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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모래밭의 가을편지

해는 크게 둥글어가고 있었다. 받아 안을 듯 해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았던 때가 또 있었던가. 가을이 깊어가는 해질녘의 고즈넉한 서해안 대천해변. 그 모래밭 한복판에 오도카니 앉아 바다 위에 떠 있는 해를 바라보다가 탄성을 질렀다. 벌거벗은 마음은 벌써 풍덩! 수평선 끝자락에 달려가 있었다. 물결치자 그 이글거리던 황금빛 노을이 해변 가장자리까지 밀려와서는 황홀하게, 아늑하게 가슴을 적신다. 낙조가 왜 위로가 되고 휴식이 되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호젓한 가을바다! 그 황혼의 무대에서 동화 속 주인공마냥 모래밭을 거닐다 또 하나의 감탄사를 만났다. 석양빛에 요철이 도드라져 보이는 황금 낙엽들. 잎사귀처럼 생긴 발자국, 알고 보니 갈매기들의 맨발 자국이다. 드넓은 모래밭이 온통 황금 낙엽을 수놓은 카펫 같다. 놀랍다. 언제 그 많은 발자국을 남긴 것인가. 저만치 갈매기 떼가 뒤뚱뒤뚱 낙엽을 연신 찍어내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모래밭과 그 주변의 바다 자연을 지키려는 원초적 몸짓인지도 모른다. 원시의 모래밭. 그곳을 스쳐갔을 발자국들을 떠올려본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저 아득한 태고적 해변을 사박사박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더듬어본다. 조상들이 남긴 발자국 위로 숱하게 겹쳐졌을 후손들의 발자국들을. 오래된 발자국은 들숨날숨 날름거리는 파도에 의해 지워졌고, 사람들은 그 때마다 새 발자국을 새겼다. 바다는 그 상흔을 고운 모래로 살포시 감싸주기도 했지만, 때론 모래톱을 휩쓸고 갔다. 그랬다. 사람들에겐 바다는 세파의 흔적이었다. 사람들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팍팍한 마음의 발자국을 지우려 바다로 달려가곤 했다. 청춘들은 그랬다. 하얀 모래 종이에 발자국을 꾹꾹 눌러 편지를 썼고, 파도가 읽고 지웠다. 그럴 때마다 갈매기들이 힐긋 쳐다보곤 했다. 청춘들은 사무치는 그리움을 바다를 통해 흘려보냈다. 더러는 수평선 너머 섬마을에 있을지도 모를 짝에 대한 막연한 설렘으로 바다를 향해 온몸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면 건너 섬마을 누군가의 애끓는 사연이 바다를 통해 밀물져왔다. 청춘남녀가 유독 해변 가장자리 물길을 따라 거니는 건 발자국을 찍고 지우면서 자신의 마음을 투영하고 싶어 함인지도 모른다. 섬마을 청춘들은 저 바다가 육지로 변신하는 신통력을 부려줄 것을 학수고대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더라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이란 노랫말이 공전의 히트를 친 시절이었다. 청춘의 바다는 마음의 바다였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 이후 꿈결 같은 오작교들이 속속 세워졌고, 청춘남녀의 사랑이 꽃폈다. 석양만 감상하겠노라고 바닷가에 앉았지만, 애초에 가슴 밑바닥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는지 모른다. 그저 오랫동안 시간 모르게 앉아 있고 싶었다. 바다는 그러나 몸 색깔을 표출해 밤이 깊어 감을 알려주고 있었다. 검푸르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선이 어떤 곳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 하늘이 가깝게 느껴질 뿐이다. 물바람이 코를 스친다. 확 밀려오는 소금냄새를 맡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달과 별 그리고 자우룩이 나는 갈매기가 추억 한 장을 담아낸다. 물바람에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이다. 기다란 호흡으로 넘실거리는 파도. 밤바다는 잠잠하고 고요했다. 허연 잔물결이 조신하게 다가와 모래를 적신다. 고단한 발자국들을 지운다. 찌든 감정의 찌꺼기들이 조각조각 부서진다. 모래알을 만지작거리는 물결소리가 웅숭깊고 보드랍다. 물결마다 호흡이 묻어 있는 것이다. 시월의 반환점을 향해 달려가는 가을바다는 그렇게 농익어가고 있었다. 가을이 주는 진정한 행복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2017-10-11 08:00:37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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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덤의 행복

