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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코너 >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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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 서울우유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 서울우유 우리나라 우유 시장에서 매출의 73% 이상을 차지하는 우유는 바로 '흰 우유'다. 그 중에서도 시장점유율이 가장 높은 우유는 단연 서울우유협동조합의 '나100%'다. '흰 우유' 하면 바로 서울우유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지금까지 서울우유는 우유 품질 향상을 위해 혁신적인 시도를 거듭해가며 국내 우유시장을 선도해 왔다. 저출산과 대체음료의 증가 등으로 국내 우유 소비량이 점차 줄고 있는 추세지만, 서울우유는 '나100%'를 통해 '품질 고급화 전략'을 시도하며 유가공 시장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올해로 81주년을 맞는 서울우유는 국내 유업계 1위 기업으로서 그 명성에 걸맞게 우유 시장 점유율에서 현재까지 부동의 1위 자리를 지켜왔다. 지난 80여년간 다양하고 혁신적인 시도를 통해 국내 낙농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겨 온 서울우유는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 ◆대한민국 낙농업을 이끌다 한국 낙농업의 역사는 곧 서울우유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서울우유협동조합은 우리나라 낙농업을 이끌어 온 명실상부한 유업체다. 서울우유협동조합의 시초는 1937년 경성우유동업조합으로 출발했다. 일반 기업과는 달리 직접 목장을 운영하는 낙농인 21명이 조합을 이뤄 국내 유업계의 역사를 시작한 것이다. 경성우유 시절의 우유 배달은 가마솥에 끓인 뒤 일본에서 수입한 병에 담아 가정에 배달하는 방식으로 유통됐다. 해방 직후인 1945년에는 '서울우유동업조합'으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서울우유 판매에 나섰다. 1950년 6·25전쟁으로 낙농기반이 붕괴되자 서울우유는 낙농 살리기에 앞장섰다. 우유병 사용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도 미군부대에서 나온 맥주병에 우유를 담아서 파는 등 한국 우유산업의 성장과 함께 커왔다. ◆혁신 또 혁신 서울우유는 1961년 유지방 소화를 돕고 지방이 뜨는 부유 현상을 없애기 위해 균질기를 도입했다. 이후 1962년 국내 최초로 선진화된 고급 균질우유를 가정으로 배달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선명한 농협 마크와 함께 커다란 글씨로 '균질우유'라고 쓰인 목제 상자를 싣고 다니던 우유 배달원의 모습은 서울우유 홍보에도 큰 역할을 했다. 이를 발판 삼아 서울우유는 근대적 중랑교 공장을 건설하고, 우유 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로 연유를 생산하여 최신 유가공 기술을 축적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서울우유는 고객이 신뢰할 수 있는 제품 개발에 집중하며 기술 투자에도 앞장섰다. 1984년 국내 최초로 '콜드체인시스템'을 완비해 목장에서 생산한 우유를 고객이 마실 때까지 중간유통 전 과정을 냉장 상태로 이뤄지도록 하여 우유 품질의 고급화 시대를 열었다. 1985년에는 우유 음용량 증가를 통한 국민체위 향상을 위해 우유포장 용량을 180㎖에서 200㎖로 증량했으며,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의 공식 후원자로서 성공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제조일자가 있는 '서울우유' 서울우유의 국내 유업계 1위다운 면모는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우유인 만큼 '품질' 향상에 초점을 맞췄다. 1975년에 용인공장을 설립하면서 우유 생산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했으며, 뒤이어 1984년 양주공장, 1989년 안산공장, 2005년 거창공장 역시도 우유 생산단계에 신기술을 적용해 우유 품질 향상에 힘썼다. 2014년에는 안산 중앙연구소를 준공하고 원유의 품질과 생산성 극대화 방안 연구를 지속, 그 결과는 소비자뿐 아니라 국내 학계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2009년에는 '제조일자 병행 표기제'를 도입하며 소비자들이 신선도 높은 우유를 선택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했다. 유통기한에만 의존해 우유를 선택하던 방식에서 '제조일자 표기'라는 한 줄 혁신을 통해 우유의 신선도를 판별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일 평균 판매량이 15% 이상 신장하는 등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1등급 우유 '나100%' 서울우유협동조합은 2016년 3월, 세균수 1A등급에 체세포수까지 1등급 원유만을 사용한 두 개의 1등급 우유 '나100%'를 선보였다. 세균수 등급이 원유가 얼마만큼 깨끗하게 관리되는지 보여주는 기준이라면, 체세포수 등급은 젖소의 건강 상태를 가늠하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스트레스나 질병이 없는 건강한 젖소에서만 체세포수가 적은 고품질의 원유를 얻을 수 있다. 그 동안 우유의 위생 품질 기준을 세균수만으로 가늠해 왔다면 체세포수라는 새로운 기준까지 적용해 우유 품질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했다. 이 같은 최고등급 우유 생산은 장기적이고 전폭적인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울우유협동조합은 조합원인 낙농가가 더 좋은 환경에서 낙농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연간 400억원 이상을 목장 시설 관리와 젖소의 건강 관리에 투자하고 있다. 특히 업계에서 유일하게 젖소의 건강을 책임지는 전문 수의사 35명을 '밀크 마스터'로 지정해 젖소들이 체세포수 1등급인 원유를 생산해 내는데 필수 조건인 건강과 스트레스까지 관리하고 있다. ◆시장점유율 40% 돌파 '나100%'를 통해 '품질 고급화 전략'을 시도하며 국내 우유시장을 선도해 온 서울우유의 노력은 실제로 소비자들이 먼저 알아 차렸다. 시장조사기관 닐슨코리아 자료에 의하면 서울우유협동조합의 우유시장점유율은 2018년 2월에 40.2%, 3월에 40.5%로 2개월 연속 40%를 넘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 2월 대비 4.8%, 3월 대비 4.2% 증가한 수치이다. 뿐만 아니라 올해 4월 우유판매량은 200㎖기준 일 785만8천개로 동기간 전년대비 약 107%의 신장률을 기록하는 쾌거를 이뤘다. 서울우유는 '나100%'의 지속적인 판매량 증가의 이유로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제품 성분과 원재료를 확인하고 구입하는 똑똑한 소비 트렌드 변화로 분석했다. 국내에서 시판되는 대부분의 흰 우유가 세균수 1A등급 원유로 생산되어 품질적 차이를 구분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체세포수'라는 새로운 선택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소비자의 지지를 얻은 것이다. 최근 서울우유는 '나100%' 출시 2주년을 맞아 광고 모델로 배우 윤여정과 손호준을 선정하고, 새로운 광고 캠페인을 선보이고 있다. TV광고 캠페인을 통해 '체세포수' 등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나100%' 마케팅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2018-06-21 15:09:09 박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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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 팔도비빔면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 팔도비빔면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여름이면 익숙한 팔도 비빔면 CM송이다. 비빔국수를 집에서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팔도비빔면은 면을 익히고 차가운 물에 헹군 뒤 양념장을 넣으면 완성된다. '여름=팔도비빔면'이라는 공식처럼 1984년 출시 이후 국내 비빔면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국내 원조 비빔라면이다. 경쟁사들은 타도 팔도를 외치며 신제품을 선보이고 있지만 팔도비빔면을 넘어서기에는 살짝 부족한 느낌이다. 팔도비빔면은 소면과 유사한 얇은 면발과 사과 향이 첨가된 스프의 매콤·새콤·달콤한 3박자가 어우러진게 특징이다. ◆라면의 고정관념을 깨다…출시 후 11억개 판매 '팔도 비빔면'은 출시 이후 33년 동안 11억 개가 판매되며 51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뜨거운 국물과 함께 먹던 라면의 고정관념을 깬 제품이다. 여름철 집에서 삶아먹던 비빔국수를 라면으로 계량했다. 차갑게 먹는 라면시장을 처음으로 개척했다. 출시 당시에는 계절면 제품으로 여름철에만 한정적으로 판매됐으나 1990년대 후반부터 사계절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출시에 앞서 전국에 유명한 맛 집의 비빔냉면과 비빔국수 등을 연구하여 매콤, 새콤, 달콤한 황금비율 소스를 구현했다. 원재료를 그대로 갈아 만든 액상스프 기술력과 최고의 원료를 사용한 것이 '팔도비빔면'의 성공 원인이다. 액상스프의 경우 당시, 한국야쿠르트가 보유한 발효공학과 미생물공학에 관한 축적된 기술이 많은 도움이 됐다. 팔도비빔면 개발을 담당했던 연구원은 "새콤달콤한 맛을 개발하기 위해 비빔라면 맛집을 수없이 돌아다녔다"며 "당연히 모든 라면 스프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지만 수 없이 배합을 변경하고 테스트를 거치며 지금의 맛으로 대표되는 액상스프를 개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현재도 소비자들은 못 느끼지만 매년 배합비를 조정해 조금씩 변하는 고객들의 입맛을 맞춰간다"고 덧붙였다. 한편 팔도가 액상스프를 적용한 것이 비빔면이 처음이 아니다. 분말스프 중심의 라면시장에 차별화된 제품을 출시해야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1983년 '팔도 참깨라면'에 국내 최초 액상스프를 첨부했다. 액상스프의 역사만 30년이 넘는다. 비빔면은 가정에서 즐겨먹는 비빔소면을 좀 더 편리하고 맛있게 먹기 위해 만든 제품이다. 이러한 기획의도에 기반하여 소면과 유사한 얇은 면발을 제품에 적용하였다. 얇은 면발은 빠른 시간 내에 익어 더운 여름 불앞에 있는 시간을 줄일 수 있고 액상소스가 골고루 붙어 맛을 더욱 풍부하게 해준다. '팔도비빔면'이 처음 출시되었을 때 라면을 찬물에 행군 뒤 소스에 비벼먹는다는 개념이 알려지지 않았던 때라 뜨거운 상태에서 비벼먹거나, 일반 라면처럼 끓여먹는 소비자들이 많았다. 팔도는 조리법을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해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양손으로 비벼도 되잖아" 라는 CM송을 제작했다. ◆팔도비빔면 브랜드의 확장 최근에는 소비자 의견을 반영한 다양한 제품을 출시하며 브랜드 강화에 나섰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9월 선보인 '팔도 만능 비빔장'이 있다. '만능 비빔장'은 '팔도비빔면' 제품에 들어 있는 액상스프에 매콤한 마늘과 홍고추, 새콤한 사과과즙, 달콤한 양파를 넣은 제품이다. 삼겹살, 골뱅이 등 어떤 요리에도 잘 어울린다. 시작은 만우절 농담에서 부터였다. 지난해 4월 1일 팔도는 팔도기업블로그를 통해 '팔도 만능 비빔장 출시'라며 네티즌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후 5월에 실제 '만능 비빔장'을 증정품으로 제공. 농담을 현실화했다. '만능 비빔장'이 들어간 '팔도 비빔면' 1000만개는 40일 만에 완판되었다. 고객사은품으로 고객에게 제공한 수량 200만 개는 약 10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소비자들의 폭발적 반응에 팔도는 '팔도 만능비빔장' 정식 출시를 결정하고, 유통채널에서 판매를 시작했다. 정식 출시된 비빔장 15만개는 판매 시작 22일 만에 완판됐고, 시장에 선보인 이후 현재까지 100만개 이상 판매되었다. 비빔장으로 신규 수입원을 발굴한 것이다. 기존 비빔면 중량을 20% 늘린 '팔도 비빔면 1.2'도 선보였다. 한 개는 양이 부족하고 두 개는 많다는 고객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면과 액상스프의 양을 늘렸음에도 가격은 기존과 동일하게 유지했다. 한정 출시된 1000만개는 50일 만에 완판됐다. 팔도는 추가 판매 요청으로 1000만 개를 추가 생산했고 이 또한 얼마가지 않아 판매 완료됐다. 최근에는 봄맞이 한정판 '봄꽃 비빔면'을 새롭게 선보였다. 꽃 모양 어묵이 담긴 건더기 스프를 추가 제작해 별첨한 것이 특징이다. 새콤달콤한 비빔면 소스와 쫀득한 식감의 어묵이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먹는 재미에 보는 재미를 더해 SNS상 인기를 끌며 일치감치 판매를 마감했다. ◆연간 판매량 1억개 눈앞 지난해 '팔도비빔면' 매출액은 2016년 대비 8% 이상 증가한 490억원에 이른다. 판매량 또한 지속적으로 상승해 연간 9,900만 개 가량 판매됐다. 출시 이후 지금까지 전체 비빔면 시장 내 부동의 점유율 1위다. 특히 2013년에는 한 TV예능 프로에서 골뱅이와 비빔면을 섞어먹는 '골빔면'이 야식으로 소개되며, 470억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윤인균 팔도 마케팅 담당자는 "30년 이상 팔도 비빔면이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타사가 따라올 수 없는 액상스프 노하우와 지속적인 품질 개선을 통해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한 결과"라며, "앞으로도 더 좋은 맛과 품질로 성원에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2018-06-14 17:12:43 박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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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 롯데주류 처음처럼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 롯데주류 처음처럼 1920년대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국내 소주공장이 만들어지면서 소주가 지금의 서민의 술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롯데주류의 전신인 강릉합동주조의 역사도 이 무렵이다. 롯데주류 소주 역사는 약 9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6년 설립된 강릉합동주조에서 강원도를 지역기반으로 한 '경월' 생산을 시작했고 당시 강원도에서 약 80%이상에 육박하는 시장점유율을 보인다. ◆녹색소주병의 시작 '그린소주' 강릉합동주조는 1973년 '경월주조', 1991년 '경월'로 상호를 변경하였다가 1993년 11월 두산에 인수되면서 '두산경월'로 출범했다. 새롭게 출범한 두산경월은 서울 수도권 소주시장 공략 제품인 '그린(Green)소주'를 1994년 1월 출시한다. 당시 일반적인 소주병의 색깔은 옅은 하늘색, 투명한 흰색이 대부분이었는 데 두산경월은 '그린소주' 제품명을 각인시키는 동시에 강원도의 자연친화적이고 깨끗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컬러마케팅을 접목하며 소주 업계 최초로 녹색 소주병을 도입했다. 소비자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녹색 소주병은 기존 소주병보다 순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타 소주업체들도 병 색깔을 녹색으로 바꾼 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1977년도 도입된 정부의 자도주 보호법(1도(道), 1사(社)업체만 생산, 50% 점유율을 보호해 주는 법)이 1996년 폐지되면서 두산경월의 수도권 진출이 손쉬워졌다. 결국 독창적인 마케팅과 영업범위를 강원도과 수도권을 넘어 전국지역으로 확대하는 공격적인 영업으로 1997년에는 시장점율 20%를 넘어섰다. 특히 수도권에서는 31.1%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1993년 시장점유율이 5%에 불과했던 두산경월이 시장점유율 20%대로 성장한 것만 봐도 그 당시 '그린소주'가 얼마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린소주'는 두산경월을 전국 브랜드로 거듭나게 한 일등공신인 셈이다. 두산경월은 해외수출에도 박차를 가했다. 1995년 일본으로 '경월'소주의 수출을 시작하는 등 사업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수출규모는 꾸준히 늘어, 1997년 11월 수출 1000만 달러를 달성할 정도였다. 이후 '경월'은 특히 일본시장에서 한국소주 판매 1위를 고수하며 한국소주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2009년 롯데주류로 새롭게 출범 후 더욱 강력한 롯데그룹의 유통 인프라가 더해졌다. 롯데주류는 롯데의 숙원인 주류사업의 기반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마케팅 활동을 한층 강화하면서 '처음처럼의 전국화'를 실현하는 데 주력했다. ◆'처음처럼'으로 업계 2위 도약 1998년 두산경월, 두산백화, 오비맥주의 와인사업부문을 통합해 새롭게 두산주류BG로 통합하여 새롭게 출범한다. 통합 후 안정적인 조직문화체계를 구축한 두산주류BG는 소주사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데 집중했다. 같은해 12월 '뉴 그린'에 이어 2001년 소주 제조공정에 녹차 성분을 함유하여 소주 특유의 숙취를 크게 개선한 '산'소주를 출시했지만 '그린소주'만큼의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2006년 2월 '처음처럼'을 선보이며 소주시장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처음처럼'은 세계 최초로 알칼리환원수를 사용해 부드럽고 깨끗한 이미지를 강조하며 출시 17일 만에 누적판매량 1000만병, 6개월도 안돼 1억병 판매를 돌파, 소주시장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출시 1년만에 전국 시장점유율은 13.7%에 달했고 특히 서울은 24.4%에 이를 정도가 됐다. 출시 1년 만에 전국 2위의 소주업체로 발돋움한 것이다. ◆감성 자극 브랜드 처음처럼 제품명과 로고는 신영복 교수의 서예작품명과 서체를 그대로 사용했다. 당시 '두, 세 글자의 명사'가 일반적이던 기존 제품과 차별화할 수 있는 제품명을 고민하던 중 신영복 교수의 '처음처럼'에서 영감을 받아 제품명 사용을 요청했고 신영복 교수는 "서민의 애환을 함께하는 소주에 나의 작품이 쓰여 영광이다"며 사용을 허락했다. 처음처럼은 언제나 새 날을 맞이하듯 초심을 잊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을 소주 한잔에 담아냈다. 라벨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까치와 처음 땅을 뚫고 돋아나는 새싹을 형상화해 브랜드와 매칭시키며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신영복 교수의 서체는 감성적인 느낌을 그대로 살려 소비자에게 정감있고 친근하게 다가가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술을 마신 다음날에도 몸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뜻으로 해석돼 알칼리환원수의 특징인 숙취가 적은 점도 강조할 수 있었다. ◆물 전쟁의 시작 '처음처럼'은 출시부터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당시 소주시장의 마케팅은 제품의 원료, 첨가물을 강조하는 마케팅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처음처럼'은 알칼리환원수를 사용하면서 그 동안 언급되지 않았던 물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소주의 약 80%를 구성하는 '물'에 주목했다. 