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고등학교 교실은 지금 '기록'이라는 거대한 신기루를 쫓고 있다. 수행평가 철이 되면 학생들은 밤을 새워 탐구 보고서를 급조하고, 교사들은 학생의 개성을 500자라는 제한된 틀에 우겨 넣기 위해 작문 전쟁을 벌인다. 학교생활기록부가 내신의 불리함을 단숨에 뒤집을 마법의 열쇠라는 믿음, 이른바 '생기부 만능론'이 공교육 현장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된 기록이 과연 대학 문턱을 넘게 해줄 실질적인 무기일까. 입시 데이터와 대학의 평가 메커니즘을 냉정하게 분석해 보면 결론은 자명하다. 기록은 '숫자'라는 보증수표가 있을 때만 가치를 지닌다.
대학 평가 프로세스는 수험생의 기대보다 훨씬 더 냉혹하고 효율적이다. 수도권 주요 대학의 경우 입학사정관 한 명이 검토해야 할 서류는 연간 수천 건에 달한다. 고려대학교 등 주요 대학의 사례를 분석해 보면, 서류 평가 기간 중 사정관 1인이 학생 1명의 생기부를 검토하는 데 주어지는 시간은 고작 10분 내외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사정관은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기록을 정독하며 숨겨진 진주를 찾지 않는다. 핗자가 분석한 합격사례를 교차 분석한 결과, 대학은 우선 '학업 성취도'라는 정량적 지표로 평가 대상을 1차 선별한다. 즉, 성적이라는 문턱을 넘지 못한 학생의 화려한 기록은 사정관의 눈에 닿기도 전에 이미 평가 순위에서 밀려난다는 뜻이다.
특히 현재 고1 부터 적용되는 2028학년도 대입 개편안에 따른 오해를 바로잡아야 한다. 내신이 5등급제로 완화되며 1등급이 10%까지 확대되자, 등급 변별력이 약해져 생기부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는 낙관론이 쏟아진다. 그러나 이는 대학의 생리를 간과한 해석이다. 1등급이 흔해질수록 대학은 역설적으로 그 숫자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원점수와 등수가 전교 최상위권인 학생의 세특은 '탁월한 탐구력'으로 읽히지만, 등수가 밀린 학생의 화려한 세특은 '화려한 포장지' 혹은 '신뢰할 수 없는 과장'으로 치부된다. 즉, 5등급제 체제에서 생기부는 낮은 성적을 가려주는 가면이 아니라, 우수한 성적을 증명하는 검증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입시 데이터는 성적대별로 투입해야 할 에너지의 비중이 완전히 달라야 함을 시사한다. 내신 1~2등급대의 상위권 학생들에게 생기부는 동점자 사이에서 우위를 점하는 결정적 한 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3등급 이하의 중하위권 학생들이 부족한 점수를 메우기 위해 기록 관리에 몰두하는 것은 전략적 패착이다. 교육 당국의 통계는 낮은 성적을 기록으로 뒤집는 역전극이 극히 이례적인 사례임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 시간을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고 수학 문제 하나 더 푸는 데 투자해 성적 자체를 올리는 것이 합격 확률을 높이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성적이 낮은 상태에서 작성된 고난도 탐구 보고서는 입학사정관에게 학생의 역량이 아닌 '교사의 미사여구' 혹은 '대필'로 비칠 뿐이다.
결국 대입의 본질은 '학업 역량'으로 수렴된다. 생기부는 그 역량을 증명하는 보조 자료이지, 실력 자체를 대체할 수 있는 가면이 아니다. "제발 시간 낭비하지 마라"는 전문가들의 경고는 입시의 주객을 혼동하지 말라는 뼈아픈 충고다. 대학은 공부를 잘하고 싶어 하는 학생이 아니라, 이미 공부를 잘하고 있음을 숫자로 증명한 학생을 뽑고 싶어 한다. 성적이 곧 생기부의 '독자'를 결정한다는 냉정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기록을 위한 작문 기술이 아니라, 교과서의 원리를 파고드는 치열한 공부다. 기초가 부실한 기록은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다. 숫자가 증명하지 못하는 역량은 결코 대학의 선택을 받을 수 없다.
/지상범 JBS진로진학연구소장
Copyright ⓒ 메트로신문 & metroseoul.co.kr
Copyright ⓒ Metro. All rights reserved. (주)메트로미디어의 모든 기사 또는 컨텐츠에 대한 무단 전재ㆍ복사ㆍ배포를 금합니다.
주식회사 메트로미디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17길 18 ㅣ Tel : 02. 721. 9800 / Fax : 02. 730. 2882
문의메일 : webmaster@metroseoul.co.kr ㅣ 대표이사 · 발행인 · 편집인 : 이장규 ㅣ 신문사업 등록번호 : 서울, 가00206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2546 ㅣ 등록일 : 2013년 3월 20일 ㅣ 제호 : 메트로신문
사업자등록번호 : 242-88-00131 ISSN : 2635-9219 ㅣ 청소년 보호책임자 및 고충처리인 : 안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