일상을 '운수 좋은 날'이란 반어법으로 풀어냈다.
주요 은행들도 해마다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며 '운수 좋은 날'이 이어졌다. 금리 인상으로 이자 이익이 해마다 늘었다. 분기, 반기, 연간 기준으로 사상 최대라는 기록적인 실적행진이 펼쳐졌다. 한국은행이 지난 2021년 8월부터 지난해 1월까지 10차례에 걸쳐 연 0.5%였던 기준금리를 3.5%까지 올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예대마진(대출금리-예금금리)은 예년과 비슷했지만 대출이자가 크게 상승하면서 은행의 곳간을 채웠다. 가계대출이 크게 늘면서 은행 이익도 늘어난 셈이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 1월 기준 가계대출 잔액은 1098조4000억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주택담보대출이 855조3000억원 수준이다.
은행의 기록적인 실적행진은 따가운 시선으로 이어졌다. 대통령까지 나서 돈을 번 은행을 꼬집었다. 직원들의 성과급과 희망퇴직금을 두고 '돈 잔치'라고 지적하더니 심지어 '소상공인·자영업자가 은행의 종노릇', '은행 갑질'이란 거친 말까지 등장했다. 이때부터 '운수 나쁜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급기야 작년 말 주요 은행의 순이익 사상최대 기세가 꺾였다. KB·신한·하나·우리 등 4대 금융지주의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14조9682억원으로 전년(15조5309억원) 대비 3.6% 줄었다.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부실에 대비한 충당금적립과 1조6000억원에 달하는 상생금융 지원금 등이 반영돼서다. 4대 금융지주가 작년에 쌓은 충당금은 8조9900억원에 달한다. 전년(5조2600억원)보다 70%나 늘었다.
그동안 운이 좋았던 은행권은 앞날이 걱정이다. 부동산 PF 부실 우려 속에 상생금융에 대한 압박도 여전하다. 기준금리도 하반기 중 인하될 것이란 전망이다. 금리인하는 은행의 실적 하락으로 이어진다.
오는 4월 총선을 앞두고 쏟아지는 선심성 공약도 우려스럽다. 여야 모두 은행권 재원으로 소상공인과 서민 지원 공약을 내놓고 있다.
은행은 이미 2조원 안팎의 상생금융 지원방안을 시행중이다. 대표적인 것이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188만명이 은행에 낸 대출 이자 가운데 금리 연 4%를 초과한 부분을 1인당 최대 300만원까지 되돌려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도 또다시 선심성 공약이 난무한다. 여당은 최근 소상공인 보증공급액을 2배로 늘리고, 중소기업 금리부담을 완화키로 했다. 은행이 부담해야 할 출연금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야당도 코로나19 시기의 소상인·자영업자 대출 이자를 대폭 탕감해 주는 정책을 추진키로 했다. 돈은 은행이 벌었는데 정치권이 돈 쓸 곳을 정하는 꼴이다. '운수 나쁜 날'이 닥쳐오고 있다. /금융부장 bluesky3@metr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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