알칼리환원수를 승부수로 띄웠다. 물이 알칼리 환원수로 환원되는 과정에서 물 속의 유해성분이 제거되며 물 입자가 작고 활성수소가 풍부한 알칼리 환원수가 되고, 칼슘, 마그네슘 같은 미네랄도 풍부해져 술에 사용하면 술 맛이 더욱 부드럽고 목 넘김이 좋아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물 마케팅'이 엄청난 반응을 불러오자 경쟁 소주업체도 물 마케팅을 전개했다. 특히 20세기 건강을 중요시하는 웰빙 트렌드를 반영해 알칼리환원수의 속성을 더욱 부각시키며 부드러운 맛과 적은 숙취로 소비자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된 '처음처럼'은 목넘김이 부드럽다는 특징을 소비자에게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단기간에 잃었던 점유율을 되찾았다. ◆처음처럼 모델 변천사 처음처럼이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던 이유로 모델을 빼 놓을 수 없다. 1대 모델 이영아을 시작으로 일관되게 마케팅 전략을 강조했다. 2대 구혜선, 3대 이효리에 이어지면서 처음처럼의 인지도가 높아지게 된다. 특히 이효리는 소주 광고선호도에서 타 소주광고에 비해 월등한 차이로 1등을 기록하며 '처음처럼'이 성장하는 원동력이 됐다. 2013년부터는 부드럽고 세련된 이미지를 두루 갖춘 조인성과 고준희를 투톱으로 기존 이효리, 걸그룹 포미닛의 현아, 카라의 구하라, 씨스타의 효린 등 댄스가수들을 중심으로 '흔드는 소주'에 주력했던 마케팅 전략에 '부드러운 처음처럼'의 제품 속성까지 강조했다. 2014년부터는 폭넓은 소비자층에 사랑받는 신민아가 처음처럼 모델로 활동했으며 2016년부터는 국민 첫사랑 '수지'가 처음처럼의 부드러운 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2016년 11월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에서 20~45세 남녀 5000명을 대상으로 '소주 광고 모델'로 활동한 여자연예인 중 가장 선호하는 모델이 누구인지 설문조사한 결과 1위 이효리, 2위 신민아, 수지가 3위를 기록하며 1~3위를 모두 '처음처럼' 모델이 차지하기도 했다. ◆도수변천사 처음처럼은 소주 시장의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어 나가는 선두주자 역할을 하고 있다. 21도가 주를 이뤘던 출시 당시(2006년) '20도 처음처럼'으로 부드러운 소주를 각인시켰고 2007년 도수를 19.5도로 낮추면서 1위 업체까지 동참하는 '19.5도 소주시대'를 이끌었다. 2014년 2월에는 '처음처럼'의 제품 특징인 '부드러움'을 더욱 강조하고자 7년 만에 알코올도수를 1도 낮춘 '18도 처음처럼'을 출시해 '19도 벽'을 무너뜨렸다. 특히 2014년 12월에는 '17.5도 처음처럼'을 선보이며 국내 소주시장을 강하게 흔들었고 최근에는 '처음처럼'의 대표적인 속성인 '부드러움'을 더욱 강조함과 동시에 저도화 되고 있는 주류시장의 소비 트렌드 등에 따라 알코올도수를 17.5도에서 17도로 0.5도 내려 부드러운 소주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2018-05-31 16:55:13 박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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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 맥도날드 빅맥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 맥도날드 빅맥 맥도날드 빅맥은 미국 문화의 일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빅맥은 1967년 미국 피츠버그 맥도날드 유니언 타운에서 첫 판매 시작했다. 1년 뒤 전국적으로 출시될 당시 50억개가 팔리면서 히트 상품으로 등극했다. 맥도날드는 1988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1호점을 오픈하고 한국에 진출했다. 이후 빅맥, 후렌치 후라이, 해피밀과 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맥도날드의 메뉴를 한국 시장에 선보이는 한편, 불고기 버거, 맥스파이시 상하이 버거, 1955버거 등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는 다양한 제품을 내놓았다. 빅맥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인기 메뉴 중 하나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빅맥을 국제 통화 가치를 비교하는 수단으로 사용해 '빅맥지수'를 발행하고 있다. 빅맥의 판매가격을 기준으로 각국의 상대적 물가수준과 통화가치를 비교하는 지수다. ◆빅맥의 탄생 빅맥은 맥도날드의 상징과도 같은 햄버거다. 1967년 미국 피츠버그의 로스 타운십(Ross Township)에 위치한 맥도날드 레스토랑에서 처음 개발됐다. 해당 지역에서 맥도날드 식당을 여럿 보유했던 짐 델리가티(Jim Delligatti)는 주변 경쟁 레스토랑에 대응할 '핫'한 메뉴를 고민하고 있었다. 경쟁 레스토랑 중 한 곳이던 이트 앤 파크(Eat'n Park)에서 빅보이(Big Boy) 샌드위치가 흥행하자 델리가티는 이에 견줄만한 대형 햄버거를 고안했다. 피츠버그 내 위치한 맥도날드 유니언 타운점에서 오늘날 빅맥의 원조(소고기 패티 2장, 번 3개, 치즈 1장, 양상추, 양파, 스페셜 소스)가 처음 판매됐다. 가격은 45센트였으며, 피츠버그 지역에서 그 인기가 검증된 빅맥은 출시 1년 만에 맥도날드 전체 지점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1988 한국 진출 한국맥도날드는 지난 1988년 한국에 문을 열고 빅맥, 후렌치 후라이, 해피밀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맥도날드의 대표 메뉴를 국내 시장에 소개하는 한편, 불고기 버거, 맥스파이시 상하이 버거, 1955버거 등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춘 다양한 제품을 개발해 꾸준히 선보였다. 또한 간편하면서도 건강한 아침 메뉴인 '맥모닝'과 '행복의 나라 메뉴' 등을 제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업계 최초로 24시간 매장을 운영하고 맥드라이브(McDrive), 맥딜리버리 서비스(McDelivery Service), 모든 접점에서 최상의 고객 경험을 제공하는 미래형 매장 등 혁신적인 플랫폼을 도입해 국내 퀵서비스레스토랑(QSR) 업계의 리더로 자리매김해 왔다. 약 1만7000여명의 직원들이 근무하는 한국맥도날드는 학력, 나이, 성별, 장애 등에 차별 없는 열린 채용으로 한국 사회의 고용 창출에 일조하고 있으며, 실제 1600여명의 주부 크루, 320여명의 시니어 크루, 240여명의 장애인 크루가 근무하고 있다. ◆한국 외식업계 '최초'의 역사 지난 30년 동안 업계를 선도해 온 맥도날드는 끊임없이 '최초'의 역사를 쓰며 한국 외식시장을 개척했다. 맥도날드는 변화하는 한국 고객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발맞춘 새로운 서비스와 플랫폼들을 최초로 선보이며 국내 퀵서비스레스토랑 업계의 서비스 품질을 높이고 고객 편의를 제공했다. 1992년 부산 해운대점에 국내 최초 드라이브 스루인 '맥드라이브' 도입했다. 최근 10년 동안 맥드라이브를 이용한 차량은 총 1억7000만대로, 2007년 200만대에서 2017년 3500만대로 17배 증가했다. 2018년 현재 맥드라이브 매장 252개로 국내 최다다. 2005년 업계 최초 '24시간 매장' 영업을 시작했으며, 2006년 업계 최초 아침 메뉴 '맥모닝' 출시했다. 2007년 업계 최초 주문배달 서비스인 '맥딜리버리' 도입했다. 2016년 서울 상암DMC점에 업계 최초 '미래형 매장' 도입했다. 이곳은 '쾌적한 매장 환경, 프리미엄 버거 제공, 디지털 메뉴보드 및 디지털 키오스크 등 디지털 경험 강화, 고객 중심적인 서비스' 등을 통해 고객들에게 최상의 레스토랑 경험을 제공한다. ◆글로벌 외식업계 최대 수준의 국내 고용 창출 1988년 100여명의 직원으로 시작한 맥도날드는 현재 한국 고용 시장에서 1만7000여명의 일자리를 창출해 내고 있다. 이는 글로벌 외식업계 최대 수준이다. 최근 10년간 신규 직원 채용 매년 3.7% 증가했다. 매년 100~300명의 매장의 시간제 아르바이트 직원인 크루를 정규직 매니저로 전환 채용, 최근 10년간 총 2242명의 시간제 크루를 정규직 매니저로 전환 채용했다. 맥도날드의 고용 문화에서 가장 큰 특징은 학력, 나이, 성별, 장애 등의 차별이 없는 '열린 채용'으로 취업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도 적극적으로 고용하고 있다. 또한 맥도날드는 양성평등과 다양성을 중시하는 기업문화로 여성 인재 양성에도 앞장서고 있다. 업계 최초로 주부 채용의 날을 개최하며 결혼, 육아 등으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워킹맘들의 재취업 장려했고, 2000년대 초반부터 시니어 채용에도 앞장섰다. 현재 장애인 직원 240여명, 고용률 3.5%로 민간기업 법정 의무 고용률 2.9%를 상회한다. 여성 임원 비율 35%로 국내 500대 기업 평균 2.7%보다 높다. ◆가맹점주와 동반 성장 맥도날드는 60년이 넘는 글로벌 프랜차이즈 노하우를 바탕으로 가맹점주와 공급업체, 본사가 서로 상생하는 건강한 프랜차이즈 모델을 오랫동안 유지해오고 있다. 국내 프랜차이즈 업계에서는 최근 들어서야 로열티 제도 도입이 논의되고 있지만, 맥도날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로열티 제도를 도입해 가맹점이 수익을 올리면 본사도 수익을 올리는 선순환 구조를 갖췄다. 맥도날드는 가맹점주의 안정적인 사업 운영을 위해 장기 계약을 맺는 것은 물론 재무, 인사, 마케팅 등 다양한 영역의 컨설팅도 제공하고 있다. 맥도날드는 가맹점주와 10년 이상의 장기 계약을 바탕으로 가맹점주가 안정적인 사업 운영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같은 신뢰를 바탕으로 부산 지역의 한 오너는 최장 23년째 맥도날드 매장을 운영 중이다. ◆빅맥지수 빅맥지수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1986년부터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발표한다. 햄버거 가격으로 경제 상황을 설명한다고 해 '햄버거 경제학'이라는 뜻의 버거노믹스(Burgernomics)라고도 한다. 이 지수는 '환율은 각국 통화의 상대적 구매력을 반영한 수준으로 결정된다'는 구매력평가설, '동일 제품의 가치는 세계 어디서나 같다'는 일물일가의 법칙에 기반하여 적정환율을 산출한다. 이 환율을 빅맥환율이라고도 한다. 그 기준으로 전세계 어디서나 재료 구성이나 조리법, 크기가 표준화되어 있는 '빅맥' 햄버거 가격을 미국의 달러화로 환산해 각국의 상대적 물가수준과 통화가치를 비교한다. 이 지수가 처음 발표된 이래로 시장환율과 적정환율 사이의 차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지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지수가 낮을수록 해당 통화가 달러화보다 저평가된 것으로, 높을수록 고평가된 것으로 해석된다.

2018-05-24 10:42:38 박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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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 코카콜라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 코카콜라 시골 약국의 음료수였던 코카콜라는 1886년 처음 탄생한 뒤 현재의 세계적인 음료 브랜드로 거듭났다. 1915년 등장한 코카콜라 병은 특유의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단순한 음료수 병을 넘어 예술, 음악, 광고에 영감을 주며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됐다. 코카콜라는 콜라를 넘어 탄산음료의 대명사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음료수가 만들어지고 약 13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결같이 사랑을 받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전세계 200여개국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하루 소비량은 19억잔으로 1초당 약 2만1990잔이 판매된다. 2016년 기준으로 코카콜라의 브랜드 가치는 약 82조원이다. ◆코카콜라의 탄생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약사로 일했던 존 펨버턴은 자신의 연구실에서 여러 가지 약재들을 배합해서 이것저것 만들어 보는 게 취미였다. 코카콜라가 탄생한 그날도 연구실에서 다양한 배합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코카콜라가 만들어지던 당시의 미국은 남북 전쟁이 끝나고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그리고 전후 재건사업의 피로에 지쳐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속 생겨났다. 그 탓에 미리 조제해 두었다가 판매하는 약들이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펨버턴 박사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맞게 늘 무언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왕이면 약효도 있고 맛도 좋은 음료를 만들고 싶었다. 수차례에 걸친 실험과 연구 끝에 드디어 달콤하면서도 톡 쏘는 맛을 지닌 독특한 음료가 탄생했다. 바로 코카콜라였다. 1886년 5월 8일 펨버턴은 자신이 배합해 만든 코카콜라 원액을 연구실 근처에 위치한 제이콥스 약국으로 보냈다. 당시에는 동네 약국마다 탄산수 제조기로 알려진 '소다파운틴'이 있었다. 소다파운틴 앞은 가볍게 음료나 아이스크림을 즐기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늘 사람들로 붐볐고, 18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미국 문화를 상징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바로 이곳에서 코카콜라 원액과 탄산수를 유리잔에 함께 넣고 수저로 휘휘 저어 코카콜라가 만들어졌고, 사람들에게 판매됐다. ◆금주법 시대의 금주용 음료 코카콜라가 탄생했던 1886년은 미국 전역이 금주법으로 떠들썩했던 시기였다. 펨버턴 박사가 코카콜라를 두고 '나의 금주용 음료'라고 부른 것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였다. 좀 더 큰 성공을 원했던 그는 애틀랜타 저널에 'Delicious! Refreshing! Exhilarating! Invigorating!(맛있고, 상쾌하고, 기분이 좋아지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음료)'라는 광고도 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펨버턴 박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자신이 발명한 이 음료가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진 음료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건강 악화로 곧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1888년 숨을 거두기 전까지 펨버턴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업 지분을 넘겼다. 애틀랜타의 사업가였던 아사 캔들러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뛰어난 비즈니스 감각과 통찰력을 지닌 캔들러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지분들을 하나씩 사들이기 시작했고, 1888년 코카콜라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을 가지게 됐다. ◆독창적인 코카콜라 병 코카콜라 병은 특유의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어왔다. 앤디 워홀이 그의 그림에 코카콜라 병을 그려 넣었고, 폭스바겐은 자동차 비틀의 디자인을 매력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코카콜라 병을 광고에 활용하기도 했다. 전 세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알아보는 코카콜라 병은 경쟁업체의 모방으로부터 브랜드를 보호하기 위해 시작됐다. 코카콜라의 높은 인기와 성장에 경쟁 업체들이 코카콜라 유사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코카놀라, 마코카코, 토카콜라 등이 등장했다. 이때 코카콜라와 보틀링 파트너들은 누구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차별화된 병'을 개발해야 한다는데 뜻을 모았다. 공모전을 통해 코코아 열매의 길게 늘어진 볼록한 곡선 모양과 겉면에 그려진 흐르는 듯한 세로 선으로 디자인된 지금의 코카콜라 병이 탄생했다. 1915년 최초의 특허를 받은 살짝 통통한 모양에서 오늘날의 좀 더 슬림한 디자인으로 여러 차례 리뉴얼을 거쳐왔다. 1955년 산업 디자이너인 레이먼드 로위가 리뉴얼한 병이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 디자인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코카콜라 레드의 시작 코카콜라하면 머릿속에 선명한 이미지로 떠오르는 건 독특한 모양의 병과 함께 특유의 '빨간색'이다. 다양한 음료들이 진열된 대형 마트에서 코카콜라가 한 눈에 들어오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강렬함을 품은 컬러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빨간색이 코카콜라를 상징하는 컬러가 됐다. 코카콜라 상표 이름과 붉은색의 독특한 필기체로 적힌 'Coca-Cola' 로고를 처음으로 생각해 낸 사람은 존 펨버튼 박사의 파트너였던 프랭크 로빈슨이다. 평상시에도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흰색과 빨간색의 조합을 좋아하던 그는 흰 배경 위에 빨간색 글자로 '맛있고 상쾌한 코카콜라'라고 쓴 슬로건을 만들었다. 바로 이 슬로건이 빨간색을 코카콜라의 상징으로 만든 시작이었다. 1948년 코카콜라를 판매하는 곳을 표시하기 위해 만든 빨간색 원반 모양의 간판은 코카콜라와 빨간색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만들어주는 계기가 됐으며, 빨간색은 코카콜라를 대변하는 상징이 됐다. 코카콜라는 코카콜라, 코카콜라 제로, 코카콜라 라이트 등 다양한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지만, '빨간색' 상표는 130년이라는 시간의 장벽을 넘어 변함없이 적용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올해 코카콜라 전 제품의 패키지를 레드 컬러로 통일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통합했다. ◆가장 오래된 올림픽 파트너 코카콜라와 올림픽의 인연은 약 90년 동안 이어져 왔다. 가장 오래된 올림픽 파트너인 코카 콜라는 그동안 200개 이상의 국가 올림픽위원회들과 함께 선수들의 훈련을 지원하고, 스포츠 팬들에게 독특하면서도 즐거운 경험을 경험을 제공해왔다. 한 세기 가까이 쌓아온 코카콜라만의 올림픽 경험과 노하우는 국제올림픽위원회도 조언을 구할 정도로 탄탄하다. 코카콜라와 올림픽의 첫 인연은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대회에 출전한 미국 선수들을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코카콜라 1000박스를 제공하면서 시작됐다. 미국 선수들이 대회 기간 동안 코카콜라를 마시는 지켜본 다른 나라 선수들과 관중들은 코카콜라에대해 궁금해했고, 대회에서 미국이 1위를 차지하자 코카콜라는 더욱 주목을 받았다. 코카콜라가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첫걸음을 뗀 셈이었다. 올림픽 하면 떠오르는 것이 송화봉송이다. 이 성화봉송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축제로 거듭나게 된 것도 코카콜라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부터 올림픽 성화봉송 공식 파트너사로 참여한 코카콜라는 국제올림픽 성화봉송 주자 프로그램을 통해 외국인도 참여할 수 있는 성화봉송 릴레이를 시작했다. 이를 통해 성화봉송은 전 세계인이 즐기는 축제이자 하나의 문화로 발전했다.