동네 전통시장이 벌써부터 달떴다. 추석 대목! 점포들이 다닥다닥 어깨를 맞댄 장터 안이 수런댄다. 매대에 앉은 성수품들은 나 어떠냐고 고개를 드민다. 비좁은 통로를 오가는 손들도 왁자하다. 그 북적거리는 이맘때면 내 오랜 기억의 아래층에 쟁여둔 삽화 한 장을 끄집어내곤 한다. 흥정이 있고, 덤이 풍성하고, 정이 꽃피는 시골장터. 그 따스한 장터의 갈피들이 세태 변화의 와류 속에 혹여 색 바랜 건 아닐까, 시장 한 복판을 지날 즈음 이런 조바심이 일었다. 그러나 콩나물 앞에선 쓸데없는 기우다. 세상 셈법이 냉정하게 다 바뀌어도 콩나물에는 그 때 그 시절의 인심이 물씬 묻어난다. 한 옴큼 집어서 덤으로 얹어주는 할머니의 손마디엔 여전히 그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었던 거다. 차라리 콩나물이 손가락 틈새로 흘러내렸더라면, 그래서 따뜻한 마음만 덤으로 받았더라면 할머니의 손이 저토록 주름져 보이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굴곡진 할머니의 손마디에서 계산속이 빠른 세파에 착하게 맞선 고단한 흔적이 읽힌다. 콩나물의 덤은 거저 조금 더 얹어주는 단순한 인심이 아니다. 고부가가치가 숨쉰다. 살맛나게 하는 이만한 동력이 또 있을까. 콩나물의 덤은 사람과 사람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매개체며, 어릴 적 동화를 들려주는 이야기보따리며, 때론 장바구니 물가의 깊은 시름을 위로해주는 경제교과서다. 콩나물도 마음이 담기면 귀한 보석이 되는 걸까. 초라하지만, 콩나물은 세파에 닳아도 우리네 인심만큼은 든든하게 지켜온 버팀목이었다. 장터는 콩나물이 있어 늘 따스하다. 그러고 보니 콩나물은 타고난 본성이 착하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콩나물시루에 물을 부어도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 인고가 갸륵하고, 포용이 기특하기까지 하다. 희망을 품고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요 이상의 물을 탐하진 않는다. 물욕이 없음일까. 경쟁이 치열한 지구촌의 축소판 같은 콩나물 군락은 언제 보아도 옹기종기 평화롭다. 아, 저 질긴 진통과 세월 속에 평온을 잃지 않는 콩나물이 또 하나의 덤을, 가르침을 얹어주는구나! 콩나물을 파는 할머니는 진정한 덤의 값어치를 간파하고 있었다. 덤을 얹어줌으로써 외려 얻게 되는 행복한 덤을. 손님들의 미소를, 기쁨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베풂의 뿌듯함을. 덤을 주고 덤으로 얻는 행복! 할머니는 그걸 깨닫고 있었다. 콩나물에는 이심전심의 유전자가 흐르고, 행복은 거창한 게 아니라 작고 조촐한 기쁨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다. 정성이라는 덤을 얹힌 음식을 맛있게 먹는 아이를 쳐다보는 엄마의 표정을 보라.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를. 시루 안에서 꼬물거리는 콩나물을 보면 악보의 음표들이 춤을 춘다. 그 음표에는 삶의 애환을 담은 노랫말이 스며있을 것이다. 콩나물의 덤에서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 까닭이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덤은 화롯불처럼 따스한 온기를 은근히, 오래도록 유지하고 있는 게 그 본질일 것이다. 그러나 거죽만 뜨겁고, 따스함이 마음속까지 전해지지 않는 어설픈 덤은 감동적이지 않다. 왠지 모르게 세상엔 공짜란 없다는 뒤끝이 꿈틀댄다. 범속한 계산이 깔려 있음이다. 내 기억의 한가위 삽화에는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떠 있다. 달이라는 게 참 묘하다. 따스한 가슴으로 바라보면 달빛이 그렇게 온화할 수가 없다. 달빛에 무슨 무게가 있을까 마는, 분위기에 따라 달빛의 무게가 다르게 보인다. 달빛은 마음의 거울인 것이다. 나물의 감초격인 콩나물의 덤이 이번 한가위 달빛을 부드럽고 화사하게 해줄 것이다. 인심이 풋풋한 감동 이야기에 흐뭇해하는 달의 표정이 보이는가? 동산 위에 떠오른 내 기억의 달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2017-09-27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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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창업 37.5도] 창업 1번지, 판교의 스타트업들 (1)온라인에서 최신 IT기술을 배운다 '인프런'

