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사 올 사업계획 들여다 보니 "AI·VR·블록체인이 없다"
"현덕공은 지금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영웅이 누구라고 생각하시오?." 유비는 한껏 몸을 사리며 원소·손책·유표 등의 이름을 댔다. 조바심이 난 조조가 탁자를 탁 치며 말했다. "아니오! 천하에 영웅은 바로 그대와 나, 둘밖에 없소!." 속내를 들킨 유비가 당혹해 하는 찰나 하늘에서 천둥이 쳤다. 유비는 깜짝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리며 주안상 밑으로 코를 박고 부들부들 떨었다. 소설 '삼국지연의', 서기 199년 중국 중원에서 조조가 유비를 불러 시대의 영웅을 논할 때 나오는 한 장면이다. 겁쟁이인 줄 알고 조조는 유비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천하를 도모하려는 큰 뜻이 없는 듯 속이려 도회지계(韜晦之計)를 쓴 것이다. 어두운 터널에서 '도회'(칼날의 빛을 칼집에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 하는 우리 기업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주주총회소집결의를 통해 본 기업들의 올해 행보의 키워드는 '정중동(靜中動)'으로 요약된다. 인공지능(AI), 가상현실(VR) 등 4차 산업과 로봇, 블록체인사업 등 미래 먹거리 만들기에 나섰던 지난해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A그룹 고위 관계자는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로 살람살이가 더 팍팍해졌다. 여기에 '스튜어드십 코드'라는 보이지 않는 창이 기업들의 투자의욕을 꺾고 주주 마음을 달래는데 나서게 한다"면서 "다만 겉으로 드러난 급박한 움직임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내부적으로는 생존을 위한 치열한 노력이 있다"고 전했다. ◆사업 내재화·다각화 통한 수익성 증대 7일 메트로경제가 유가증권상장사 553곳이 제출한 '주주총회소집결의'(2월1일~3월 6일)를 분석한 결과 73개 기업이 신규사업 또는 사업다각화 계획을 밝혔다. 신규사업을 밝힌 기업들은 대부분 수익의 질을 높이기 위해 사업 내재화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하나투어는 보험대리점업을 사업목적에 추가하는 정관 변경 의안을 올렸다. 최근 해외여행객 사이에서 여행자보험 가입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판매를 통해 새 수익원을 창출하겠다는 복안이다. 또 한샘은 부동산경기 침체로 주택거래량이 줄어들고 있는 반면 국내 노후주택의 리모델링 수요는 늘고 있다는 점에서 '화물자동차 운송주선업', '렌탈임대업', '청소, 수리 유지관리서비스업' 등 신규사업을 추가키로 했다. 제주항공은 오는 27일 열릴 정기주주총회에 '일반음식점' 사업목적을 추가하는 안건을 상정할 계획이다. 올해 5월 인천국제공항 라운지 개장을 앞두고 음료, 식사 등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현대글로비스는 정관의 사업 목적에 '포장시험·연구·서비스업'을 신설했다. 자동차 부품을 해외법인에 납품하는 과정에서 제품이 손상되지 않도록 정교하게 포장하는 기술 등을 연구하고, 시행하기 위한 목적이다. 또 '온라인 중고차 거래 관련 일체의 사업'을 추가했다. 현대글로비스는 경기도 분당, 시화, 경남 양산 등 3곳에서 오프라인 중고차 경매를 실시하고 있는데, 온라인에서도 경매에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계획이다 유통사의 경우 규모의 경제를 위한 대규모 투자보다는 판매 물건의 다각화를 위한 정관변경안이 주를 이뤘다. 먼저 현대홈쇼핑은 28일 열리는 주주총회에서 '자동차판매업'을 사업 목적에 추가하는 안건을 상정키로 했다. 보험감독 규정 개정으로 홈쇼핑은 수입차 뿐만 아니라 국산차까지 판매할 수 있게 돼서다. LF는 '주방용품 제조 및 판매업'을 '주방용품, 전기·전자용품 제조 및 판매업'으로 변경하는 안건을 주총에 올렸다. 온라인 쇼핑몰인 LF몰이 패션을 넘어 토스터기, 에어프라이어기 등 소형가전을 판매하고 있는 만큼 이를 사업목적에 추가한 것이다. 롯데하이마트는 여행업, 관광여행 알선업 등에 진출할 계획을 밝혔고 ,광주신세계는 '귀금속 제조 및 도소매업'을 신규사업에 추가했다. 캐피탈 이코노믹스는 "최근 서베이 지표로 볼 때 기업들은 생산을 큰 폭으로 감축함과 동시에 재고 또한 점진적으로 축소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대응방식으로 볼 때 기업들이 전반적 경기 둔화에 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씨티은행은 "한국의 2월 수출 데이터가 예상을 하회하면서 향후 전망 또한 부정적이다"고 전망했다. 이같은 분위기는 한국경제의 현주소와 꼭 닮아있다. 무디스는 지난 4일 "투자 사이클 약화와 글로벌 무역 감속이 경제 모멘텀을 해쳤다"며 "또 중국의 중간제품 수요 둔화, 특히 반도체에 대한 수요 침체는 수출과 투자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한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기준 성장률은 올해 2.1%, 내년은 2.2%로 낮췄다. ◆ 삼성 현대차 SK 한화 등 대기업은 갈 길 간다 재계는 장기계획 아래 인수합병(M&A)이나 대규모 투자를 통화 핵심산업의 고도화에 나서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미래 먹거리를 찾고 있다. 실제 삼성전자는 지난해 8월 AI·반도체 등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고 2021년까지 총 180조원을 투자한다고 밝힌 바 있다.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NXP, 자일링스, 인피니언 등의 인수를 검토 중이란 소식이 심심찮게 들린다. 현대자동차는 신차 개발과 자율주행 등 미래 기술에 2023년까지 5년간 45조30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연평균 9조원 이상 투자를 지속하겠다는 뜻이다. 특히 3월 주총에서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현대자동차 대표이사 자리에 오를 경우 공격적인 투자가 예상된다.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대표이사에 올라 새로운 리더십으로 그룹을 진두지휘하게 될 정 수석부회장이 단기 투기 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장기 주주들에게 도움이 되는 미래 성장에 집중할 것이란 게 재계의 관측이다. 최태원 회장이 이끄는 SK그룹과 SK하이닉스는 용인에 큰 투자(120조)를 약속했다. SK그룹은 또 향후 5년간 5대 중점 육성분야에 총 37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LG그룹의 핵심인 LG전자는 사업개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연료전지 자회사를 청산하기로 한 데 이어, 수(水)처리 관리·운영 자회사와 환경시설 설계·시공회사 매각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비주력 사업을 정리하고 전자장비(VC), 로봇, 인공지능(AI) 등 미래 성장동력에 집중 투자하겠다는 계획이다. LG그룹은 지난해 구광모 LG그룹 회장 취임과 함께 공격적인 M&A행보를 보이고 있다. 한화그룹은 김승연 회장의 경영복귀에 내심 기대를 건다. 한화그룹은 지난해 향후 5년간 총 22조원을 신규 투자하고, 3만5000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김 회장이 복귀하면 M&A 등도 더 탄력을 받게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