2018-05-10 14:12:32 박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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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 롯데푸드 의성마늘햄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 롯데푸드 의성마늘햄 국내 분절햄 시장을 탄생시킨 롯데푸드의 '의성마늘햄'이 올해로 출시 13년을 맞았다. '분절햄'은 햄 덩어리를 사용하기 좋은 크기로 잘라 나눠 개별 포장한 햄이다. 의성마늘햄은 13년 간 분절햄 시장의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며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3일 시장조사기관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의성마늘햄은 52.5%로 점유율 1위다. 의성마늘햄은 2005년 3월 햄과 국산 마늘을 접목한 '마늘햄'이라는 제품으로 출시됐다. 이후 지역 농가의 특산물 마늘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지난 2006년 9월 의성군과의 협력으로 '의성마늘햄'이 탄생했다. 의성마늘햄은 마늘을 사용해 고기 특유의 잡냄새를 잡았고, 구웠을 때 은은하게 퍼지는 마늘 풍미로 지금까지 인기를 모으고 있다. ◆마늘을 사용해 풍미를 더한 햄 롯데푸드는 마늘햄 이전에 양파숙성햄, 황토포크햄, 탐라햄 등을 선보였지만 실패를 경험했다. 이후 삼겹살 등 돼지고기를 구워 먹을때 마늘을 자주 곁들인다는 것에 착안해 2005년 3월 돼지고기와 국산 마늘을 접목한 '마늘햄'이라는 제품을 출시했다. 롯데푸드는 처음부터 의성 마늘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마늘햄 출시 후 소비자들의 반응이 뜨겁자 롯데푸드는 제품을 고급화하고 맛과 브랜딩을 강화하기 위해 우수한 품질로 소문난 의성 특산물 마늘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롯데푸드는 2006년 9월 의성군과 MOU를 체결하고 '의성마늘햄'을 시장에 출시했다. 처음으로 마늘 넣은 햄을 만드는 만큼 제품 개발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식품에 바로 적용하기에는 마늘의 맛이 너무 맵고 냄새가 강했던 것이었다. 제품 개발 초기에는 생으로 넣는 것과 쪄서 넣는 것, 볶아서 넣는 방법을 적용했다. 맛있는 마늘향은 살리면서도 거부감이 없는 맛을 내기 위해 여러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연구원들이 연구소에서 제품개발을 위해 약 3개월을 노력했다. 이러한 연구 끝에 마늘을 한번 쪄서 투입해 특유의 아린 맛을 없애고 풍미를 살릴 수 있었다. 현재는 햄을 구웠을 때 은은한 마늘 향이 나는 최적의 함량인 1.44%의 마늘을 투입하고 있다. 의성마늘햄은 알이 굵고 맛이 좋기로 정평이 나있던 의성 마늘을 사용해 출시 직후부터 큰 인기를 모았다. 특히 의성 지역은 부식토로 덮여 있어 토양이 비옥하고, 또한 일조시간이 길고 강수량이 적어 마늘의 생육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용이 편리한 최초의 분절햄 의성마늘햄은 업계 최초로 '분절햄'이라는 개념을 만든 제품이다. '분절햄'은 햄 덩어리를 사용하기 좋은 크기로 잘라 나누어 개별 포장한 햄을 뜻한다. 의성마늘햄은 기존의 길고 두꺼운 햄 형태를 사용하기 좋게 세 덩이로 잘라 따로따로 포장해 출시하면서 최초로 분절햄 시장을 열었다. 기존의 햄은 김밥 속재료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어른 팔뚝 정도 크기의 1㎏ 사각형 덩어리가 표준 크기였다. 이렇게 큰 용량의 햄은 일단 포장을 뜯고 나면 공기가 유입되기 때문에 신선한 보관이 힘들고 사용에도 어려움이 따랐다. 더구나 과거에 비해 가족 구성원수가 감소하면서 한번에 다 먹지 못하는 커다란 햄의 크기는 많은 소비자들에게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의성마늘햄은 큰 덩어리의 햄을 셋으로 잘라 개별 포장한 형태로 출시하여, 필요한 양만큼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으면서도 위생적으로 보관이 가능한 장점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편리한 제품을 찾던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다. 의성마늘햄의 큰 인기 이후 육가공 시장에서는 소용량 트렌드가 나타나게 되었다. 여러 회사에서 잇달아 분절햄 및 소포장 제품을 출시한 것이다. 현재는 마트 등의 유통점에서 작은 용량으로 개별 포장된 육가공 제품을 흔하게 찾아 볼 수 있다. 의성마늘햄은 육가공 시장의 소용량 트렌드를 선도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의성마늘햄은 론칭 1년 만에 연매출 100억원을 돌파한 후 지난해 54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10년 넘게 분절햄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롯데푸드, 의성마늘햄 브랜드 더욱 확대키로 의성마늘햄 브랜드는 2007년 '의성마늘 프랑크'와 '의성마늘 비엔나' 등 소시지 제품으로 확대됐고, 최근에는 의성마늘 베이컨과 슬라이스햄, 김밥속햄까지 출시되는 등 지속적인 브랜드 확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의성마늘햄 브랜드 매출은 출시 직후인 2006년에 연매출 100억원을 돌파한 이래 2010년 380억원, 2015년 430억원, 2017년 540억원을 기록하는 등 계속해서 확대 중이다. 의성마늘햄은 분절햄 시장에서 10년 넘게 점유율 1위를 지키며 인기를 모으고 있다. 롯데푸드는 올해 의성군과의 지역 상생을 더욱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선수 5명 중 4명이 의성 출신인 국가대표 여자 컬링팀(감독 김민정, 선수 김은정·김영미·김선영·김경애·김초희)을 의성마늘햄 CF 모델로 발탁한 데 이어 2년간 공식 후원한다. 또한 이번 모델 발탁을 시작으로 올해 의성마늘 제품 라인업을 추가로 확대할 계획이다. 의성마늘햄 구매 고객을 대상으로 한 경품 이벤트도 진행한다. 롯데푸드는 5월 10일까지 의성마늘햄, 의성마늘 프랑크, 의성마늘 비엔나 등 의성마늘햄 브랜드 제품을 구매한 고객 중 추첨을 통해 황금마늘 총 100돈을 비롯한 다양한 경품을 증정한다. 구매 영수증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면 응모할 수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롯데푸드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지역 상생 제품 '의성마늘햄' 롯데푸드가 의성군과 협력해 출시한 의성마늘햄은 식품업계의 대표적인 지역 상생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롯데푸드는 지역 특산물인 의성마늘을 활용해 제품의 맛과 신뢰도를 높였고, 의성군은 지역 특산물을 전국에 널리 알리는 동시에 안정적인 판로도 확보했다. 회사와 지역이 동반 성장할 수 있는 '상생 전략'을 펼친 것이다. 의성마늘햄 브랜드 제품의 생산을 위해 롯데푸드는 매년 약 100t의 마늘을 의성 농가에서 수매하고 있다. 특히 이 같은 의성마늘햄의 성공은 소비자들이 의성마늘을 국내 대표 마늘로 인식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롯데푸드는 단순히 제품 출시에 그치지 않고 제품을 활용한 지역 홍보에도 앞장서고 있다. 롯데푸드는 2010년부터는 매년 의성마늘햄 캠프를 열어 의성군의 지역 명소를 알리고, 의성 장학회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지속적인 상생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롯데푸드와 의성군의 협력은 2015년 농림축산식품부와 대한상공회의소로부터 '농업과 기업의 상생 협력 우수사례'로 선정될 만큼 대표적인 CSV(공유가치창출) 사례로 평가 받는다.

2018-05-03 15:51:36 박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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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오뚜기 오뚜기카레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오뚜기 오뚜기카레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황금빛의 카레는 건강은 물론 맛도 챙긴다는 미식가들의 추천 메뉴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카레 특유의 노란색은 '강황'에서 나오는 천연색으로 강황의 노란 색소에 있는 성분에 노화방지와 치매예방은 물론 항암효과까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웰빙 음식으로 주목 받고 있다. 이같은 기능성뿐 만 아니라, 카레 요리는 갖은 양념이 없어도 가정에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요리다. 그래서 카레는 어쩌다 한 번 먹는 별식 이 아닌 가족의 건강을 위해 사시사철 챙겨먹는 메인 요리로 사랑을 받고 있다. 오뚜기 설립과 함께 탄생한 오뚜기카레는 건강한 맛과 향으로 국내 1등 카레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분말 형태로 시작해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레토르트 형태로 진화했다. ◆카레 = 오뚜기 '카레'하면 우리는'오뚜기카레'를 떠올린다. 특정업체의 제품명이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오뚜기라는 회사가 카레라는 식품을 우리의 머리 속에 깊이 심어놓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건강한 맛과 향으로 국내 1등 카레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오뚜기 카레다. 국내에 카레가 소개된 것은 1940년대다. 당시 서양식 카레와 일본산 카레를 들여왔지만 지금처럼 대중화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카레가 대중화된 것은 1970년대 오뚜기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故 함태호 오뚜기 명예회장은 1960년대 국민에게 좋은 품질과 고영양 식품을 공급하고자 풍림상사를 설립했다. 이후 1973년 오뚜기 식품공업주식회사로 1980년 오뚜기 식품주식회사로 사명을 바꾼다. 당시 함 명예회장의 머릿속에는 '식품보국'이라는 단어가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가난한 땅에서도 훌륭한 먹을거리를 우리 국민에게 어떻게 하면 선보일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함 명예회장은 국민들의 주식인 밥 위에 올려 먹을 수 있는 카레가 인기를 끌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 연구팀은 카레 가루의 통째 수입보다는 강황과 고추, 후추, 고수 등 원재료를 섞어 직접 카레 가루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 일본의 카레 업체들로부터 약 20가지 재료를 알아 낸 연구팀은 황금비율을 완성하는 데 집중했다. 오뚜기카레 출시 초기에는 소비자들은 카레를 생소하게 생각했지만 매콤한 맛을 즐기는 국민들의 기호와 맞아 대중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카레가 건강식품으로 알려지면서 오뚜기카레는 소비자들에게 더욱 많은 관심을 받게 됐다. ◆분말에서 레토르트…건강까지 생각하다 최초 분말 형태로 시작한 오뚜기카레는 1981년 3월 '3분요리'라는 브랜드로 출시됐다. 오뚜기 3분요리 시리즈는 국내 최초의 즉석식품으로 국내 최초의 HMR(가정간편식)이라 할 수 있다. 끓는물에 데우기만 하면 즉석에서 언제든지 맛볼 수 있다. 소비자들의 다양한 취향에 맞게 순한맛, 매운맛, 약간매운맛 으로 차별화했다. 2004년 건강에 좋은 강황의 함량을 50% 이상 증량(오뚜기 바몬드카레 약간매운맛 대비)하고, 베타글루칸 및 식이섬유가 풍부한 귀리 등을 원료로 사용한 오뚜기의 백세카레가 출시되면서 맛뿐 만 아니라 건강도 생각하는 카레로 더욱 진화하게 되었다. 이후 소비자들이 가정에서 더욱 간편하게 카레를 조리할 수 있도록 물에 더 잘 녹고 더욱 새로워진 과립형 카레가 2009년 4월에 오뚜기에 의해 국내 최초로 탄생된다. 수 많은 실험과 시행착오 끝에 탄생한 오뚜기의 과립형 카레는 신기술을 적용하여 기존의 카레 조리 방식처럼 따로 물에 갠 다음 끓여야 하는 조리의 번거로움이 없이 조리 시 바로 카레를 넣고 끓여도 덩어리가 지지 않고 잘 풀어지기 때문에 조리하기가 훨씬 편하다. 지난 2012년에는 발효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긍정적 인식을 반영/접목한 명품카레 '발효강황카레'를 출시하였다. 뒤이어 지난 2014년 5월에는 세계 5대 건강식품으로 꼽히는 렌틸콩을 주원료로 한 '3분 렌틸콩카레'를 내놓았고, 점점 다양해지는 대중의 카레 입맛에 맞춰 세계의 카레로 꼽히는 인도와 태국 스타일의 '3분 인도카레 마크니', '3분 태국카레소스 그린'과 분말카레인 '맛있는 허니망고 카레'와 '맛있는 버터치킨 카레'도 출시했다. 최근에는 3일 숙성소스와 다양한 향신료를 직접 갈아 숙성한 카레분을 사용한'오뚜기 3일 숙성카레'까지 나오면서 카레에 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오뚜기 3일 숙성카레'는 쇠고기와 과일, 사골을 3일간 정성껏 숙성시킨 소스와 은은한 향이 잘 조화된 숙성 카레분을 이용한 제품으로 더욱 진하고 부드러운 카레 맛을 즐길 수 있다. 3일 이라는 시간은 숙성소스가 카레분과 조화로운 맛을 내고, 국내 소비자들의 입맛을 고려하여 찾아낸 시간이며, 49년 카레 노하우가 축약된 향신료와 허브류의 조화로운 풍미가 특징이다. ◆끊임없는 연구과 마케팅 오뚜기의 역사와 함께 시작한 오뚜기 카레는 품질 향상을 위한 끊임없는 연구개발과 앞서가는 마케팅으로 출시 49주년째를 맞는 지금도 국내 1위의 자리를 당당히 지키고 있다. 특히 카레와 관련한 다양한 마케팅 행사(엄마와 아이가 함께하는 카레요리 시연회, 카레 심포지엄 개최 등)를 통해 카레 알리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특히 카레 국제심포지엄은 오뚜기의 후원으로 지난 2008년부터 격년 마다 개최되고 있다. 국내외 카레 및 향신료 연구의 지적 교류의 장으로서 자리매김했다. 오는 25일 열리는 '제6회 카레 및 향신료 국제심포지엄'에서는 국내외를 대표하는 전문가들에 의해 카레 원료인 강황의 다양한 생리활성효과와 활용에 대한 연구성과가 발표된다. 일상식이자 건강식품으로 주목 받고 있는 '카레'에 대한 다양한 연구 발표를 통하여 건강한 식문화 정착에 기여하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 오뚜기는 카레케챂떡볶이, 카레볶음밥, 카레스파게티 등 몸에 좋은 카레를 활용하여 가정에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요리를 홈페이지와 이색카레요리 책자를 통해 적극 홍보하고 있다. 또한 소비자들이 건강한 식재료'카레'를 보다 간편한 방법으로 더욱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카레 관련 정보와 레시피, 이벤트 소식을 담은'Enjoy 카레'사이트를 오픈했다. 오뚜기 관계자는 "국민 브랜드로서의 믿음, 영양과 간편함을 동시에 고려한 연구개발 등이 오뚜기카레 장수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2018-04-19 09:58:34 박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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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동원F&B 동원참치

