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사람들] 뮤지컬 본고장서 ‘희망’을 노래한 배우 이해찬… "브로드웨이에서 계속 도전하는 게 꿈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는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와 함께 뮤지컬 본고장으로 꼽힌다. 그런데 지난달 9일 브로드웨이에서 전해진 놀랍고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토니상(Tony Awards) 수상 소식이었다. 토니상은 미국 연극·뮤지컬계의 '오스카상'에 비견될 정도로 권위 있는 상이다. 그런데 '어쩌면 해피엔딩'은 토니상 시상식에서 무려 6관왕을 달성했다. 뮤지컬 본고장에서 'K뮤지컬'을 알리기까지, 우리가 보지 못한 수많은 노력이 있었고 그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런데 결실을 맺은 이는 또 있었다. 바로 브로드웨이 뮤지컬 '하데스타운'에 주역으로 무대에 오른 한국계 미국인 배우 이해찬(미국명 Timothy H. Lee)씨다. <메트로경제신문>은 지난달 28일 미국에 머물고 있는 이해찬 씨와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11세에 갑자기 미국으로 오게 된 어린 소년이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는 이민 1.5세대 뮤지컬 배우가 되기까지, 어떤 곡진한 사연이 있었을까. ◆매일 울던 동양인 소년이 브로드웨이에 가기까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오디션에서 퇴짜 맞은 적 있어" 이해찬 씨는 11세에 갑자기 미국으로 건너가게 됐다. 어머니와 형과 함께 이민을 왔는데, 형은 잘 적응했지만 이씨는 그렇지 못했다. 이씨는 "딱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미국으로) 온 것 같아 (적응이) 많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렇게 3년간은 매일 울며 한국으로 전화했다고 한다. 돌아가고 싶어서…. 그런 그에게 희망을 준 것은 형의 학교에서 하는 'Fiddler on the Roof(지붕 위의 바이올린)'라는 뮤지컬이었다. 즐겁게 공연을 하는 형을 보며 '적어도 저 무대에 올라가면 친구들이 괴롭히지는 않겠지'하는 마음에, 고등학교 진학 후 뮤지컬 동아리에 가입했다. 이 동아리 활동이 뮤지컬 전공, 수많은 오디션, 그리고 2015년 데뷔(뮤지컬 '맘마미아')로까지 이어진다. 그는 데뷔 무대에 대해 "앙상블 중에서도 가장 작은 역할로 무대에 섰는데, 그때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돈을 받았다는 것에 놀랍고, 기쁘고, 신기했었다"며 "말도 안되는(말도 안되게 적은) 금액임에도 내 일로 돈을 번 것 같아서 행복했다"고 회고했다. 신인배우는 작품을 찾아 지원해야 하는 것이 일이다. 그는 "몇백개의 오디션을 본 후에야, 내 직업은 '오디션을 보는 사람'이고 공연은 그 직업에 딸려오는 '부수적인 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수없이 많은 오디션 속에서 살아야 했다는 뜻일 것이다. 특히 그에게 벽으로 작용한 것은 '한국계 이민자'라는 조건이었다. 수많은 오디션에도 선천적인 조건 때문에 기회를 잡기 힘들었다는 의미다. 사실 캐스팅 상 인종 문제는 브로드웨이뿐 아니라 문화예술계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씨는 "한번은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제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돌려보내진 적도 있었고, 혹은 오디션에서 저만 동양인이었는데 몇달 뒤에 확정된 캐스팅을 보면 백인이 뽑힌 일이 부지기수였다"며 "그렇기에 이 업계에서 제 자리는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생각까지도 했다"고 말했다. '데뷔할 때보다 지금은 인종차별 문제가 많이 해결되는 것 같나'란 질문에 그는 "주변을 보면 많은 동양인 배우가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해 정말 좋아지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어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안으로 들어가서 '우리도 잘한다' '우리도 기회만 주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데, 점점 그렇게 돼가는 것 같아서 정말 기쁘다"고 강조했다. ◆"관객들에게 좋은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을 좋아한다" 그가 주역을 맞은 '하데스타운'의 모티브는 '그리스신화'다. 오르페우스, 그리스신화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들어본 이름일 것이다.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 그런지, 그의 노래에 나무가 춤을 추고 맹수가 얌전해졌다고 한다. '하데스타운'은 이 오르페우스와 연인 에우리디케의 슬픈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배경은 1930년대 대공황의 황폐한 분위기를 따왔다. 그런데 모티브가 신화인 만큼 근현대 유럽·미국 등이 배경인 소설 기반 다른 작품에 비해 캐스팅의 제약이 적다. 인종뿐 아니라 성별, 나이 등 '인위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조건이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는 "저는 '백인들의 이야기'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좋은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을 좋아한다"며 현재 공연하고 있는 '하데스타운'을 들었다. 