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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지역

[되살아난 서울] (161) 조선의 역사를 만나는 곳, 서울 은평구 '화의군 이영 묘역'

지난 3일 오후 화의군 이영 묘역을 찾았다./ 김현정 기자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는 조선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 화의군 이영 묘역이 바로 그곳이다. '서울 지명사전'에 따르면, 진관동이라는 동명은 지역 내 진관사라는 절이 있는 데서 유래했다. 고려 현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진관사의 전신인 신혈사에 숨어 있었다. 당시 작은 암자였던 신혈사에서 수도하던 진관조사라는 노승이 그를 도왔고, 왕이 된 현종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절을 새로 짓고 승려의 이름을 따 '진관사'로 명명했다. 진관사를 경계로 뒤쪽은 진관내동, 앞쪽은 진관외동으로 법정동이 나뉘어 있었으나, 2007년 진관동으로 합쳐졌다.

 

◆불천지위 하사받은 육종영, 화의군 이영

 

이달 3일 오후 화의군 이영 묘역을 방문했다./ 김현정 기자

지난 3일 오후 은평구 진관동 산60-2번지에 자리한 화의군 이영 묘역을 방문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4번 출구 앞에서 7723번 버스를 타고 '제각말5단지·은평뉴타운도서관' 정류소에서 하차해 진관생태다리쪽으로 약 300m(도보 5분 소요)를 걸어 목적지에 다다랐다.

 

화의군 이영 묘역의 뒤에는 북한산이, 앞에는 아파트단지가 둘러쳐졌다. 홍살문(악귀를 물리치고 액운을 쫓고자 세운 문)을 기준으로 우측에는 작은 연못이 나 있었다. 청둥오리 한 마리가 물레방아 모형과 장식용 석등으로 꾸며진 연못 위를 둥둥 떠다녔다.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서울의 능묘'에는 이곳의 홍살문이 특별한 이유가 나와 있다. 화의군 이영 묘역의 홍살문은 순조 10년(1810)에 왕명으로 불천지위(공훈이 있는 사람으로서 영원히 사당에 안치하도록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의 전교와 함께 받은 것이다. 불천지위를 하사받은 왕실은 태조의 장남인 진안대군과 화의군 둘 뿐이라고.

 

연못의 오른편에는 화의군 신도비가 설치됐다. 거북이 형태의 비석 받침인 귀부 위에 비신(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이 세워졌다.

 

조선의 4대왕 세종의 여섯번째 아들인 화의군 이영은 학문에 조예가 깊어 세종의 한글창제에도 참여했으며, 훈민정음처의 감독관을 지내기도 했다.

 

3일 오후 화의군 이영 묘역 내 영절문을 둘러 봤다./ 김현정 기자

홍살문 앞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가면 영절문(影節門)이라는 현판이 붙은 건물이 나온다. 영절은 '큰 절개를 비춘다'는 의미로, 화의군 이영의 절개를 추모한다는 뜻이다.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서울의 문화재'에 의하면, 화의군 이영은 1455년 금성대군 등과 결탁해 국기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외지에 부처됐다가 이듬해 사면된 뒤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돼 전라도 금산에 안치됐다.

 

지난 3일 오후 화의군 이영 묘역 내 충경재를 찾았다./ 김현정 기자

화의군은 정조 때 종친 중 절의가 깊은 인물로 널리 알려져 ▲안평대군 이용 ▲금성대군 이유 ▲한남군 이어 ▲영풍군 이전 ▲하령군 이양과 함께 육종영으로 불렸다. 육종영은 단종을 위해 세조와 맞서다 죽임을 당한 6명의 종친을 가리킨다.

 

이날은 아쉽게도 문이 잠겨 사당을 둘러볼 순 없었다. 그 좌측엔 재실인 충경재가 건립됐다. 이곳 역시 자물쇠가 걸려 있어 내부 접근이 불가했다.

 

◆사망 시기 의견 분분

 

이달 3일 오후 화의군 이영 묘역 내 영절문을 둘러 봤다./ 김현정 기자

화의군의 묘는 묘역 맨 위에 단분 합장 형태로 안치됐다. '전기울타리 감전위험 접근금지'라는 무시무시한 경고문이 붙어 있어 멀찌감치 떨어져 목을 쭉 빼고 구경했다. '서울의 문화재'에 따르면, 화의군 묘역 내엔 분묘를 중심으로 뒤쪽으로는 곡장이 둥글게 둘러졌다. 계체석을 경계로 위쪽으론 묘갈과 혼유석이, 아래쪽으론 문인석, 무인석, 망주석이 좌우로 각 1기씩 배치됐다. 두 무인석의 중간엔 장명등 1기가 자리했다.

 

3일 오후 화의군 이영 묘역을 방문했다./ 김현정 기자

묘갈의 머리부분은 반원형으로 구름무늬가 돋을새김으로 조각됐으며, 앞면 구름무늬 한가운데엔 해를, 뒷면엔 그믐달을 새겨 넣었다. 비의 몸돌은 방형으로, 앞면에 적힌 '화의군지묘'와 뒷면에 쓰인 '융경3년4월일립'이라는 문구를 통해 묘주의 신분과 묘갈 건립 연대가 1569년임을 알 수 있다.

 

문인석 2기 모두 몸과 얼굴이 가느다랗고 호리호리하다. 눈을 감은 채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으며, 머리에 쓴 관은 조선 후기 석인상에서 많이 보이는 복두가 높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는 "화의군 이영 묘역은 16세기 중반 조성돼 선조~영조 연간의 묘제와 석물 조각 방식을 잘 보여준다"며 "비교적 원형이 제대로 보존돼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서울의 능묘'에는 세조 3년(1457) 금성대군이 단종복위운동으로 죽임을 당하고 화의군도 전라도 금산으로 귀양을 가서 사약을 받아 이곳에 처음 묻혔다고 나와 있으나, 다른 의견도 존재한다. 국가유산청은 "성종대왕실록에 1489년 65세가 된 화의군이 자신의 죄에 연루돼 서민으로 사는 서자를 종실의 일원으로 거둬 달라고 상서하자 성종이 조정의 논의를 거쳐 그의 자손을 천역(賤役·천한 일을 하는 사람)에서 면해 준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어 금산에서 사약을 받고 향년 36세를 일기로 순절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화의군 이영 묘역의 재실을 비롯한 전체 공간은 6필지, 6만8194㎡ 규모이다. 서울시는 지난 2005년 12월 8일 이 중 265㎡ 면적에 총 10기 유적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4호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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