[메가 히트 상품 탄샌스토리]동원F&B 동원참치 참치하면 누구나 먼저 떠 올리는 제품이 있다. 바로 1982년 12월 국내 첫 출시 이후 36년 동안 한번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은 동원참치다. 한 해 약 2억캔 이상 판매된 신기록도 같고 있다. 지난 2014년에는 업계 최초로 총 누적판매량 50억캔을 돌파했다. 동원참치 50억캔은 일렬로 늘어 놓으면 지구를 약 10바퀴 반(약 41만5000㎞) 돌 수 있는 거리다. 수직으로 쌓아 올리면 에베레스트 산(8848m)의 약 20배 높이가 되는 양이다. 동원참치는 현재 단일제품으로 매년 4500억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하며 국민식품으로 자리하고 있다. ◆국내 최초 참치캔 1980년대 초 미국에서는 참치캔이 보편화되어 있었지만, 국내에는 수산캔이라 하면 꽁치캔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동원 김재철 회장은 고단백 저칼로리로 DHA, 오메가3, 셀레늄 등 영양소가 풍부한 참치를 우리나라 국민들의 밥상에 올리고 싶었지만, 당시 참치캔은 국민소득 2000불 이하인 나라에서는 팔리지 않는 고급식품이자, 선진국형 식품이었다. 우리나라는 1981년 1인당 국민소득이 1200~1300달러를 넘나들었고, 김 회장은 곧 국민소득 2000달러 시대가 되면 참치캔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한식 식문화에 어울릴 수 있도록 유지가 들어간 살코기참치캔 개발에 나섰고, 1982년 면실유를 담은 살코기참치캔을 출시했다. 이것이 바로 국내 최초 참치캔인 '동원참치 살코기캔'이다. 1969년 창업 후 이전까지, 원양에서 참치를 잡아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에 참치를 수출하는 사업을 운영하던 동원은, 1982년 참치캔 출시를 통해 종합식품회사로서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후 금융업, 물류업, 종합포장재산업 등 생활산업기업으로 사업을 확장하게 됐다. ◆참치캔은 선진국형 식품 동원산업으로서는 당시 국내 소비자들에게 생소하던 참치캔을 알리는 것이 중요했다. 이 무렵 통조림시장에서 알려진 제품이라고는 햄 통조림, 꽁치 통조림 정도였다. 이에 동원산업은 소비자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등 종합적인 마케팅전략을 세우는 한편 참치캔을 알리는 광고도 시작했다. 동원산업은 제품 출시 초기 소비자들의 마인드 포지셔닝(Mind Positioning)의 성패가 향후 마케팅의 성공 여부를 좌우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선 참치가 고급 어류인 점에 착안하여 참치캔을 '고급식품', '선진국형 식품'으로 포지셔닝하고 1차 소구 대상을 중, 상류층으로 잡았다. 실제로 당시에는 국민 소득 대비 참치 원어가격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참치캔 역시 한 캔에 약 1000원으로 비싼 식품이었다. 브랜드 초기에는 '동원참치'였으나 우리나라 사람의 식습관이 닭고기보다는 쇠고기를 더 선호하기 때문에 참치의 이미지를 좀더 고급스럽게해야 한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살코기캔'을 덧붙이게 됐다. 아울러 포장면에서도 기존의 통조림제품들과 차이를 두기 위해 거대한 참치가 바닷물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디자인을 채택하였으며 그 강력한 이미지는 TV 론칭 광고에도 본격적으로 활용되기에 이르렀다. 동원산업은 1984년 추석명절부터 참치캔 선물세트를 업계 최초로 개발하여 판매했다. 당시 고급식품이었던 만큼, 선물용으로 제격이었다. 이 해 추석에만 30만세트 이상이 팔리며 선물세트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백화점, 대형마트 등에서 명절 선물세트로 없어서는 안될 품목으로 자리잡았다. 동원참치의 선물세트 판매는, 현재 시장 점유율 70%를 상회하며 한 해 2억캔 이상 판매되는 대표 국민식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0년대 편의식품으로 서울올림픽과 아시안게임 개최 등을 거치며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고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동원은 국민소득의 증가와 함께 시장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기존 살코기참치 이외에 야채참치, 고추참치 등 한국인 입맛에 맞는 다양한 가미참치캔을 개발해 선보이기 시작했다. 국민소득의 증가 및 제품의 다양화와 함께 1980년대까지만 해도 고급식품이었던 참치캔은, 편의식품으로 자리하게 된다. 동원 역시 1986년, 경상남도 창원에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참치캔 제조공장을 준공하며,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이렇게 참치캔이 편의식품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1990년대 이후 참치캔은 학생들의 단골 도시락반찬으로 등장했다. 당시 고학력 사회로 접어들며 맞벌이 부부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참치캔은 엄마들에게는 준비하기 간편하면서도 학생들에게는 부족하지 않은 도시락 반찬이었다. 또한 국민소득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며 여행, 바캉스 등 여가활동도 늘어나 참치캔을 비롯한 편의식품 시장은 계속적으로 성장했다. ◆2000년대 '건강식품'으로 제 2전성기 2000년대 이전까지 참치캔은 언제 어디서나 쉽게 먹을 수 있는 '편의식품'의 성격이 강했다. 도시락 반찬이나 여행 필수품으로 참치가 빠질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편의 식품의 다양화로 굳건했던 동원참치캔의 입지가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 동원F&B에서 펼친 전략이 바로 참치의 브랜드 가치 혁신이다. 업계 1위로서, 타사와 경쟁하기 보다는 참치 자체의 가치를 향상시켜 시장 전체를 성장을 꾀한 것이다. 가치혁신의 주요 컨셉은 '건강식품'으로서의 참치를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참치는 고단백 저지방 수산물로 칼슘, DHA, EPA, 단백질, 오메가6, 비타민 등 인체에 유익한 영양성분이 들어있는 건강식품이다. 참치에 많은 오메가-3 지방산이 치매 예방과 고혈압 등 성인병 예방에 좋다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에 미 FDA에서는 임산부, 수유여성, 어린이 등은 영양이 풍부한 참치캔을 일주일에 230g~340g씩 꾸준히 먹어야 좋다는 내용의 '건강권고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건강을 지향하는 웰빙 트렌드와 맞물려 참치의 '제 2전성기'를 만들어냈다. 2003년 2000억을 넘어서면서부터 정체를 겪고 있던 연간 매출액이 지난 2011년 처음 3000억을 돌파했다. ◆지속적인 소비자 트렌드 반영 소비자의 입맛은 다양한 요소에 따라 변화한다. 당시 식생활 트렌드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며, 문화 트렌드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몸짱 열풍이 거셀 때는 건강식을 찾고, 쿡방이 대세일 경우에는 요리에 활용하기 좋은 제품을 원한다. 동원은 참치캔 시장을 선도하는 브랜드로서, 이러한 트렌드에 맞춰 기존 참치캔의 맛에 변화를 주기도 하며, 기존에 없던 새로운 제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지난 2010년 출시한 '델큐브참치'는 시장의 트렌드를 내다보고 출시한 새로운 유형의 참치캔이었다. 델큐브참치는 말 그대로 동원의 독자적 기술로 탄생한 큐브형 참치로서, 모양을 유지한 채 요리할 수 있는 참치 제품이다. 지난해 8월에는 HMR 트렌드를 반영해 밥에 바로 먹는 참치캔 '더참치' 3종(핫치폴레·소이갈릭·고소한쌈)을 출시했다. '더참치'는 기존 요리에 주로 활용되던 살코기참치와는 달리, 밥에 바로 먹는 살코기참치캔으로 참치의 영양에 맛을 더한 제품이다. 동원F&B 참치캔 마케팅 담당자와 담당연구원은 지난해부터 약 1년 반 동안 수백 차례의 테스트를 거치며, 밥에 바로 먹는 살코기참치를 만드는 데 몰두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이번에 출시한 신제품 '더참치' 3종이다. 'LOW DRAIN'이라는 숙성공법을 새롭게 개발해 유지 함량을 50% 이상 줄였다. 이를 통해 유지가 없어도 소스가 살코기에 촉촉하게 스며들어 퍽퍽하지 않고, 밥에 바로 먹었을 때 최적의 맛을 구현해낼 수 있었다. 또한 밥과 잘 어울리는 특제소스를 담아 밥에 바로 먹기 최적의 맛과 식감을 구현해냈다. 동원F&B 관계자는 "동원참치의 브랜드 이미지에 건강함과 함께 활기, 젊음을 부여하기 위해 소비자와 끊임없는 소통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8-04-15 16:18:27 박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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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대상 종가집 포장김치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대상 종가집 포장김치 국내 포장김치 시장은 2015년 1482억원, 2016년 1816억원, 2017년 2098억원 규모로 최근 3년 새 40% 이상 성장했다. CJ제일제당과 신세계푸드 등 식품업체 뿐만 아니라 호텔, 유통업체들도 포장김치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고, 치열한 경쟁이 이어지고 있다. 국내 포장김치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김치 대표브랜드 종가집 김치의 기술력이 부각되고 있다. 후발업체들의 마케팅 공세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각 업체들이 내세우고 있는 김치 제품의 특징들이 소개되면서 오히려 종가집 김치의 차별화된 30년 발효기술력이 주목받게 된 것. 대상 종가집은 국내 최초 포장김치라는 사명감으로 오직 김치 연구와 발효기술을 통해 시장을 선도하고 충성고객을 더욱 늘리겠다는 전략이다. ◆포장김치 1호, 31년 김치 역사 김치를 집에서 담가먹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 전통음식인 김치의 세계화를 꿈꾸며 등장한 제품이 있다. 세계인도 맛볼 수 있는 김치를 제공하기 위해 선보인 국내 최초의 포장김치 브랜드 '종가집'은 간편하게 김치를 먹을 수 있다는 이점에,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대표적인 김치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80년대 정부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음식인 김치를 알리기 위해 상품화를 추진했다. 이를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 먹어도 다르지 않는 표준화된 맛과 바다 건너 해외로 수출하기 위해 시간이 지나도 맛이 변하지 않도록 하는 특별함이 필요했다. 이에 인간문화재 38호이자 조선 궁중음식 전수자인 고 황혜성 고문 등 김치 전문가들로부터 조언을 받아 표준화된 조리법을 만들었으며, 김치 포장에 대한 연구를 위해 전문가들이 뭉쳤다. 대대로 전해 내려온 손맛을 표준화한다는 의미에서 브랜드를 '종가집'으로 정했으며, 브랜드 로고에 기와지붕을 넣은 지금의 종가집이 탄생했다. 지난해에는 론칭 30주년을 맞아 '맛의 중심, 종가집'을 슬로건으로 한 '한식 전문브랜드'로 재탄생했다. 종가집 브랜드의 전통적 이미지에 세련되고 모던한 이미지를 더하고, 더욱 다양한 한식 요리로 사업영역을 확장해, 글로벌 한식문화를 선도해나갈 방침이다. ◆포장김치 대중화 주역, 포장기술 특허 김치를 상품화하는 데 가장 큰 난관은 포장이었다. 발효와 숙성 과정에서 '숨을 쉬는' 김치의 특성 때문에 상품화 초기에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도 겪었다. 김치가 발효되는 과정에 탄산가스가 발생하는 데, 진공 포장할 경우 포장재가 부풀어 오르는 경우가 생겼던 것이다. '폭'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김치 국물이 주변에 튀는 정도의 가벼운 수준이었지만, 포장 김치의 유통 기간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개선이 절실했다. 더욱이 해외시장에 수출하는 데엔 오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김치의 세계화'를 추진했던 종가집에 있어서 김치 발효과정에서 배출되는 탄산가스 제거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종가집은 가스 제거 문제 해결에 매달렸고, 이듬해인 1989년 탄산가스를 붙잡아두는 '가스흡수제'를 김치 포장 안에 넣는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김치의 고유한 맛과 품질에는 영향이 없으면서도 포장형태를 그대로 유지해 상품성을 높이고, 유통과정에서의 파손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신기술이었다. 종가집은 이듬해 특허를 출원했고, 이 기술을 보완해 1991년 업계 최초로 KS마크를 획득, 1995년 전통식품인증마크를 획득하며 세계일류화상품으로 선정됐다. ◆맛·건강기능성·김치유산균 대상 종가집은 '김치연구소'를 중심으로 2001년부터 김치유산균을 분리·배양하는 연구활동을 진행해오고 있다. 유산균은 김치 맛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데, 이 때문에 김치 맛을 좋게 하거나 이를 잘 유지할 수 있는 유산균을 직접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김치유산균을 추출해 이를 김치 제조에 응용하는 기술은 말처럼 쉬운 공정이 아니다. 추출과 적용 기술을 개발해 실제 상품을 생산하기까지 3년 이상이 소요되는 긴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2005년에 배양에 성공한 '류코노스톡 DRC0211'이라는 김치 유산균을 통해 집에서 담근 김장김치의 맛을 구현해낸데 의미가 크다. 일반적으로 집에서 담가 땅 속에서 숙성시키는 겨울 김장김치는 시원하고 깊은 맛을 내는데 문제는 이 유산균이 갑자기 줄어들면서 급격하게 시어 맛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여기에 착안해 가장 맛이 좋은 김치에서 500여 종의 유산균을 분리해, 가장 좋은 맛을 내면서도 빨리 시지 않는 독특한 유산균을 찾아내 상품화한 것으로 '종가집 집김치'는 이 유산균을 최초로 접목한 김치 상품이다. 2011년에 선보인 100% 국산 식물성 원료인 배추를 발효해 만든 '식물성 유산균 발효액 ENT'는 김치유산균의 활용 지평을 넓혔다는 평을 듣는다. ◆세계 40여개 국가 진출 국내 포장김치 점유율 1위 브랜드인 종가집 김치는 해외에서도 독보적인 위상을 자랑한다. 일본 수출 물량 90%, 홍콩·대만·싱가포르 등 아시아권에 수출되는 물량 80% 이상을 현지인이 소비하고 있다. 이같은 인기로 종가집 김치는 현재 미주와 유럽, 대만과 홍콩 등 아시아를 포함한 세계 40여 개 국가에 진출해있다. 과거 일본 시장에 수출이 집중됐지만 최근에는 미국과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나 남미 등 원거리 지역으로까지 수출선을 다변화하고 있다. 특히 가장 먼저 진출했던 '일본'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대상 종가집은 민간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운영하고 있는 '김치연구소'를 중심으로 김치유산균 연구를 비롯해 다채로운 제품 개발과 포장 및 유통보관 등 기술 혁신을 이뤄냈다. 이후 캐나다, 미국 등 꾸준히 세계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철저한 현지화전략으로 서양인의 기호에 맞게 김치를 활용한 다양한 요리법을 개발해 현지 요리와의 조화를 모색했다. 이러한 노력은 현지 유명 요리연구가들의 이목을 끄는 데 성공했고 발효 식품으로서 김치가 지닌 효능과 식물성 섬유질 함유를 강조해 해외에서도 '웰빙' 식품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북미지역에서의 시장 확장세가 눈에 띈다. 2012년에는 종가집 김치가 캐나다의 대형마트 세이프웨이(Safeway)와 입점 계약을 맺어 약 200개의 매장과 레스토랑 등에서 '종가집 맛김치'를 판매할 수 있게 됐다 2013년 3월에는 미국 최대 유통업체인 코스트코에도 입성했다. 이를 통해 로스엔젤레스 등 6개 지역 등으로 수출을 확대했다. ◆코셔와 할랄까지 국내 업계 최초로 북미와 유럽에서 식품안전 신뢰도 표준으로 여겨지는 '코셔'(Kosher)인증마크를 획득하며 김치 수출에 힘을 더 했다. 코셔마크(유대인 정결식품인증)는 위생과 건강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식사에 관한 유대 율법이 담긴 것으로 최종 제품에 국한된 인증이 아니라 원재료부터 가공절차에 이르는 식품 제조 전체공정에 부여된다. 향후 종가집은 유대인, 무슬림 뿐 아니라 채식주의자, 웰빙을 지향하는 약 2500억 달러 규모의 코셔 시장에 김치 제품을 수출할 예정이다. 최근 18억명에 달하는 전 세계 무슬림(이슬람교 신자)이 먹는 '할랄(Halal)' 식품 시장도 한국 기업들의 새로운 수출 무대로 주목받고 있다. 대상 역시 2009년 종가집 김치의 할랄인증을 받아 현지인들에게 한국 전통의 맛을 보여주고 있다. 2009년에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 2010년부터는 아랍에미리트에 수출을 시작했으며 맛김치, 포기김치, 열무김치, 총각김치 총 4종이 할랄인증을 받아 현지인들에게 한국 전통의 매운 맛을 보여주고 있다.