그에게는 인종적 조건을 보지 않을 수 있는, 스토리로 관객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작품이 '하데스타운'인 것이다. 이 작품의 남녀 주인공은 신화와 다소 다르다. 자기가 노래를 부르면 나무가 열매를 내려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낙천주의자 오르페우스, 반대로 결혼하자는 그의 말에 '그럼 결혼식은? 집은? 만찬은?' 하고 현실주의자 에우리디케. 이 작품에서 모든 문제가 시작되는 지점은 여기다. 신화에서 에우리디케는 독사에 물려 망자가 됐고,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찾으러 지하세계에 갔다. 반면 '하데스타운'에서의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가 세상을 구하기 위한 노래를 작곡하느라 집안을 돌보지 못하는 사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하세계(하데스타운)'로 돈을 벌러 간다.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아내를 찾으러 하데스타운에 갔고, 그곳에서 텅 빈 눈으로 일만 하는 '일꾼들'을 만나게 된다. 작품 설정에 대해 길게 설명한 이유가 있다. 이씨는 오르페우스 역의 언더스터디(예비 배우), 그리고 하데스타운에서 일하는 '일꾼들(주로 앙상블 배우 5명이 연기한다)'을 맡았다. 특히 브로드웨이의 경우 한 역할엔 한 배우가 캐스팅되기 때문에, 언더스터디도 정기적으로 무대에 선다. 즉 정기적으로 주연으로도, 조연으로도 무대에 오르는 격이다. 그러니 이 '일꾼들'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일꾼은 '하데스타운'에서 쉼없이 일한다. 그들은 하데스와의 계약(사실상 명령)에 의해 벽을 세운다. 이 벽은 '가난'을 막기 위한다는 이유로 지어진다. 그러나 일꾼들에게 자유는 없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억압적 체제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역할이 '일꾼들'이고, 이게 에우리디케가 맞이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오르페우스가 지하세계로 내려와 에우리디케를 찾자, 하데스타운엔 파란이 인다. 하데스는 에우리디케를 놔주면 일꾼들이 계약을 깨고 도망갈 거라는 걱정을 한다. 실제로 하데스의 염려대로 오르페우스에 동조하는 일꾼들이 자유를 갈망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일꾼들은 가장 보통 인간다운 모습… 우리도 항상 오르페우스같은 리더를 기다린다" '하데스타운'에서 오르페우스는 권력에 '맞서는' 역할이고, 일꾼은 권력 혹은 체제에 '순응'하는 상반된 모습을 보인다. 이에 대해 이씨는 "오르페우스는 무대 전체를 끌고 가야하고, 한 캐릭터를 공연 시간 내내 이어갈 때 느끼는 희열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오르페우스처럼 절망하고 무너질 때가 있는데, 이 역을 할 때마다 더 큰 힘을 되고 '다시 일어나서 도전해야겠다'는 마음을 갖는다"며 "저에게는 정말 고마운 친구다. 매우 어렵지만"이라고 말했다. 이어 "오르페우스처럼 좌절하면서도 권력의 도전하는 것이 제가 동양인 배우로서 브로드웨이라는 큰 권력에 도전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고 평을 남겼다. 반면 일꾼에 대해서는 "배울 점이 많은 역할이다. 앙상블이 5명 밖에 안 돼서 노래·춤 모두 잘해야 한다. 솔직히 가끔은 오르페우스보다 어려울 때도 있다"면서도 "극 전체로 볼 때는 즐겁다"고 비교했다. 특히 일꾼은 현대사회의 직장인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면이 있는데, 이에 대해 이씨는 "음식과 술, 봄의 즐거움이 올 때는 누구보다 가장 기뻐하지만, 한순간에 하데스에게 복종하고 포기하고 자기 스스로를 쉽게 놓아버리는 역할로 보통 인간다운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씨는 '하데스타운'에서 일꾼이 중요한 이유로 "개인적으로는 오르페우스의 말과 결정에 영향을 받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는다"면서 "우리도 삶 속에서 항상 오르페우스같은 리더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나 고민해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좌절에 빠져서 하데스타운에서 노예처럼 일하는게 일상이 돼 버린 우리들이 올바른것을 위해 싸우고 모자를 집어던지며 인생의 아름다움을 다시 깨닫게 된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했다. 그만큼 애정이 깊은 작품이라 그럴까. 수많은 역할로 무대 위에 올랐지만, 이씨는 만약 한국에서 뮤지컬 배우 활동을 한다면 가장 하고 싶은 역할로 '오르페우스'를 꼽았다. 그는 "제일 익숙한 역할이기도 하고, 한국어로 공연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한국 배우분들과 공연을 하는 건 어떨지 궁금하고 기대되서"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씨는 뮤지컬배우로서 최종 목표로 "브로드웨이라는 플랫폼에서 동양인 남자 배우도 주연을 할 수 있다고 인식되도록 계속 문을 두드리고 싶다"며 "언젠가 나같은 사람이 토니상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 그때는 장벽이 좀 낮아지지 않을까"하고 웃었다. 이어 "하루하루 감사함으로 공연하고 싶고, 계속해서 도전하는 게 제 꿈"이라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서예진·허정윤기자 syj@metr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