[청년창업 37.5도] 창업 1번지, 판교의 스타트업들 (1)온라인에서 최신 IT기술을 배운다 '인프런' "IT 분야에서는 새로운 기술이 계속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 분야 종사자들이 일하면서 새 기술을 습득할 인프라가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판교 경기문화창조허브에 입주해 있는 인프랩(InfLab)의 이형주 대표는 '인프런(Inflearn)' 서비스를 내놓게 된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인프런은 IT 분야에 특화된 온라인 지식공유 플랫폼으로 현업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만든 수준 높은 교육 콘텐츠들이 올라와 있다. 현재 6만여 명의 회원들이 비용을 내고 이 콘텐츠들을 이용하고 있다. 대학 시절부터 이 대표는 IT 분야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학원 교육비 부담에 4년 전에야 웹 개발자로 일하게 됐다. 꿈은 이뤘지만 다른 사람에 비해 늦은 나이에 출발한 까닭에 자신을 더욱 성장시킬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했다. 자신을 이끌어 줄 선배나 좋은 프로젝트를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미국의 유데미(Udemy)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했다. 유데미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IT 기술 교육 플랫폼이다. 이 대표는 유데미로 독학하면서 한국에도 비슷한 서비스가 있다면 자신처럼 배움에 목마른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인프런의 목적은 누구나 원하면 IT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을 더욱 성장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이 대표와의 인터뷰를 간추린 것이다. -인프런 서비스란? "IT 기술에 특화된 온라인 지식공유 플랫폼이다. 인공지능, 머신러닝, 웹 제작, 앱 개발, 온라인 마케팅, 3D, 모바일게임 제작 등의 분야에서 실제 현업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제작한 양질의 교육 콘텐츠를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다. 서비스를 시작한 지 1년 10개월정도가 지났는데, 현재 6만여 명의 회원이 우리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순도가 매우 높은 회원들이다. 실제 비용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이용하는 회원들이 많다는 의미다. 콘텐츠 이용료는 콘텐츠 게시자가 정한다. 무료인 콘텐츠를 비롯해 이용료는 제각각이다." -다른 교육 서비스와의 차이점은? "4차산업혁명시대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라 IT 신기술에 대한 수요는 무척 크다. 현재 우리나라의 IT 직업교육은 오프라인 교육이 대부분인데 사설학원에서 이뤄지는 교육은 한달에 몇백만 원씩이나 해서 비용 부담이 너무 크다. 반대로 수업료가 싼 곳은 수업의 질이 기대하는 수준에 너무 못미친다. 10년전 제가 비용 부담 때문에 IT 직업 교육을 포기한 때랑 나아진 게 없다. 저는 대학 시절, 다른 분야 전공자라 학원에서 배워 IT 분야에 취업하고 싶었는데 대학 등록금 수준의 학원비로 인해 포기했다. 4년전에야 웹개발자로 꿈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에 온라인 지식공유 플랫폼이 있기는 한데 IT 기술에 특화돼 있지는 않아 이 분야 종사자들의 기대수준에 못미친다." -인프런 서비스를 시작한 계기는? "미국에는 유데미(Udemy)라는 서비스가 있어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다. 저도 여기서 많이 배웠다. 유데미를 통해 배우면서 우리나라에도 이런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말로 된 콘텐츠가 있다면 누구나 성장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1년 10개월 동안 서비스를 한 결과, 우리사회에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지방에 있는 회원 한 분은 '앱 개발을 배우고 싶었는데 지방이라 기회가 없었다. 인프런을 통해 내 꿈을 이룰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IT회사 신입사원인 회원 한 분은 '새로운 지식을 얻고 싶어도 제대로 얻을 곳이 없었는데, 인프런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 덕분에 회사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고 했다. 인프런 서비스가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경기문화창조허브에 입주한 이유는? "창업을 할 때 장소가 주는 이점이 있다.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게 규칙적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특히 허브에 입주하면 사무실 비용 부담이 없다. 여기에 더해 교육 프로그램, 네트워크 프로그램, 피칭행사가 많아서 큰 도움이 된다. 홍보나 사업 노하우 등에 대해 많이 배운다. 이곳에서 피칭행사가 있을 때면 다른 분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서비스나 제품을 홍보하는지 보고, 벤치마킹하기도 한다. 저희 팀원들도 최신기술에 대한 교육프로그램을 자주 이용한다."