2018-03-29 14:24:05 박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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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롯데제과 가나초콜릿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롯데제과 가나초콜릿 고대 마야, 아즈텍 족은 카카오열매의 신선하고 새콤한 섬유질만 먹고, 쓴맛의 씨는 버렸다. 시간이 지나 카카오열매 씨를 이용한 음료를 만들었는 데, 이 음료가 영양가가 높고 원기회복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황제에게만 바치는 음료가 됐다. 이처럼 처음 초콜릿은 마시는 형태였다. 이후 유럽을 통해 전세계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지금의 초콜릿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유럽에 알려진 이후에도 200여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1679년 초콜릿파우더가 첫 선을 보인 후, 1828년 네덜란드인 반 호텐이 현재 우리가 먹는 초콜릿 형태로 만들었다. 1876년 스위스인 다니엘 피터스가 쓴맛을 덜어주는 밀크 초콜릿을 개발하면서 초콜릿 제조업은 더욱 발전했다. 우리나가는 1968년 해태제과와 동양제과가 초콜릿 제품을 선보였지만 품질은 선진국 제품과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1975년 롯데제과가 스위스의 초콜릿 기술자를 영입하고 가나초콜릿을 출시하면서 시장의 판도를 흔들었다. ◆롯데 가나초콜릿의 탄생 우리나라에 초콜릿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연합군이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게 됨에 따라 그들의 보급품에서 흘러나오면서부터다. 초콜릿이 국내 제과업계에서 처음으로 생산된 해는 1967년이다. 그때로서는 원료의 수급이 원활하지 못했고 기술 및 생산 설비도 저급한 실정이어서 활발한 보급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는 주로 미제 초콜릿이 한정된 소비층의 기호품으로만 애용되는 정도였는 데 그 뒤로 급격한 경제 성장이 가져다 준 식생활의 개선과 국내 기술 향상으로 초콜릿이 차츰 간식용 및 고칼로리의 영양식품으로 소비가 보편화 되었고, 갈수록 더 수요가 늘어났다. 롯데제과가 가나초콜릿을 생산하기 전인 1974년의 국내 초콜릿 시장은 해태제과와 동양제과가 약 18억원의 시장을 놓고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이 매출 규모는 제과업계에서 볼 때 껌 다음으로 큰 시장이었다. 롯데제과는 1974년 7월 이사회를 통해 서울 영등포 공장 옆 부지에 초콜릿 공장을 신축하기로 하고 일본 롯데의 초콜릿 제조 설비를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9월 기공식을 갖고 12월부터 약 20만달러에 이르는 제조 설비를 들여오기 시작했으며 이듬해 2월 준공식을 가졌다. 초콜릿 생산 설비를 들여옴에 따라 그에 맞는 기술 지원이 필요했다. 롯데제과는 당시 우리의 미각에는 스위스의 부드러운 초콜릿이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초콜릿 제조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스위스의 세계적인 초콜릿 기술자를 초빙하여 기술 자문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1975년 2월 공장 준공과 더불어 롯데제과의 첫 초콜릿 제품인 '가나밀크쵸코렡'과 '가나마일드쿄초코렡' 이 선을 보이게 됐다. 이후 가나초콜릿은 지속적인 브랜드 확장을 해왔다. 초콜릿에 공기를 주입하여 폭신폭신한 '가나 에어라이트'와 쫄깃한 식감이 특징인 '가나 크리미츄', 카카오버터 함량을 100%로 높인 '가나 플러스 100' 등의 신제품을 비롯해 '가나 초코바' 등 현재 총 10여 종의 제품이 판매되고 있다.. ◆국민 초콜릿으로 거듭나다 초콜릿 가나(Ghana)는 최근 누적 매출액 1조원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정확히는 1조 50억원. 이 매출 실적을 개수로 환산하면 약 57억갑에 달한다. 제품 출시이래 매초마다 4개 이상 팔린 셈이다. 이를 일렬로 늘어놓으면 지구 둘레를 약 21바퀴 돌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1975년 2월 출시된 가나 초콜릿은 43년간 초콜릿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해온 국내 최장수 초콜릿이다. 롯데제과는 가나초콜릿이 오랫동안 사랑 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우수한 품질과 적극적인 마케팅에 있다고 말한다. 가나 초콜릿은 70년대 당시로서는 기존 제품들과 차원이 다른, 획기적인 품질의 제품이었다. 초콜릿 선진국인 스위스 등 해외의 우수 인력를 직접 초빙하여 기술 자문을 받고 거액의 투자비용을 들여 최첨단 생산 설비를 구축했다. 원료를 미립자 형태로 갈아서 사용하는 '마이크로 그라인드(Micro grind)' 공법을 사용하거나 높은 함량의 카카오 버터를 사용하는 등 당시로서는 세계적인 수준의 초콜릿 제조 공법이 적용되었다. 아프리카 가나산 카카오빈(Cacao Bean)을 원물 그대로 들여와 국내에서 가공하여 생산하는 시스템은 현재로서도 국내에서 유일한 우수 생산 시스템이다. 롯데제과는 제품 발매 당시 '100년 전통의 스위스 초콜릿 맛을 구대로 구현한 초콜릿' 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신제품을 알리기 위해 대대적인 프로모션을 전개했다. 전국 규모의 발매 기념 행사를 열고 기념품과 경품을 제공했다. 방송사 퀴즈 이벤트를 통해 사은품을 주기도 했다. 이에 가나초콜릿은 소비자들로부터 즉각적인 호응을 얻으며 출시 첫해 31.4%, 이듬해 47.3%라는 경이적인 점유율을 기록했다. ◆스타 등용문 '가나초콜릿 CF' 가나 초콜릿의 인기 비결 중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광고다. 가나초콜릿은 적극적인 TV 광고를 시행하며 "가나와 함께라면 고독마저 감미롭다" 라는 유명한 카피를 사용,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광고를 촬영한 모델들마다 이후 일약 스타덤에 올라, 한때 가나초콜릿 광고를 스타의 등용문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원미경, 채시라, 이미연, 최진실, 이정재, 이본, 배용준, 민효린, 혜리, 박보검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가나 광고를 거쳐 갔다. 최근 가나 초콜릿은 인기 아이돌 그룹 워너원이 광고 모델로 나서, 모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광고에서는 워너원 11명의 멤버들이 각자 이미지에 맞는 멘트로 가나초콜릿을 통해 보는 이에게 고백하는 모습을 1인칭 시점으로 보여준다. 광고가 나오자 브랜드 사이트에 10만명 이상의 방문자가 몰리며 서버가 다운될 정도도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현재까지 SNS 상의 워너원 광고 조회수가 700만회를 훌쩍 넘었고 판매량이 급증했다. 워너원이 모델로 활약한 지난 2개월간의 제품 매출이 전년보다 50% 이상 증가했다. 초콜릿의 주 구매층이 10대와 20대 여성층으로 워너원의 팬 층과 같아 광고 효과가 극대화 된 것이다. 판 형태의 초콜릿 2종으로 시작한 가나초콜릿은 이후 지속적인 브랜드 확장을 해왔다. 초콜릿에 공기를 주입하여 폭신폭신한 '가나 에어라이트'와 쫄깃한 식감이 특징인 '가나 크리미츄', 카카오버터 함량을 100%로 높인 '가나 플러스 100' 등의 신제품을 비롯해 '가나 초코바' 등 다양한 형태의 제품이 판매되고 있다. 지속적인 브랜드 확장과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가나초콜릿의 매출은 꾸준한 상승세에 있다. 2014년에는 560억원이었던 매출이 15년에는 580억원, 작년에는 620억원에 이르렀다. 올해는 '워너원 효과'가 나타나고 있고 신제품들의 반응이 좋아 7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롯데제과 관계자는 "가나초콜릿 출시 첫 해 매출은 4억원이었으며, 작년 매출은 620억원에 이르렀다"며 "43년만에 155배에 달하는 매출을 거둔 것이다. 올해는 신제품들의 반응이 좋고 광고 모델인 '워너원 효과'가 나타나고 있어 7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2018-03-21 18:04:27 박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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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동서식품 맥심 모카골드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동서식품 맥심 모카골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노란 믹스커피, 맥심 모카골드. 맥심 모카골드는 동서식품의 50년 노하우가 총망라된 역작으로 커피믹스의 대명사로 통한다. 동서식품의 맥심 모카골드가 출시 이후 지금까지 커피 믹스 판매 1위 자리를 지킬 수 있던 비결은 바로, 누가 만들어도 최고의 커피 맛을 선사하는 황금 비율에 있다. 동서식품은 반세기 가까운 기술력을 바탕으로 커피, 설탕, 크리머의 황금 비율은 물론, 최상급으로 엄선한 원두를 최적의 비율로 블렌딩해 언제 어디서나 누가 타도 맛있는 맛을 만들어냈다. 동서식품의 맥심 모카골드가 장수브랜드로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가장 큰 이유다. ◆'국민커피' 동서식품 커피믹스 매년 5월 '발명의 날'을 맞아 특허청에서 실시하는 '우리나라를 빛낸 발명품' 설문조사에서 커피믹스는 '훈민정음', '측우기'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발명품으로 빼놓지 않고 선정된다. 이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발명품, 커피믹스의 시작은 한국의 동서식품이다. 1970년대 초반 미국 제너럴 푸드와 기술을 제휴한 동서식품은 맥스웰하우스 커피 생산을 시작으로 커피 시장에 본격 발을 들여놓았다. 1976년 12월 세계 최초로 '커피믹스'를 개발했다. 커피믹스는 커피와 설탕, 크리머를 이상적으로 배합한 고급 방습포장의 1회용 제품으로, 동서식품의 커피 생산 노하우를 응용해 인스턴트 커피를 한 차원 발전시킨 파생상품이었다. 커피믹스는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고, 보관하기 쉬우며, 더운 물만 있으면 손쉽게 마실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시장에 등장하자마자 대중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우리나라에서 커피믹스가 세계 최초로 발명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리마' 개발에 있다. 프리마는 1974년 동서식품이 국내 최초로 개발한 분말형 크리머로, 가격이 저렴하고 보관이 쉬워 기존의 액상 크리머의 모든 단점을 개선했다. 또한 야자유로부터 나온 고소한 향이 한국인들의 기호에 잘 맞았다. 동서식품은 프리마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모든 노하우를 커피믹스 개발에 고스란히 반영했다. 이후 커피믹스는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와 산업화가 활발히 이뤄지던 1970년대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급격히 성장했다. 동서식품은 커피믹스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는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커피 로스팅 강도, 커피 추출 공정 등에 다양한 변화를 시도한 끝에 '맥심 모카골드'를 세상(1993년)에 내놨다. ◆맥심 모카골드의 성장 맥심 모카골드 연구개발이 한창이던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반, 국내 커피시장은 세계적인 기업 네슬레 등 막강한 경쟁사가 국내 시장에 진출하면서 커피경쟁은 그 어느때보다 치열했다. 한국네슬레(현재 롯데네슬레코리아)는 당시 국내에 불던 외제 선호 분위기를 타고 호황을 누렸다. 동서식품은 블라인드 테스트 등의 마케팅 활동을 통해 공세에 맞섰다. 이때 동서식품은 처음으로 사은품을 만들었다. 이 시기에 사은품 규제(판매 금액의 일정 비율 이하)를 맞추기 위해 동서식품은 커피 받침대를 뺀 머그잔을 고객들에게 제공했다. 우리나라에 머그잔이 보편화 된 계기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네슬레는 국내 진출 5년 만에 시장점유율을 40%까지 확대했다. 이에 동서식품은 확실한 '품질 우위'만이 경쟁에서 앞서나갈 수 있다고 판단하고, 1996년 맥심 브랜드의 '1차 리스테이지'를 실시했다. '맥심 리스테이지'는 제품 품질과 이에 적용되는 기술, 디자인 등을 전반적으로 모두 개선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리스테이지가 성공적으로 단행됨에 따라, 동서식품의 시장점유율은 1998년부터 상승세로 전환됐으며, 1998년에는 점유율을 63.6%까지 확대했다. 특히 이 시기 불어 닥친 외환위기는 솔루블 커피의 인기가 꺾이고 커피믹스가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7년 IMF 이전에는 커피를 타는 사람의 손 맛에 따라 커피 맛이 다르기도 했지만, 구조조정 칼바람으로 커피를 부하 직원이 타서 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타서 마시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때 최적의 배합비가 맞춰져 있는 맥심 모카골드는 소비자들의 불편함을 해소하고 항상 같은 맛을 낼 수 있는 커피믹스로서 한층 더 주목 받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뜨거운 물이 나오는 냉온수기의 보급률도 급격히 높아졌고, 맥심 모카골드는 사무실에서 누구나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음료로 자리매김했다. ◆트렌드·소비자 입맛에 맞추다 동서식품은 매년 100건 이상의 시장조사와 트렌드 분석을 통해 더 나은 커피를 소비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96년 리스테이지를 첫 시작으로, 이후 지속적인 품질 우위를 견지하게 위해 매 4년마다 맥심 커피 브랜드 제품의 맛과 향, 패키지 디자인을 모두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혁신(Innovation)'이라는 주제로 '맥심 6차 리스테이지'를 시행하며 신제품 및 품질, 디자인이 개선된 리뉴얼 제품들을 선보였다. 특히 맥심 모카골드는 기존 국민커피 '모카골드 마일드'에 새롭게 2종의 제품이 추가됐다. 동서식품은 2017년 5월 설탕 함량을 25% 줄여 깔끔한 맛을 강조한 '맥심 모카골드 라이트'를 발매했다. 함량의 변화에 따라 커피, 크리머, 설탕의 배합도 새롭게 적용하면서 모카골드만의 '세상 어디에도 없는 맛'은 그대로 발현했다. 이어 11월에는 달지 않은 커피믹스를 마시고자 하는 소비자를 위해 설탕을 뺀 커피믹스 '모카골드 심플라떼'를 내놨다. 모카골드 심플라떼는 오직 커피와 라떼 크림만으로 만들어 고소함을 강조했다. 고급 아라비카 커피만을 사용해 커피의 깊고 풍부한 맛을 살리고 신선한 우유의 함량을 높인 라떼 크림이 커피를 부드럽게 감싸주는 것이 특징이다. 이로써 동서식품은 대한민국 대표 커피믹스인 '맥심 모카골드 마일드'와 단맛을 줄여 깔끔한 '맥심 모카골드 라이트', 설탕 없이 고소한 맛을 살린 '맥심 모카골드 심플라떼' 등 3종의 맥심 모카골드 라인업을 완성해 소비자가 각각의 기호와 입맛에 따라 커피믹스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다 한국을 대표하는 '맥심 모카골드'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이는 여행, 비즈니스 등 다양한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맛본 맥심 모카골드의 맛에 반한 외국인들이 생겼기 때문인데, 이들은 커피믹스의 편리성과 환상적인 커피, 프리마, 설탕의 배합 비율에 마음을 뺏겼다고 한다. 어느덧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맥심 모카골드는 한국에서 꼭 맛봐야 하는 제품, 한국에서 꼭 사야 하는 기념품'으로 자리 잡았다. 동서식품 관계자는 "맥심 모카골드 인기의 가장 큰 이유는 소비자 의견을 적극 반영해 끊임없이 기존 제품을 개선하고 새로운 제품을 선보이면서도 커피의 가장 중요한 기준인 '깊은 맛과 향'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앞으로도 동서식품은 커피의 맛과 향에 집중해 지속적으로 제품을 업그레이드 해가는 한편 소비자들과 보다 가까이 소통하기 위한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지속해갈 것이다"고 말했다.

