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인들은 영상이나 사진 등의 다양한 매체와 방식으로 전시를 기록한다. 그림과 설명(비평)을 엮은 인쇄물인 '도록'(圖錄)도 그 중 하나다. 창작 여정에 관한 포괄적인 문서이자, 한 전시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임을 알기 때문이다.
미술관을 비롯한 미술 관련 기관들 또한 도록 제작에 공을 들인다. 그 자체를 예술 생태의 일부로 인식하며 또 다른 형태의 전시로 본다. 따라서 관계자들은 예술가와 큐레이터의 지적이고 창조적인 노력을 보존하기 위해 고민하는 한편 오류나 실수엔 상당히 엄격하다. 만약 그 대상이 미술사적 의미를 지닌 작가와 전시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최근 발간된 김구림(88) 작가의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김구림 전, 2023.8.25.~2024.2.12. 서울관) 도록은 그런 기본 개념이 거의 없다. 불빛이 들어오는 컬러 작품을 흑백처럼 둔갑시켰고, 하얀 바탕의 작품들을 누런색 배경으로 바꿔 놓았다. 심지어 작품 전체를 어둡게 덮어 원본과 전혀 다른 이미지로 '창작'해 놨다. 이게 과연 국내 유일의 국립미술관에서 만든 것인가 싶을 정도다.
작품의 색을 임의로 변경하거나 트리밍(trimming)을 가하는 행위 등은 저작권법상의 '동일성 유지'에 위배된다. 원칙적으로 법은 저작물의 내용이나 형식에 대해 변경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김구림의 도록 속 작품들은 '원작 훼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심각하게 변형돼 있다. 영국 테이트 모던에 소장된 작품도 피해가지 못했다.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수차례에 걸쳐 도록 수정 혹은 재발간을 요청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작가가 교정을 보고 승인한 사항이니 귀책도 작가에게 있다는 식인 모양이다. 물론 작가는 인정하지 않는다. 양측 간 온도 차는 현재도 뚜렷하다.
중요한 건 도록 편집자가 김구림의 작품을 재료 삼아 자신만의 '예술 행위'(?)를 펼칠 동안 관리 감독의 주체인 미술관은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다. 작가의 허락을 받았다는 미술관의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학예사가 보기에 원작과 다르다면 바로잡았어야 옳다. 그게 전문가의 자세요, 작품의 소장 및 연구의 바탕이 되는 도록의 가치를 보호해야 할 국립기관으로서의 당연한 책무다.
문제는 소통 거부다. 미술관에서 발간한 것이니만큼 도록에 대한 최종 책임은 김성희 관장에게 있다. 그러나 그는 면담 요청에도 바쁘다는 이유로 묵살했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진짜 그리 다망한가. 그럴 수 있다. 윤석열 정부의 첫 관장으로 임명된 지 이제 반년 남짓이니 할 일도 많을 것이다. 다만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만남을 청해도 그랬을까.
김구림은 한국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원로 작가다. 국제적 인지도를 지닌 한국 실험 미술의 선구자로 꼽힌다. 그런 그가 지난달 28일 평창동 작업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한국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엔 지난 2월 막을 내린 초대전 당시 출품하려던 작품이 불허되고, 작가의 예술세계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전시 구성 등에 대한 실망과 절망이 복합적으로 녹아 있다. 엉터리 도록의 출판과 대화의 불가능성으로 인해 상처 난 자존심도 그런 결정을 하게 된 원인일 것이다.
현 사태를 바라보는 미술계의 시각은 곱지 않다. 오정은 미술평론가는 "국립현대미술관은 그 위상과 권위에 걸맞은 태도로 미술가를 존중하고 의견을 경청하며 갈등을 풀어나가는 의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시기획자 김찬동은 지난 1일자 한 칼럼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위작 시비로 절필하고 고국을 떠나 쓸쓸히 작고한 천경자 화백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적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곱씹어야 할 발언들이다.■ 홍경한(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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