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1>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1977)
디지털 시대가 속도를 내고 있지만 인문학은 우리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학문이다. 사람과 관련된 근원적인 문제와 사상, 문화 등을 연구하는 인문학. 인간의 가치와 제반 문제를 되돌아 본다는 측면에서 소중하다. 메트로신문(메트로경제)은 인문학자이자 영화평론가인 안치용 ESG연구소 소장의 글을 연재한다. '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라는 제목이다. 부제는 '100권의 고전, 100개의 세계'다. <편집자주> [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100권의 고전, 100개의 세계' <1>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1977) -폐지를 35년 압축한 남자는 어떻게 승천했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한 세계의 종말을 목격하는 늙은 몽상가의 긴 명상'이라고 소개되는데, 좋은 소개인 것 같다. 작가 보후밀 흐라발(1914~1997)은 '너무 시끄러운 고독'과 관련하여 "나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세상에 나왔다"라고 말했다. 짧은 책이고, 주인공인 한탸라는 폐지 압축공이 평생을 그 일을 하다가 인생을 마무리하며 스스로 폐지 압축기에 들어가서 자신마저 압축되는 과정을 그렸다. 한탸는 이 일에 35년을 종사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작가가 60대 초반 나이에 출간했다. 1977년 체코 프라하에서 지하 출판으로 유통되었다가 1980년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정작 체코에서는 12년이 지난 1989년에야 공식 출판될 수 있었다. 흐라발에게는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는 표현이 따라다닌다. 잘 어울린다. 그의 삶과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약간의 슬픔이 편재(遍在)하지만 너무 흥건하지 않게 바닥을 적신다. 흐라발은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려다가 5층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했다고 돼 있지만, 5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려다가 자살했다고 할 수는 없을까. 흐라발은 체코의 공산 체제에서, 브레히트의 소설 '예라고 말하는 사람과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Der Jasager und der Neinsager)'의 주인공처럼 적극적인 저항이 아니라 수동적인 저항을 택했다. '아니야'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압제하는 폭력이 스스로 쓰러질 때까지 폭력보다 오래 살아남는 쪽을 선택한다.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라는 1장의 문장에서 이 돈키호테 캐릭터가 외형상 '예라고 말하는 사람과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과 대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맥락을 같이한다는 사실을 놓쳐선 안 된다. 암울한 시대에서 흐라발은 조국을 버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유사 공산주의의 폭력과 관료 체제에 승복하지 않으면서 조용한 돈키호테 처럼 버텼다. 소설의 주인공 한탸처럼.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진실과 자기 눈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 사이의 괴리를 겪는 돈키호테는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간주되기 쉽지만, 전지적 시점에서 그려낸 텍스트를 본 독자에게만 그럴 뿐, 돈키호테 자신의 1인칭 시점에서 보면 그는 그 괴리 속에서 항상 힘들어하고 슬퍼하고 고통받는 인물이다. 그 사람은 투쟁해야 하는데, 풍차가 괴물이 되기도 하는 기이한 세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그 이미지가 변형된다. 돈키호테는 돈키호테이되, 그를 그냥 쓰는 게 아니라 조금 더 업그레이드하여 등장시킨다. 바로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는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라는 문장에 궁극적 실체를 드러낸다. 마지막에 압축기 속에서 자발적으로 압축돼 승천하면서 도달하는 경지를 지목한 문장이다. 영원과 무한을 보고, 이 책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예수와 노자를 염두에 뒀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예수가 얘기한 게 영원이라면 노자가 얘기한 것이 무한인데, 이 책의 두 축에 해당한다. 압축기에 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노자의 업에 해당한다면, 35년 동안 폐지를 압축하는 일 자체는 예수 같다. 작가 흐라발이 하층민의 삶을 전전했고 하층민의 삶을 그려내는 데 열의를 가졌다는 점, 그리고 주인공 한탸가 쓰레기 더미에서 스스로 다양한 교양을 가져왔다는 점이 하층민과 함께 구원을 얘기한 예수를 닮았다. 노자는 대중의 구원 사업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진 않았다. 그러므로 폐지를 압축하는 일에 가장 어울리는 학위가 필요하다면 아마 신학일 것이라는 표현이 저절로 도출된다. 신학은 당연히 예수와 관련된다. 신학과 폐지를 줍는 35년, 나중에 압축의 형태로 맞는 죽음, 그리고 예수와 노자가 나온다. 예수는 미래로의 전진과 연관되고 노자는 근원으로의 후퇴를 뜻한다. 