2018-03-08 11:33:48 박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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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하이트진로 하이트 맥주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하이트진로 하이트 맥주 맥주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구한말이다. 개항 이후 서울과 개항지에는 조선의 상권을 넘보는 러시아, 일본 등 각국의 상인들로 들끓었다. 당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계층이 일부 부유층과 상류층에 한정돼 있었다. 1905년까지도 우리나라의 맥주 소비량은 연간 1570㎘에 불과했으나 1910년 전후로 일본회사들이 경성출장소를 내면서 소비가 크게 증가해 1920년대 들어서는 수입 주류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맥주회사는 1933년 당시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읍(현재 서울시 영등포구)에 준공된 조선맥주주식회사다. 조선맥주는 맥아제조 설비를 설치하고, 계열기업인 유리병제조회사도 설립해서 원자재 공급체계를 갖췄으나 1950년 6·25로 영등포공장이 심각한 전화를 입었고 전쟁 중인 1952년 6월 17일 피난지 부산에서 민간에 불하됐다. 상호는 조선맥주주식회사를 그대로 사용하고 상표는 잠시 '금관맥주(金冠麥酒)'로 불렀다가 '크라운맥주'로 바꾸어 생산에 들어갔다.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1967년 고(故) 박경복 회장이 경영권을 인수했다. ◆1990년대 '하이트' 돌풍 1993년 출시된 '하이트'는 암반 천연수로 만든 맥주 콘셉트로 돌풍을 일으켰다. 하이트의 성공스토리는 국내 마케팅 학계에서도 유명한 사례로 잘 알려져 있다. 하이트라는 브랜드는 40년 만에 업계 1위를 탈환하고 이제는 하이트-진로그룹이라는 국내 최대의 종합주류전문 기업으로 회사를 성장시킨 1등 공신이다. 하이트 출시 전 당시 조선맥주는 30% 초반의 시장점유율로 경쟁사인 동양맥주에게 40년간 1위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0년대 초, 다른 기업에서 맥주시장에 뛰어든다는 소문이 나돌아 위기감이 팽배해 있었다. 조선맥주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마지막 신제품 개발'이라는 결단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92년 5월 처음으로 마케팅 부서를 신설하고, 신제품 개발을 위한 준비작업에 돌입했다. 당시의 지배적인 견해는 경쟁사와 철저히 차별화되지 않은 제품으로는 난국을 돌파하기 힘들다는 것이었고, 따라서 모든 것을 차별화해야 한다는 것이 최대 과제였다. 1993년 5월 회사의 운명을 바꿔놓을 '하이트'가 탄생했다. 출시 3년 만에 맥주시장 1위에 올랐으며, 이후 15년째 국내 맥주 1위 자리를 지켰다. 1993년 30%에 불과했던 하이트맥주의 시장점유율은 1996년 43%, 2000년에는 53%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절반을 넘어서기도 했다. 2007년에는 200억병 판매를, 2013년에는 300억병 판매를 돌파했다. 브랜드가 대히트를 치면서 1998년 사명도 바꿨다. 1933년 창립 당시부터 사용해오던 조선맥주주식회사라는 상호 대신에 하이트맥주주식회사로 바꾸게 된 것이다. 2005년 8월에는 국내 최대 소주업체인 진로를 인수, 하이트-진로그룹으로 새롭게 출범해 국내 최대 종합주류전문기업으로 재탄생했다. ◆하이트 리뉴얼 변천사 하이트의 성공은 국내 마케팅사에서 획기적인 브랜드전략으로 평가받았으며, 학계에서 대표적인 마케팅 성공사례로 자주 다루어지기도 했다. 하이트는 출시 당시 깨끗함과 순수를 강조한 '100% 암반수로 만든 순수한 맥주'라는 제품 콘셉트로 인기를 끌었다. 또한 살균과정에 열을 가하지 않아 맥주의 신선도가 더욱 오래 유지되는 첨단 여과시스템을 적용했으며, 드라이밀(Dry-mill)공법으로 맥주보리 껍질을 분리해 쓴 맛을 제거했다. 고급스러운 라벨디자인과 최적의 음용온도를 확인할 수 있는 온도계마크, 신호등마크를 적용, 장애인을 위한 점자캔맥주 등 소비자 중심 마케팅활동으로 급성장했다. 출시 초 '지하 150M 암반천연수'를 콘셉트로 한 광고를 시작으로 '백두대간', '대표맥주', '리듬', '대자연', '180도 기분전환', '오픈 업', '아이스포인트' 등 다양한 광고콘셉트의 변화를 주어 시장변화에 적극 대응해왔다. 하이트는 계속되는 성장에도 소비자들의 니즈에 맞춰 제품의 콘셉트와 디자인을 주기적으로 리뉴얼했다. 1995년 이후 2017년 하이트 엑스트라콜드 출시까지 24년 동안 총 10회에 걸쳐 리뉴얼을 단행했다. 또한 2015년 11월 국내 최초로 출시한 크리스마스 에디션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2016년, 2017년에도 크리스마스 에디션을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편 2015년 10월에는 1952년부터 1993년까지 생산했던 크라운맥주를 22년만에 재출시했다. 당시 중장년층에게는 친숙함과 추억을 제공하고 젊은 층에게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많은 관심을 받았다. ◆품질만족경영을 위한 노력 하이트는 맥주 맛을 좌우하는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퀄리티 업 시스템(Quality Up System)'을 시행하고 있다. 저장에서 여과까지 공정 온도를 0도 이하로 낮추는 아이스포인트 공법을 통해 깨끗하고 신선한 하이트를 만들고 있으며, 제조 공정에서 공기를 차단하는 에어블로킹 시스템을 통해 하이트의 맛과 향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제품을 판매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판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신선한 하이트를 소비자에게 공급하기 위해 품질유지기한이 지난 제품을 무상으로 교체해 주는 '프레시365'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세계 정상급 기업들과 '월드 비어 얼라이언스(WBA)'를 구축해 맥주 품질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하이트진로는 연구개발(R&D) 투자와 함께 해외 유수의 맥주기업들과 협력을 강화했다. 독일 맥주전문 컨설팅 업체인 '한세베버리지(Hanse Beverage)'와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한세베버리지의 연구원들은 하이트진로 중앙연구소에 상주해 원료, 설비, 분석 등 품질 향상 연구를 포함해 신제품 개발에도 함께 참여한다. 이와 함께 독일, 덴마크, 일본, 태국 등의 유명 기업들과도 WBA를 강화하고 있다. 한편 맥주 제조사로는 덴마크 칼스버그, 일본 기린, 싱하맥주를 생산하는 태국 분럿브루어리와도 제휴하고 있다. 하이트진로는 이미 칼스버그의 프랑스 계열사 브랜드인 '크로넨버그 1664'와 기린의 '이치방', 분럿그룹의 '싱하'를 수입하고 있다. ◆해외시장에서도 성장세 하이트진로의 품질경쟁력은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신규 진출국가의 주요 기업들과 제휴를 맺으며 현지인 시장 진출을 확대해가고 있다. 2014년에는 도미니카공화국의 바르셀로 그룹과 제휴를 맺고 중미 맥주시장에 본격 진출했으며,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에도 현지 유통업체와 손잡고 맥주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일본, 미국, 중국 등 세계 60여 개 국가에 소주와 맥주를 수출하고 있다. 최근 각국의 맥주 성장세는 눈 여겨 볼만하다. 먼저 홍콩맥주시장에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하이트진로의 홍콩 내 맥주 판매량은 32만 상자(1상자=500㎖ x 20병)로 전년 대비 31%성장했다. 올해 예상판매량은 41만 상자다. 2012년 6만 상자 대비 약 7배나 증가한 급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맥주 본고장 유럽에서 최근 한국 맥주 판매량이 급증하며 관심을 끌고 있다. 하이트진로에 따르면 지난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유럽 주요 국가에서 맥주 판매량 22만 상자를 기록, 전년 대비 60% 증가했다. 꾸준한 성장세로 최근 5년간 판매규모가 2배로 증가했다. 특히 하이트진로 법인이 있는 러시아에서의 성장세가 주목된다. 러시아 주류판매 허가를 취득한 2014년부터 러시아 전역에 교민시장을 넘어 현지인 시장에 진출하면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하이트와 함께 흑맥주 스타우트도 인기인 러시아에서는 지난해 17만상자의 맥주를 판매해 전년대비 93% 성장했다. 하이트진로는 유럽 현지 유통망을 지속적으로 넓히고 시장 지배력을 강화해 맥주 본고장 유럽에서 고성장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2018-03-01 10:48:53 박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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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칠성사이다...68년간 입맛 사로잡은 민족 음료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롯데칠성음료 칠성사이다 사이다는 삶은 달걀과 함께 한국인들에게 어린 시절의 향수를 떠올리게 한다. 시간이 흘러 햄버거와 피자 등 서구식 입맛을 갖게 되었지만 식생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칠성사이다는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올해로 발매 68년을 맞이한 롯데칠성음료의 '칠성사이다'는 우리 민족의 입맛을 대변해 온 음료다. 하루에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신제품이 쏟아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68년 동안 줄 곧 우리 곁에서 변함없는 맛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칠성사이다'의 저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국내 사이다시장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전체 사이다시장의 성장에는 '칠성사이다'의 매출 증가가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전체 사이다시장에서 칠성사이다는 약 70% 중반에 달하는 점유율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단일품목으로 약 3900억원대의 매출을 기록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판매된 칠성사이다의 누적판매량은 약 196억병(340㎖ 병 기준)으로 한 병당 23.4㎝인 제품을 모두 이을 경우 약 460만㎞로 지구에서 달까지(약 38만㎞) 약 6번 왕복할 수 있는 규모다. ◆칠성사이다의 역사 칠성사이다가 처음 출시 된 것은 6.25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5월 9일이다. 1949년 12월 15일에 최금덕, 박운석, 방계량, 주동익, 정선명, 김명근, 우상대 등 7명이 주주가 되어 세운 '동방청량음료합명회사'의 첫 작품이었다. 이들은 각자의 성이 모두 다르다는 점에 착안하여 '칠성(七姓)'이라는 제품명을 쓰려 했으나, 회사의 영원한 번영을 다짐하는 의미에서 별을 뜻하는 성(星)자를 넣어 '칠성(七星)'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새 제품의 탄생을 기념하고자 회사의 창립기념일을 1950년 5월 9일로 정했다. 그 후 칠성사이다를 만드는 회사의 이름은 '한미식품공업(1967)', 그리고 '칠성한미음료주식회사(1973)'를 거쳐 현재의 롯데칠성음료까지 사명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칠성사이다'의 정체성은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칠성사이다 맛의 비결 시장에서 장수하는 브랜드들의 공통적 특징은 소비자 기호에 적절히 어필할 수 있는 우수한 제품력을 갖고 있다. 소비자들의 1차적인 편익은 음료의 맛이다. 바로 이 맛의 측면에서 '칠성사이다'가 경쟁사 대비 차별적 우위에 있으며 아무도 모방할 수 없는 제조공정과 노하우를 갖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성공 요인이다. 그 맛의 비결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칠성사이다'는 우수한 물 처리 시설을 갖추고 물을 순수하게 정제한다. 둘째, 레몬과 라임에서 추출한 천연 향 만을 사용하고 이를 적절히 배합하여 향미가 탁월하다. 셋째, 인공색소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는 점 등이다. 한마디로 향미가 뛰어 나면서도 합성향료, 합성색소를 사용하지 않은 제품이다. 당연히 맛과 건강을 동시에 고려하는 요즘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칠성사이다의 맛을 돋보이게 해주는 또 다른 요소는 우리 소비자들이 68여 년에 걸쳐서 대략 196억병 이상을 마시는 동안 칠성사이다의 맛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즉 소비자의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어 경쟁사의 제품 침투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경쟁환경·시대변화에 대응 장수하는 기업이나 브랜드들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는 변화하는 환경에 적절히 대응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변화를 기회로 전환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칠성사이다 역시 이러한 측면에서 능력을 발휘해 왔다. 칠성사이다는 출시 초기에 소풍이나 운동회 날처럼 특별한 때에만 마실 수 있었던 비싼 음료였다. 칠성사이다가 지금처럼 대중적으로 폭 넓은 사랑을 받게 된 것은 1970년대에 길옥윤이 작곡한 CM송이 히트하면서부터다. 특히 당시 최고 인기를 자랑하던 가수 혜은이가 1976년에 부른 CM송 가사는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난방설비가 좋은 아파트가 한참 보급될 때 "겨울에 마시는 칠성사이다 역시 좋습니다" 라는 메시지를 통해 겨울철 비수기 시장 확대 캠페인을 펼쳤는가 하면, 1981년에 국내 처음으로 컬러 TV가 방영되기 시작할 때 "모든 것이 컬러화되고 있지만 음료는 역시 칠성사이다가 좋습니다" 라는 광고를 통해 사회환경 변화에 대응하였다. 또한 다국적기업 코카의 무차별 공세를 막기위해 "콜라를 마실 것인가? 사이다를 마실 것인가? "라는 차별화 광고전략을 통해 새로운 변신과 기회를 모색하였으며, 콜라 대비 사이다의 장점인 無색소, 無로얄티를 부각시키는 적극적인 마케팅 활동을 펼쳐왔다. 무언가 변화의 조짐이 나타날 때 적절하고도 신속한 대응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능력이 칠성사이다를 항상 앞서가는 브랜드로 만들어가는 또 하나의 중요 자산으로 작용했다. ◆차별화 된 콘셉트·일관된 캠페인 전략 칠성사이다가 맑고 깨끗한 이미지 캠페인으로 차별화 시키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당시 경쾌한 리듬의 CM송과 함께 탄산음료 특유의 신선한 느낌을 영상화하면서 청량음료 음용 욕구를 자극하도록 기획했다. 이후에는 '백두산' 시리즈, '송사리' 편 등을 통해 '맑고 깨끗함'을 지향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롯데칠성음료는 기존 맑고 깨끗한 이미지에 새로운 변화를 가미했다. 탄생 50돌을 맞아 브랜드에 맑고 깨끗한 이미지 + 살아 숨쉬는 듯한 역동성을 더함으로써 시대에 맞는 활동성을 부여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는 '맑고 깨끗한 세상은 지켜져야 합니다'라는 주제로 광고캠페인을 전개하면서 '물'의 가치와 수달, 개구리 등 물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생명체'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광고와 독도를 주제로 한 환경캠페인, 우리나라 대표적인 4대강을 소재로 한 '江江순례' 캠페인 등을 전개했다. 2015년 8월부터는 칠성사이다의 브랜드 핵심 가치인 '맑고 깨끗함'을 강화하기 위해 영화배우 겸 가수 임시완을 모델로 신규 광고를 선보였으며, 2017년 7월에는 칠성사이다만의 깔끔하고 시원한 맛을 강조하기 위해 배우 박서준과 아이돌그룹 라붐의 솔빈을 모델로 신규광고를 선보였다. 롯데칠성음료 관계자는 "칠성사이다는 다양한 세대에 걸쳐 꾸준한 사랑을 받는 브랜드로 각 세대별로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마케팅을 선보이며 소비자에게 끊임없이 다가가고 있다"며 "앞으로도 국내 탄산음료 시장 정상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칠성사이다의 브랜드 이미지인 '맑고 깨끗함'을 강조하며 끊임없는 변화를 거듭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2018-02-22 16:52:44 박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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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CJ제일제당 스팸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CJ제일제당 스팸 햇반(즉석밥), 봉고(승합차), 대일밴드(일회용 반창고). 이들은 브랜드 자체가 일반명사처럼 통용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석밥이라는 생소한 카테고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이제는 '햇반'이라고만 언급해도 어떤 제품인지 알 수 있는 것처럼 한국인에게 캔햄하면 바로 떠오르는 브랜드가 있다. 바로 '스팸'이다. 1987년 국내에서 첫 생산을 시작한 스팸은 출시 당시 75%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던 '런천미트'와 '치즈햄', '장조림햄' 등을 제치고 캔햄을 대표하는 고유명사로까지 불리게 됐다. '따끈한 밥에 스팸 한 조각'을 광고 문구로 앞세운 스팸은 더 이상 미국에서 들여온 저렴한 캔햄이 아닌, 한국인들과 30년 이상 함께 하며 쌀밥과 김치로 대표되는 한국 음식의 인기 반찬으로 그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단백질 공급원·전투식량에서 대중적인 스팸으로 스팸은 1937년 미국 호멜(Hormel)에서 처음 출시했다. 햄과 다진 돼지고기를 섞어 캔에 담은 스팸은 대공황의 여파가 남아있던 1930년대 후반 미국 저소득층에게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이후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군이 전투식량으로 스팸을 채택하면서 미군이 가는 모든 국가에는 스팸이 자연스럽게 전파됐다. 유럽은 물론 태평양의 작은 섬에 이르기까지 스팸은 조리와 보관이 쉬운 음식으로 각광을 받았다. 