2017-09-24 17:07:06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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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들녘에도 흥은 있다

신명이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잔치가 갖는 의미는 각별했다. 이웃 간 얇아진 정(情)을 잔치를 통해 두텁게 일궜고, 동구 밖 마을과의 골 깊은 갈등의 벽도 잔치를 통해 허물었다. 잔치는 들녘을 기름지게 하는 물꼬였으며,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는 소통의 장이었다. 건너 마을 사람들에겐 새로운 만남과 이벤트를 기약하는 갈망이었다. 삶이 버거울 때 사람들이 잔치마당을 기웃거리는 까닭은 그 질긴 질량을 들끓는 설렘의 용광로에 연소하고 싶음에서다. 먹고, 마시고, 춤추는 잔치! 사람들은 그랬다. 잔치에 자신을 투영해 세속의 더께에 접어뒀던 흥의 날개를 한껏 펼치고자 했다. 흥이란 그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화수분이기에 잔치판이 벌어지는 마을마다 신명이 났다. 사람들은 거기에 스토리를 입혀 기적 같은 전설을 꽃피웠다. 크고 작은 잔치를 통해 마음을 텄고, 길을 텄으며, 장터를 열었던 것이다. 잔치는 사람을 구별하지 않았다. 모두를 껴안고 포용했기에 결집력은 강했고, 흩어졌던 마음들이 하나로 모아졌다. 그 마을잔치가 축제라는 이름으로 흥행하고 있다. 전국의 축제는 줄잡아 2천여 개. 엊그제 사람들은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펼치는 명인의 줄타기 구경에 푹 빠져 있었다. 마을은 축제 분위기에 들떴다. 허공의 외줄 위로 사뿐 올라 아슬아슬 묘기를 부리는 명인의 몸짓. 그는 파란 가을 하늘의 나비였다. 산들바람 한 점이 살랑거렸다. 가느다란 외줄은 흔들거렸다. 그도 흔들거렸다. 모두가 흔들거렸다. 이런 걸 두고 생각과 행동이 하나 되는 혼연일체라고 했더랬다. 축제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일까. 명인은 외줄에서 박차 올라 점프했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번엔 양반다리로 앉은 자세에서 펄쩍 앞으로 나아간다. 묘기는 극적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관람객을 들었다 놨다 했다. 줄 위에서 무릎으로 빠르게 걷는 장면에선 함성이 터져 나왔다. 풍물패의 장단에도 흥이 돋아났다. 축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줄타기 공연에는 스릴 넘치는 곡예만 있는 게 아니다. 풍자와 유머, 해학도 곁들여진다. 여기저기서 웃음꽃이 만발했다. 외줄을 건너는 명인의 몸짓에서 소통하는 세상을 본다. 허공에서 한 발짝씩 걸음을 뗄 때마다 소통의 눈금이 점점 또렷해지고 촘촘해지는 신기루를 본다. 공자는 일찍이 이렇게 설파했더랬다.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즐거우면 멀리서 사람들이 오게 돼 있다고. 그랬다. 흥이 넘치는 축제마당이라면 전국 방방곡곡 어디든 달려왔다. 여행과 관광, 그리고 이벤트가 믹스된 퓨전축제! 볼거리, 먹거리, 놀거리, 즐길거리 등의 흥행 요소가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여서일까. 가을축제의 향연은 저 스스로를 설명하려 나서지 않아도 풍성한 이벤트를 말하고, 넉넉한 마음을 말하고 있다. 풍성하고 넉넉한 곳에는 사람들이 들썩거린다. 정감이 넘실거린다. 가을이라는 간판을 내건 축제가 유난히 많은 까닭일 것이다. 주제와 내용은 저마다 기발하고, 규모와 성격도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마음을 달뜨게 하는 본질은 똑같다. 비록 내용이 허접할지언정 한데 어우러져 흥을 돋우고 교감하려는 태생적 본능이 꿈틀거린다. 사람들은 그 본능적 흥을 발산하려 끊임없이 축제를 갈망하는지도 모른다. 이 축제의 계절, 마음속에 한 폭의 축제 풍경화를 그려본다.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들녘. 화사한 햇살이 날개를 펼친다. 바람이 일렁이자 누렇게 수놓은 그 무대 위에서 벼 이삭들이 춤을 춘다. 그 춤추는 흥을 형형색색으로 입혀본다. 이 가을 이런 풍경화를 그려보는 건 저 신성한 자연의 흥과 호흡하고 싶음이다. 화폭에 큰 창문이 있다면 커튼을 걷어놓고 들녘을 가까이 불러놓겠다.