미래로의 전진은 나선이 되고, 근원으로의 후퇴는 원이 되는데, 마지막에 두 가지가 융합하며 자신이 승천하는 구조를 이룬다. "나는 이 책을 쓰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라고 말한 작가가 60세가 넘어서 많은 교양과 지식을 쌓고 스스로 현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쓴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가 소환되는 건 자연스러운 장면이다. 예수의 십자가형과 함께 인류사의 가장 유명한 죽음으로 기록된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관련하여, 스스로 죽음으로 걸어 들어간 소크라테스에게 다른 선택지가 가능했지만, 스스로 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 그런 죽음을 맞았다는 해석이 유력하게 제기된다. 흐라발도 마찬가지로, 젊고 패기 넘치는 감성과 재능으로 소설을 쓰는 단계가 아니라 많은 것이 완성된 단계에서 소설을 쓴 사람으로서, 자신의 지적인 성숙 단계를 소크라테스에 빗대 설명했을 수 있다. 슬프고 잔잔하지만 보기에 따라 교만한 소설이기도 하다. 사회주의권이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는데, 종교에 대한 신성시가 덜하고, 예수와 노자를 동일하게 비교하면서 예수와 노자를 아울러서 자신이 소크라테스가 된다고 한다. 중요한 비유로써 형상화한 압축기. 35년 동안 구동한 그 압축기 속에 한탸 자신이 들어가 압축됨으로써, 압축해온 그 속에 자신이 다시 압축되어 소설의 주인공이 어떤 성취에 도달하는 것을 독자는 볼 수 있다. 이 모습은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자, 소크라테스적인 죽음이며 승천이기도 하다. 예수와 노자를 아우르는 현자의 궁극의 삶이다. 많은 소설에서 소녀나 여신을 구원의 매개체로 생각하듯, 여기서도 일론카라는 집시 여인을 구원의 매개자로 설정한다. 처음에 '진공 상의 소통'을 통해 일론카와 주인공 한탸가 맺어지고, 일론카가 어느 날 국가의 폭력에 의해서 아우슈비츠의 소각로에서 불타버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 후 나중에 한탸가 압축기에 들어가 승천하는 순간 일론카와 재회한다. '일론카'라는 이름은 끝에 가서야 한탸가 알게 된다. 일론카가 신비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보내주고 하나의 이름은 하나의 실체로 받아들여진다. 이름을 알면서 한탸와 일론카는 다시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됨으로써 지적인 방황 속에서 현자가 되고, 구원의 도달과 함께 구원의 명확한 형태를 얻게 된다. 소설에서는 두 개의 고독이 발견된다. 첫 번째는 1장에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라고 명기된 '러브스토리'이고, 두 번째는 일론카다. '러브스토리'를 일론카와 연결 짓는 건 자연스러운 추론이지만 동시에 중의적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단박에 파악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 사랑과, 구원이라고도 하는 삶을 사랑하는 최종적인 사랑 앞에서 한탸는 고독하다. 구원이라는 것이 예수와 노자를 섭렵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는 얘기를 한다. 마침내 구원은 현실의 생생한 장(場)에서 구체적인 사랑과 구체적인 인간을 통해서 대면할 수 있으며, 직접적인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통해서 구원을 대면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만차라는 다른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그려지긴 하지만, 어찌 됐든 구원의 매개자 역할을 하는 이는 일론카다. 35년 동안 폐지를 처리하는 일을 했고, 폐지를 처리하는 중년의 러브스토리는 일론카를 통해서 완성된다. 그럼으로써 '나'는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래서 작가가 이 책을 쓰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말했을까. 만차 이야기는 일론카의 구원과 다른 의미를 드러낸다. 구원이 아니라, 삶에 대한 통달과 지혜를 흥미롭게 시전한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적인 욕망과는 다르다. 만차의 러브스토리가 탐욕스러움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견뎌야 할 치욕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족쇄나 짐 그리고 불명예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 삶 속에서 좌고우면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미래로의 후퇴이든 근원으로의 전진이든, 미래로의 전진이든 근원으로의 후퇴이든, 그것들이 뒤죽박죽된 상황에서, 상승을 향한 염원과 성취 또는 일종의 득도나 득음의 과정을 통해서, 또 자기를 기꺼이 내어놓고 자기를 풀어버리는 과정을 통해서 지식을 통하지 않는 경로로 현인이 되는 길이 있다. 그 경로에 a에서 z가 있다면, 만차는 z에 해당할 것이고, 그러므로 만차도 승천한다. 만차는 치욕을 떨구고 날개를 펄럭여서 하늘로 올라가고, 한탸는 자신이 35년 동안 형성한 압축기 속에서 자신이 압축됨으로써 모종의 하강을 통해 승천한다. 두 사람이 승천해서 만날 것 같지만, 만나지는 않는다. 두 러브스토리는 쪼개져 있다. 구원과 관련된 러브스토리는, 비천하고 본능적인 집시여인이지만, 영원과 소통할 줄 알며 세속적이지 않은 일론카를 통해 한탸가 추구한 지의 영역을 보완하는 영적인 힘과 결부함으로써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한다고 설정한다. 그렇게 두 러브스토리는 하나가 된다. 만차와 일론카를 통해서 현인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보여준 이 소설이 2000년이 지난 후에는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동급의 작품으로 인정받을지 누가 알겠는가.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ESG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