국내에 최초 들어온 시기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음식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당시 스팸은 편리하고 맛있는 돼지고기 특수부위와 같은 존재로 유일한 고기였다. 이 때문에 부유층이나 미군부대와 연줄이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일종의 '특권층이 누릴 수 있는 음식'으로 대접 받았다. 스팸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은 미군부대 쓰레기통을 뒤져 남은 스팸이나 소시지, 햄버거 고기, 베이컨 등을 모아 식당에 팔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에 김치를 섞어 만든 찌개가 바로 지금의 '부대찌개'다. 이후 1986년 3월 제일제당(현재 CJ제일제당)은 호멜과 기술제휴를 체결했고, 1987년 5월 현재의 스팸을 본격 생산했다. '세계적인 명성, 세계적인 품질. 스팸을 제일제당이 만듭니다'는 출시 광고를 앞세워 반세기 동안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스팸이라는 점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캔햄이 일반 제품에 비해 고가이기는 했지만 휴대 및 사용이 간편하고 보존 기간이 길다는 장점 때문에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와 잘 맞아 떨어지며 반응은 좋았다. 덕분에 출시 당해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어 연간 500t의 스팸을 판매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듬해인 1988년에는 매출이 두 배로 뛰며 이후 지속적인 성장세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식탁 위의 인기 반찬 스팸이 30년 동안 사랑을 받으며 지속적인 매출성장과 함께 장수 브랜드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소비자에게 '맛있는 밥 반찬'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다. 2002년 배우 김원희를 모델로 한 TV 광고에서 스팸의 정체성과도 같은 '따끈한 밥에 스팸 한조각'이라는 광고 카피를 선보인 이후 2006년 가수 에릭, 2011년엔 배우 하정우를 모델로 한 광고를 지속적으로 선보이며 소비자들의 시선과 입맛을 사로잡았다. 이후 2015년부터는 매년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의 장면을 활용한 푸티지(Footage) 광고를 선보였다. 2015년 드라마 '미생'과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청춘'을 활용한 광고를 선보였고, 2016년에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 2017년에는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를 활용한 광고를 선보였다. 특히 '따끈한 밥에 스팸 한조각'과 함께 '스팸이 진리'라는 광고 카피까지 추가하며 스팸이 1위 브랜드라는 점을 강조했다. 광고를 통해 '맛있는 밥 반찬' 등 제품 자체에 대한 특장점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면, 급변하고 있는 트렌드에 발맞춰 일상 생활에서 지속적으로 스팸을 노출시키기 위해 문화마케팅, 아웃도어마케팅, 스타마케팅 등을 펼쳤다. 제품과 접촉하는 장소와 시점, 매개체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제품을 알린다는 취지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대중문화와 접목한 뮤지컬 '스팸어랏' 연계마케팅을 꼽을 수 있다. ◆명절 대표 선물로 큰 인기 명절 시즌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고급스러운 선물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실속형 소비 트렌드가 확산됨에 따라 합리적인 가격에 프리미엄 인식이 더해진 스팸 선물세트는 매년 매출이 성장하며 매 명절마다 10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명절 선물 단골 손님인 정육과 과일 등 고가의 선물세트들과 어깨를 견줄 정도다. CJ제일제당은 현재의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2020년까지 스팸을 4000억원대 브랜드로 키우겠다는 방침이다. CJ제일제당 스팸 마케팅 담당 양성규 과장은 "한국 소비자들의 스팸에 대한 사랑은 해외 언론사에서 취재할 정도로 각별하다"며 "30년 동안 이어져온 소비자들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모션을 진행하는 한편 철저한 품질·위생관리에도 힘쓰겠다"고 밝혔다. 2014년 초 '스팸과 사랑에 빠진 한국'이라는 기사가 뉴욕타임즈 국제판인 인터내셔널 뉴욕타임즈는 보도된 바 있다. 스팸이 한국에서 명절 선물세트로 각광받는 등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현상에 대한 원인을 분석한 기사였다. 뉴욕타임즈에 앞서 영국 BBC방송과 로이터통신 등에서도 동일한 주제로 기사를 다뤘다. 이처럼 해외 언론에서 동일한 기사를 앞다퉈 다룬 이유는 한국인의 스팸 사랑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즈는 "다른 국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에서 스팸의 위상은 남다르다. 특히 명절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고급스러운 선물세트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심지어 프리미엄 유통채널인 백화점에서도 수입산 와인, 자연산 버섯, 정육세트 등 고가의 선물세트들과 나란히 진열될 정도"라고 밝혔다. 이어 "한국에서 스팸은 미국으로부터 물려 받은 싸구려 캔햄이라는 오명을 벗고 명절 시즌에는 세련된 포장에 3만원 대부터 그 이상의 가격으로 판매된다"고 보도했다.

2018-02-11 11:57:08 박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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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오리온 초코파이 情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오리온 초코파이 情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눈빛만 보아도 알아요." 1974년 출시된 오리온 초코파이의 CM송이다. 지난 44년 동안 위로와 용기, 감사를 전하며 소비자의 곁을 지키고 있다. 오리온 초코파이는 뛰어난 맛과 품질을 인정받아 러시아, 중국, 베트남, 중동, 미국까지 세계 60여개국에 한국의 정을 전하는 외교관 역할도 하고 있다. 초코파이는 오리온의 독자적인 기술로 탄생했다. 일반 비스킷과 달리 특수한 배합 및 제조 과정을 거친다. 이는 출시 직후부터 모양과 포장 디자인을 베낀 제품들이 쏟아졌지만 오리온 초코파이의 독주를 막지 못했다. 세계에서 한 해에만 약 20억개 이상이 팔리는 인기 제품으로 자리 잡았다. ◆제품 개발 과정 대한민국 국민과자를 넘어 세계인의 과자가 된 '오리온 초코파이'는 한 개인에 의해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파이 개발팀, 더 나아가 회사 전체가 이룬 성과였다.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 이후 1970년대 한국은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식생활 문화도 크게 달라졌다. 소비자들이 좀더 고급스럽고 차별화된 과자를 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오리온 연구원들은 전혀 새로운 제품, 복합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개발 의지가 싹트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오리온 초코파이'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만들어졌다. 1970년대 초 식품공업협회(현 식품산업협회) 주관으로 미국 등 선진국을 순회하던 오리온 연구소 직원들은 한 카페테리아에서 우유와 함께 나온 초콜릿 코팅 과자를 맛보다가 신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약 2년여에 걸친 실험과 개발을 통해 수많은 시제품을 만들면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끝에 1974년 4월 드디어 오늘날의 초코파이가 탄생했다. 초코파이는 출시 당시 국내 제과업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형태의 과자였으며, 차와 곁들일 수 있는 주식 대용의 고단백, 고칼로리를 가진 영양식으로 개발됐다. 초코파이는 상류층을 주타깃으로 고급수러움에 주력했고 패키지 디자인 전략은 초콜릿 제품과 어울리지 않는 '스카이블루' 컬러를 사용함으로써, 매장 내에 파별화된 대비를 강조, 임팩트 효과를 가져왔다. ◆초코파이의 변신 초코파이가 그동안 사랑을 받아온 이유는 경쟁사들이 따라올 수 없는 오리온만의 고유한 '맛'과 '품질' 때문이다. 하지만 출시 당시의 초코파이가 지금과 똑같은 맛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변화하는 소비자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초코파이는 2015년 10월 가격 인상 없이 개당 무게를 35g에서 39g으로 증량하면서 최근 한결 업그레이드된 맛으로 소비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당시 초콜릿을 약 13% 늘리고, 식감도 더욱 부드럽게 개선했다. 2016년 3월, 오리온은 창립 60주년을 맞아 '바나나 초코파이情'을 출시했다. 바나나 초코파이는 초코파이 탄생 42년 만에 처음으로 내놓은 자매 제품이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과일인 바나나를 사용해 남녀노소 모두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식품업계에 '바나나'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새로워진 바나나 초코파이는 마쉬멜로우 속에 바나나 생크림이 들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17년 봄에는 초코파이 출시 이후 43년 만에 처음으로 계절 한정판인 '초코파이情 딸기'를 선보였다. 출시 한 달 만에 낱개 기준 누적판매량 1100만 개를 달성하기도 했다. 같은 해 9월에는 기존 초코파이와 다른 새로운 콘셉트의 '초코칩 초코파이情'을 선보였다. 초코칩 초코파이는 빵 속에 오독오독 씹히는 초코칩과 깊은 풍미의 초콜릿청크가 콕콕 박혀 있어 독특한 식감과 진한 초콜릿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장수 비결 오리온 초코파이는 한 해에만 전 세계적으로 약 20억 개 이상이 팔리고 있다. 초코파이의 인기 비결은 흉내 낼 수 없는 맛에 있다. 수분이 함량이 매우 높은 마시멜로우와 상대적으로 수분이 낮은 비스킷, 초콜릿으로 만들어진다. 마시멜로우 속 수분이 숙성을 통해 비스킷으로 이동하며 초코파이만의 오묘한 식감을 만들어낸다. 수분은 초코파이를 부드럽고 촉촉하게 만드는 비결이기도 하지만 수분이 많아질수록 미생물에 의한 오염 및 변패, 풍미의 변화 등의 현상이 발생하기 쉽다. 오리온은 알코올이나 방부제 성분 없이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수분의 황금비율을 찾아냄으로써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오리온 초코파이 만의 맛과 품질을 지켜가고 있다. 중국 현지 공장을 만들던 1995년 '제품에 곰팡이가 발견됐다'는 소비자 클레임이 접수되기 시작했다. 오리온 생산 제품 전량을 리콜하기로 결정하고, 수거된 제품 10만 개를 한데 모아놓고 불에 태웠다. 이와 함께 포장 필름 재질을 생산원가가 올라가더라도 제품보호에 보다 효과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이 사실이 중국 내 딜러에게 소문이 나면서 오히려 오리온을 믿을 수 있는 기업으로 인식하며 급속하게 판매가 늘었다. 1996년 초코파이 개발팀에서는 1년 여 동안 신제품을 출시하지 않고 온통 초코파이에만 매달렸다. 최적의 수분 함량을 찾기 위해 수술용 메스를 이용해서 정교하게 파이를 분해했다. 수분의 함량을 10~15%까지 놓고, 미생물의 번식, 식감의 차이를 연구했다. 그렇게 꼬박 1년을 매달렸고, 마침내 최적 수분 함량 '13%'를 찾아냈다. 그 결과 방부제나 알코올을 전혀 쓰지 않고도 혹한의 러시아부터 열사의 땅 중동지역까지 6개월 넘게 변함없는 품질과 맛을 유지하는 초코파이를 만들 수 있게 됐다. ◆글로벌파이로 성장 오리온 초코파이는 세계시장에서도 매년 큰 폭의 판매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오리온 관계자는 "한국인의 감성코드이자 초코파이의 핵심 브랜드가치인 '정(情)'을 각 나라 사람들의 고유한 정서에 접목시키는 현지화 전략이 굳게 잠겨있던 세계시장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됐다"고 말했다. 오리온 초코파이를 가장 친근하게 받아들이는 나라는 역시 중국이다. 중국인들이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시하는 가치가 바로 인(仁)이라는 점에 착안해 2008년 말부터 하오리여우파이(好麗友·좋은 친구) 포장지에 인(仁)자를 삽입하고 있다. 공감대를 일으키자 중국 고객들의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했고, 결국 다른 제품들의 매출 증대에도 크게 기여했다. 초코파이는 국내 제과 브랜드 중 유일하게 2016년과 2017년 2년 연속으로 '중국 브랜드 파워지수'(C-BPI)에 파이 부문 1위에 등극했다. 베트남에서는 2009년부터 현지어로 정(情)을 의미하는 'Tinh'이라는 단어를 활용한 마케팅 활동을 전개하면서 친근감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에서는 따스한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성향과 관습을 파악한 오리온은 광고에서 여럿이 함께 초코파이를 나눠먹는 단란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2018-02-01 16:12:21 박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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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한국야쿠르트 야쿠르트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한국야쿠르트 야쿠르트 "이 작은 한 병에 건강의 소중함을 담았습니다." 국내 최초의 유산균 발효유 제품인 '야쿠르트'가 내세운 광고 이야기다. '야쿠르트'는 단일 브랜드 사상 최다 판매를 이어가고 있는 제품으로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한 번쯤 마셔봤을 것이다. 지금도 남녀노소 모두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건강기업 한국야쿠르트의 대표 제품이자, 국내 발효유의 상징인 '야쿠르트'는 지난 1971년 국민에게 첫 선을 보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내 1호 유산균 발효유 '야쿠르트'는 건강식품이 생소하던 시절 소비자 건강증진에 기여하면서 음료의 범주를 건강까지 확대시킨 기념비적인 제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야쿠르트는 발매 첫해 760만개 판매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490억병이 팔리며 식음료 업계 단일품목 최다판매량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출시초 유산균 인식 부재 극복 야쿠르트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의 발효유의 역사다. 출시 전인 1970년 야쿠르트 시제품이 생산되었지만, 당시에는 판매를 위한 제품 등록과 법적 기준도 부족했다.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선보인 제품이니만큼 정부 어느 기관에서 담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조차 없어 애를 먹었다. 어렵게 농수산부(현 농림축산식품부)에서 관장하게 되었지만, 정부 검사기관에는 정작 발효유의 유산균이 규격에 맞는지를 검증하는 기술조차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검사를 위해 거둬 간 '야쿠르트' 제품에서 유산균이 검출되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아 한국야쿠르트 직원이 직접 검사기관을 방문해 확인하고, 직접 균수를 확인하고 측정하는 기술을 전수할 정도로 당시 유가공 분야의 기술력은 낙후된 상태였다. 제품 생산과 이를 등록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생산된 제품은 신선하게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방법도 고민해야 했다. 당시 법적으로도 발효유는 섭씨 0~10도로 냉장 보관해야 하며, 당시 제품의 유통기한도 7일간이었다. 이에 한국야쿠르트는 공장에 저온 창고 시설을 갖췄고, 운송차량도 보냉차량으로 갖추었다. 영업센터(현재 지역지점)에서는 냉장고를 24시간 가동하였다. 하지만 가장 큰 난제는 소비자의 인식부재였다. 출시 초기 일반 사람들의 발효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면서 많은 에피소드도 양산했다. ◆유산균 연구 개발의 초석 야쿠르트가 판매되던 초창기에는 유산균에 대한 정보가 없어 '발효유를 먹으면 배가 아프다', '야쿠르트를 먹으면 이가 상한다' 등의 잘못된 정보도 있었다. 이에 한국야쿠르트는 국내의 저명한 농학, 의학, 보건학 박사를 중심으로 학술고문 제도를 마련했다. 뒤떨어진 국내 유산균 발효유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다. 또한 유산균의 과학성을 학술적으로 널리 알리기 위해 1979년부터는 국제규모의 '유산균과 건강 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야쿠르트에 사용되는 균은 산이나 담즙에 사멸되지 않은 강한 균인 야쿠르트균(락토바실러스 카제이)을 사용한다. 위액이나 담즙에 서서히 강하게 살아남은 것만을 골라내어 제품에 사용하는 누대배양을 하는데 기간은 총 13일에 달한다. 그리고 7일간의 배양 과정을 통해 맛과 풍미가 뛰어난 야쿠르트 제품이 완성된다. 이런 힘든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산에 견디는 내산성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한국야쿠르트는 1976년 식품업계 최초로 중앙연구소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균 연구에 나섰다. 그리고 밤낮없는 각고의 노력 끝에 1981년 자체적으로 야쿠르트 제품 생산에 필요한 종균배양에 성공했다. 야쿠르트를 생산 판매하기 시작한지 10년 만이었다. 