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 한 공공기관으로부터 평론 청탁을 받았다. 공무원인 담당자는 입주 작가가 원한다며 상세한 내용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메일에는 집필해야 할 작가 작품에 대한 정보와 함께 '원고 분량 A4 4장 이내', '정리된 원고 A4 1장 별도'라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적혀있었다.
거절했다. 25만원이라는 원고료가 문제였다. 한 달 가까이 걸리는 원고 집필 시간과 작품연구에 따른 정신적·육체적 노동에 대한 보상치곤 지나치게 적었다. 작품을 보기 위해 작업실까지 왕복 700킬로미터를 오가는 데 소용되는 교통비와 세금까지 포함된 '글 값'이 25만이라는 건 사실상 재능기부를 하라는 얘기였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21년, 동일한 기관에서 또다시 평론을 의뢰했다. 이번엔 해당 기관의 지원으로 전시할 작가가 직접 연락했다. 원고료는 30만원이라고 했다. 물론 세금공제 전, 교통비도 그 30만원 내에서 모두 해결해야 했다. 역시 거절했다. 개선되지 않은 환경에선 평론 작성이 불가능함을 담당자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며칠 뒤 작가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그는 담당자에게 이런저런 상황을 설명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돈에 맞는 비평가를 찾으면 될 것 아니냐"는 핀잔마저 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작가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지적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는 그들의 탁상행정과 내부규정, 수당 규격별 지급액 기준 등이 잘못되었을 뿐이었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언젠가는 역사적, 문화적, 예술적 틀 안에서 작가와 작품을 맥락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평론의 가치와 의미를 이해하고, 다른 관점과 해석을 통한 예술적 담론의 풍부함 및 표현의 지속적인 진화에 기여하는 비평가들에게 걸맞은 정책이 실현되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변한 건 없다. 비평가와 연구자들의 생산물에 대한 낮은 보상체계도 달라지지 않았다. 실제로 2023년 10월 국내의 한 비엔날레가 비평가들에게 제시한 평론비는 30만원이었다. 지난 4월 모 공립미술관이 밝힌 원고료 또한 25만원에 불과했다.(굳이 비교하자면 명목임금은 25만~30만원이지만 실질임금은 '0원'에 가까운 셈이다. 쉽게 말해 그냥 공짜로 써달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공립미술관이나 공공기관의 다수는 이처럼 터무니없는 글 값을 책정해놓고 있다. 평론만으론 생활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니 점점 전업 비평가가 줄어들고, 비평가를 희망하는 후배들 또한 드물어지고 있다. 당장 굶을 것이 훤한데 어느 누가 비평가를 꿈꾸겠는가.
어떻게 해야 이런 현실을 타개할 수 있을까. 일단 미술평론가협회의 적극적인 대안 제시가 필요하다. 협회차원에서 해당 사안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의견을 개진할 필요가 있다. 그게 어렵다면 비평가들끼리의 '연대파업'도 하나의 대안이다, 그렇다면 "돈에 맞는 평론가를 찾으면 될 것 아니냐"는 어느 공무원의 오만한 발상과 발언을 접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상상이다. 평론가협회는 무기력하고, 공공기관 자료에 이름만 올려도 좋다며 무상노동조차 감수하는 대체가능 인력이 있다. 경험 많은 비평가조차 비평계가 처한 현실을 외면한 채 개념 없이 응하곤 한다. 수모에 근접한 대우에도 아무 말 없으니 기관들은 달라질 이유를 찾지 못한다. 법으로 정하지 않는 한 처참한 글 값이 그대로일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다행인 것은 오는 7월 26일 시행되는 '미술진흥법'에 비평가들의 글 값이 다뤄진다는 소식이다. 공공기관의 평론비 등을 규정화한다는 것이 요지인데, 아직 단정하긴 이르지만 기획자나 비평가들의 기획비와 원고료 산정 문제 등이 심도 있게 논의되고 있다는 점에선 고무적이다. 미술진흥법으로 비평가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개선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홍경한(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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