이후 연구소에서 직접 종균 공급을 하게 됨으로써 본격적인 종균 관리 연구를 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유산균 발효유를 제조할 수 있는 기술 확보에 한걸음 다가섰다. ◆방문판매 제도 도입 한국야쿠르트는 '야쿠르트 아줌마'라는 방문 판매시스템을 도입해 유통에 활력을 더함은 물론, 직접 소비자를 만나며 견본증정, 교육자료 배포 등 소비자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공세적인 마케팅을 펼쳐나갔다. 1971년 47명으로 시작한 '야쿠르트 아줌마'는 전국 1만3000여명으로 확대됐다. 야쿠르트 아줌마의 친근한 이미지가 완성된 것은 1972년 KBS 대하드라마 '여로'에 앞서 탤런트 태현실씨가 광고에 등장하면서부터다. 한국야쿠르트는 제품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방문 판매원들의 이미지 관리에 심혈을 기울여왔는데, 초창기 모집 기준은 기혼자여야 한다는 것과 당시로서는 고학력인 중졸 이상의 학력이었다고 한다. ◆진화하는 야쿠르트 '야쿠르트'의 끊임없는 변화도 고객사랑의 주 요인이다. 야쿠르트는 지난 2014년 12월 기존 '야쿠르트'에서 당 함량을 50% 이상 줄인 '야쿠르트 라이트'를 출시했다. 현재 '야쿠르트 라이트'는 형보다 나은 아우로 활약하며 오리지널 야쿠르트 대비 4배 이상 팔리고 있다. 용량 280㎖로 대폭 늘린 '야쿠르트 그랜드'도 젊은 고객에게 사랑을 받으며 편의점에서 주류를 뺀 커피, 생수 등 모든 음료를 제치고 판매량 1위도 차지했다. 2016년 4월에는 기존 야쿠르트 병을 거꾸로 뒤집은 혁신적 디자인의 '얼려먹는 야쿠르트'가 출시됐다. 지난해 4월 출시한 '야쿠르트 프리미엄 라이트'는 더 크고 더 건강해졌다. 기존 '야쿠르트(65㎖)' 대비 약 53% 커진 100㎖ 용량으로 출시된다. 500억 프로바이오틱스의 풍부한 유산균 함량을 자랑한다. 한국야쿠르트 유산균 연구 기술력으로 개발한 특허 받은 면역 유산균 'HY7712'를 넣어 면역 기능도 강화했다. 'HY7712'는 김치에서 유래한 기능성 유산균으로 면역 강화뿐만 아니라 항산화 활성에도 도움을 준다. '야쿠르트'는 일반고객 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일상과 함께 하고 있다. 식당이나 당구장 주인에게 서비스 질을 높이는 주요 수단으로 활용된다. 또한 야쿠르트 아줌마가 매일 방문하는 전국 3만명의 홀몸노인에게도 어르신들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건네는 소중한 매개체가 되며 사회적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2018-01-25 16:16:18 박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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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빙그레 바나나맛우유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빙그레 바나나맛우유 매년 수많은 신제품이 출시되지만 실제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아 오랫동안 사랑 받는 제품은 손에 꼽힐 정도다. 하지만 강산이 네 번 변했을 법한 세월 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업계 선두를 달리는 장수 제품이 있다. 올해로 출시 44주년을 맞은 빙그레 바나나맛우유다. 빙그레 바나나맛우유는 지난해 기준 바나나우유시장에서 80%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고, 하루 평균 약 80만개씩 팔리고 있다. 작년 기준 매출액은 수출을 포함해 약 1950억원에 달하며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한국적 도자기 모양에 바나나와 우유를 담다 1970년대 초반 정부가 우유 소비를 적극 장려하였지만 다수의 국민들이 흰 우유에 대해 정서적이나 신체적으로 거부반응을 나타내면서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낙농 산업 자체의 기반도 취약했다. 당시 수입 과일 가격은 매우 높았으며, 바나나는 특별한 날에나 먹는 고급 과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더욱 많은 국민들이 우유를 자연스럽게 마실 수 있을까 고민하던 빙그레 연구팀은 고급 과일인 바나나를 우유에 넣기로 하고 개발에 성공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용기가 문제였다. 고급 제품인 만큼 기존에 흔히 사용되던 비닐 팩이나 유리병과는 차별화 된 특별한 용기가 필요했다. 빙그레 관계자는 "당시 우유 용기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유리병과 비닐 팩과 차별화 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폴리스티렌을 이용해 만든 지금의 용기"라고 말했다. 용기 재질이 결정되었지만 전체적인 형태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뒤따랐다. 당시 개발팀은 한국에서 처음 만들어지는 바나나맛우유 이기에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용기의 외형을 고집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도자기 박람회를 찾았다가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달 항아리'를 보고 영감을 얻게 된다. 달 항아리를 우유 용기로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지금의 배불뚝이 모양의 용기가 탄생했다. 이 용기는 40여년간 소비자의 기억 깊숙이 각인되면서 이제는 바나나맛우유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가 됐다. 달 항아리 모양의 용기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철저한 기획과 전략이 바탕이 됐다. 또 마실 때 부주의로 용기가 약간 기울더라도 내용물이 흐르지 않도록 입구 부분에 턱을 만들고, 바나나의 노란색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반투명으로 제작했다. 기능과 모양, 컬러, 한국적 정서까지 고려한 획기적인 포장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제 달 항아리 모양은 바나나맛우유의 상징이 됐다. 바나나맛우유 용기는 다른 용기들에 비해 제작 과정이 복잡하고 비용이 더 든다. 흔히 사용하는 사출이나 압착 방식이 아닌 분리된 상, 하컵을 고속 회전시켜 마찰열로 접합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현재는 해당 설비 제조사가 없어졌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이런 방식으로 용기를 만들 수 있는 회사는 빙그레 뿐이다. 빙그레는 작년에 바나나맛우유 용기 자체를 특허로 등록하기도 했다. ◆식품업계 혁신의 아이콘 바나나맛우유는 빙그레의 재도약을 이끌고 있다. 작년 매출액은 전년 대비 약 15%이상 성장했다. 2000억 내외의 국내 식품 브랜드 가운데 연 매출 성장율이 두 자릿수를 기록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대대적인 마케팅 혁신이 바탕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2014년 경영에 복귀한 김호연 회장은 기존의 경영방식과 마케팅에 과감한 변화를 주문했다. 또한 실패를 두려워 말고 스피드 있는 의사결정과 과감하고 새로운 마케팅을 시도할 것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마케팅, 영업, R&D 조직을 개편하고 외부에서 우수 인재를 영입했다. 변화의 시작은 2016년 3월 동대문 현대시티아울렛에 개점한 옐로우카페다. 옐로우카페는 빙그레 최초의 테마형 카페로 초기부터 끊임없는 입소문을 타며 현대시티아울렛 14개 카페 매장 가운데 현재도 매출 1위를 달리고 있다. 특히 바나나맛우유 열쇠고리를 사기 위해 매장 오픈 전 긴 줄을 서는 진풍경이 몇 달간 계속되기도 했다. 이에 빙그레는 옐로우 카페 2호점을 지난해 4월 제주도에 문을 열었다. 동대문 매장보다 약 10배 크기로 확장하고 바나나맛우유를 활용한 다양한 체험, MD상품 등을 선보여 방문객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 또한 마이스트로우 캠페인은 빙그레 마케팅 혁신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새로운 마케팅을 고민하던 바나나맛우유 마케팅팀은 소비자들이 바나나맛우유를 취식할 때 스트로우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는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나만이 갖고 싶은 스트로우를 만들어 보자'는 결정을 한다. 빙그레는 지난해 7월 바나나맛우유 '마이스트로우' 영상 5편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상에 공개했고, 조회 수가 3000만뷰를 넘어서는 등 큰 화제를 모았다. '링거 스트로우' 등 3종은 출시 일주일 만에 3만개가 전량 판매됐고, 소비자들의 요청에 따라 추가 생산, 판매하기도 했다. ◆바나나맛우유 세계적 브랜드로 빙그레는 바나나맛우유를 장차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운다는 청사진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각 국에 맞는 진출 전략을 수립하는 한편 품질 개선도 지속 추진하고 있다. 최고의 품질을 가진 프리미엄 제품으로 세계시장 공략을 가속화 하겠다는 것이다. 2015년 대규모 설비 투자를 단행해 바나나맛우유의 유통기한을 15일로 늘리는데 성공했다. 바나나맛우유는 2004년부터 미국에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중국, 필리핀, 베트남 등 10여개 국가에서 판매가 크게 늘었다. 특히 바나나맛우유는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2010년 약 7억원이던 매출은 2016년 약 150억원까지 증가했다. 이에 빙그레는 2014년 상하이에 해외법인을 설립하고 15일의 유통기한을 확보한 오리지널 바나나맛우유를 통해 중국 유통망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상하이, 베이징, 칭다오 등 동부연안 주요도시에 판매망을 갖춘 빙그레는 편의점뿐만 아니라 백화점, 대형마트 등의 신규 채널에도 진출해 나가고 있다. 또 국내 주요 관광지를 방문하는 중국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프로모션을 늘리고 중국어로 '한국의 1등 바나나맛우유'라는 광고 문구를 노출하고 있다. 또한 향후 성장 전망이 밝은 할랄 시장을 겨냥해 할랄 인증도 획득했다. 빙그레 관계자는 "1974년 출시한 바나나맛우유는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객들의 큰 사랑을 받아 국내 가공유 시장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며 "이제는 바나나맛우유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제품이 되도록 계속해서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2018-01-22 11:49:35 박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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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농심 신라면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농심 신라면 국내 라면시장은 1980년대에 '사발면(1981년)', '너구리(1982년)', '안성탕면(1983년)', '짜파게티(1984년)'가 연속 히트하며 급속하게 커졌다. 농심은 뼈를 깎는 노력으로 해마다 연속 히트상품을 내놓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1985년 라면업계 2위였던 농심은 1위에 올랐다. 그리고 1986년 농심 '신라면'이 탄생했다. 신라면은 1991년부터 라면시장 1위에 올라서게 되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정상의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농심 신라면은 해외에서 대한민국을 빛낸 브랜드 톱10에도 이름을 올렸다. 브랜드가치 평가회사 브랜드스탁이 최근 '해외시장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한 브랜드'를 조사한 결과, 신라면은 휴대전화, TV, 항공사 브랜드에 이어 4위에 선정됐다. 톱10 브랜드 중 유일한 식품브랜드다. 이는 신라면이 국내 식품 최초로 미국 월마트 전 점포에서 판매되고, 항공사 기내식으로도 외연을 넓히면서 전 세계 소비자들에게 사랑 받은 결과다. ◆대한민국 1등 장수브랜드 신라면은 1986년 10월 '깊은맛과 매운맛이 조화를 이룬 얼큰한 라면'이라는 콘셉트 하에 만들어졌다. 당시 농심은 1985년 시장 1위에 올라선 다음, 확고한 독주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신라면을 개발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얼큰한 소고기장국의 매운맛을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 개발팀은 전국에서 재배되는 모든 품종의 고추를 사들여 '매운 맛'을 실험했다. 단순히 고춧가루에서 비롯되는 매운맛에는 한계가 있었다. 매운맛을 좀 더 감칠맛 나게 만드는 다진 양념(일명 다대기)으로 실험해 보면 어떨까…. 어느 날 개발팀에서 낸 작은 아이디어였다. 개발팀은 당시 유명한 음식점들을 돌면서 확보한 다진 양념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다진 양념이란 칼국수를 비롯하여 냉면, 설렁탕 등 국물 있는 음식에 가미할 수 있게 만든 우리나라 전통의 종합 양념으로 고춧가루와 마늘, 생강 등의 재료를 적절히 배합한 것이다. 라면의 맛이 스프에 있다면 라면의 식감은 면발이 생명이다. 면발도 테스트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만든 실험용 면발도 200여종류나 됐다. '안성탕면보다 굵고 너구리보다는 가늘면서 쫄깃한 식감'을 위해서 하루 종일 면만 실험했다. 당시 신라면 개발에 참여한 연구원은 "하루에 평균 세 봉지 정도의 라면을 먹어가며 초시계로 시간을 재고 비커와 온도계로 물의 양과 온도를 측정하며 맛을 감별해야 했다"고 말했다. '깊은 맛과 매운맛이 조화를 이룬 얼큰한 감칠맛'을 가진 신라면은 이렇게 해서 세상으로 나왔다. 농심 측은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어디에 내놓아도 자신 있는 제품이었다고 설명했다. 신라면은 출시되자마자 가파른 매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기 소비자들은 '얼큰한 국물맛도 좋고 면도 맛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출시 첫해 석 달 동안 30억원에 육박하는 판매고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1987년에는 무려 180억원을 상회하는 매출을 올리며 국내 라면시장의 대표주자로 뛰어 올랐다. 신라면은 1991년 라면시장 1위에 올라선 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정상의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현재 신라면은 국내외 약 7천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식품한류를 선도하고 있다. ◆辛라면 네이밍 "매운 라면이니까 辛(신)라면으로 합시다." 출시 당시 신춘호 사장의 말이다. 그러나 경영진들은 반대했다. 출시 당시만 해도 제품 대부분이 회사명을 중심으로 되어 있었다. 또한 국내에서 한자를 상품명으로 쓴 전례가 없었다. 하지만 발음이 편리하고, 소비자가 쉽게 주목할 수 있으면서도 제품속성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네이밍이 필요했다. '매운라면'이라는 제품 콘셉트가 명확히 드러나고 한자를 사용해 독특한 분위기와 차별화된 느낌을 줄 수 있는 한 음절 이름의 '辛라면'이라는 브랜드가 탄생했다. 한편 辛라면의 상표등록 과정에서도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식품위생법은 '식품의 상품명 표시는 한글로 하여야 하고 외국어를 병기하고자 할 때에는 한글 표시보다 크게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辛'이라는 한자가 문제였다. 이에 농심은 수천년 동안 한자 문화권에 속해 온 우리나라에서 과연 한자를 외국어로 분류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한지, 그리고 즉각적인 의미 전달과 이미지 부각을 생명으로 하는 상품명에 한글보다 한자를 크게 쓸 수 없다는 규정이 합리적인지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다. 법규 때문에 제품명을 바꿔야 하는 난처한 상황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규제 때문에 식품산업의 발전이 저해될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 보사부(현재 보건복지부)에서 농심의 합리적인 건의를 받아들여 1988년 10월 법 조항을 개정했다.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로 지난해 6월 신라면은 '미국 월마트 전 매장에서 판매되는 최초의 한국 식품'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미국 전역에 있는 4692개의 월마트 전 매장에 입점을 완료했기 때문이다. 월마트 전 매장에 신라면이 입점된 것은 그만큼 신라면의 브랜드 파워가 글로벌 무대에서 통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월마트가 미국 전역에서 판매하는 식품은 코카콜라, 네슬레, 펩시, 켈로그, 하인즈 등 세계적인 식품 브랜드뿐이다. 신라면은 미국 현지에서 글로벌 브랜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농심 관계자는 "미국 전역의 월마트를 판매 채널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한국 식품 브랜드로는 놀라운 일"이라며 "4692이라는 숫자가 단지 매장 수를 뜻하는 게 아니라, 미국 전역을 아우르는 자체 판매망을 갖췄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세계를 누비는 신라면의 인기는 하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기내식은 제한된 음식만 실을 수 있어, 세계인의 입에 맞는 보편적인 맛으로 인정받는 제품만 선택을 받는다. 지난해 업계 최초로 국내 전 항공사 기내식 공급 체계를 갖춘 농심은 여러 외국 항공사들의 러브콜도 받고 있다. 농심 신라면을 기내식으로 공급하는 외국항공사 수도 20곳을 돌파했다. 지난해 멕시코 국적기 '아에로멕시코'을 통해 처음으로 남미 항공사와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신라면의 비행 노선도 확대되고 있다. 과거에는 한국을 오가는 노선에서만 신라면을 맛볼 수 있었지만, 최근에는 해외 노선으로 신라면의 활동 무대가 넓어지는 추세다. 현재 신라면은 업계 최초로 수출 100개국을 돌파하면서 해외시장에 한국의 매운맛을 전하고 있다. 일본, 중국에서부터 스위스 융프라우 정상, 중동 및 아프리카, 네팔 히말라야, 칠레 푼타아레나스까지 세계 방방곡곡에서 민간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신라면의 식품 외교는 현재 진행형이다.

2018-01-11 15:49:47 박인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