2017-09-20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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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느린 우체통의 경쟁력

하늘이 푸르게 저렇듯 높아졌다. 구불구불 오르는 길도 정겨워라. 모퉁이 숲을 굽이쳐 돌아 나가는 올망졸망한 길들이 리드미컬 경쾌하다. 서울 도심에 이런 한갓진 드라이브 코스가 있었나 싶다. 북악 스카이웨이. 산그늘이 짙게 내려서일까. 북악산 자락은 가을빛이 또렷했다. 연초록이 엷어져가는 숲마다 소슬하다. 나뭇잎들의 춤사위도 그 뜨겁게 작열하던 여름철 자태가 아니다. 슬로우 스텝으로 너울거리며 반짝거린다. 자동차들도 덩달아 느릿느릿 완보한다. 그렇게 들른 곳이 북악산 팔각정! 전망대에 올라서면 또 한 번 놀란다. 산 아래로 두 판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완만하게 뻗은 산 앞쪽으로는 첨단 파노라마. 회색빛 빌딩과 아파트들이 빼곡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는 넓혀지고 치솟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파른 뒤쪽 아래 마을은 초록색 숲속에 아기자기한 집들이 들어앉은 모자이크 같은 그림이다. 표정은 그래서 극적이다. 앞쪽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리는 반면 뒤쪽은 느릿느릿 걸어가는 모습이다. 번잡하게 돌아가는 거대한 도심과 전형적인 작은 산골. 한 지붕 아래 서울이면서 어쩜 이렇게 풍경이 다를 수가 있을까? 팔각정 전망대에 동그마니 앉아 있는 '느린 우체통'이 속도 만능주의 시대에 느림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보라고 물음을 던진다. 애틋한 사연을 담은 편지를 행선지까지 느릿느릿 전달해준대서 붙여진 '느린 우체통'. 도착하는데 1년이 걸린다니, 촌각을 앞다퉈달라고 몹시도 보채는 첨단유행 입장에선 이런 미련 곰탱이가 없을 거다. 그 느림보 우체통은 나직이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느리게 산다는 건 빛의 속도로 질주하는 시대에 조바심과 성급함에서 놓칠 수 있는 모자람을 채우는 작업이라고. 열띤 경쟁 속에 앞만 보고 달리느라 허기증을 느꼈을 사람다움 삶을 얼마만큼 가꾸었는지? 그 길게 늘어난 세월의 뒤안길을 한번쯤 되돌아보라고 마음의 창을 노크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피드 시대에 노출되는 모자람은 어쩌면 펜을 꾹꾹 눌러가며 편지를 쓰는 과정에서 절로 채워지는 건 아닐까. 이 스산한 계절, 어딘가 응시하는 듯한 우체통이 처연하다. 젊은 날 각인된 우체통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공연히 마음이 설렜다. 먼 데서 누군가가 보낸 사연을 품고 있을 것만 같았다.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달래려 달을 쳐다보곤 하던 그 시절, 우체통은 마음의 고향 같은 것이었다. 어쩌다 거리의 우체통을 마주치면 막연한 기다림으로 서성거리곤 했다. 초를 다투며 전달되는 디지털 메모지가 없던 그 시절, 사람들은 편지를 쓰며 느림과 기다림의 정서를 배웠다. 속도가 곧 경쟁력으로 통하는 세상. 편지가 느림보라고 해서 구시대 유물이 아니다. 느림이 빚어내는 따스한 감성 가치가 살아 숨 쉰다. 꼭꼭 봉해진 편지를 뜯을 때의 설렘을 생각해보라.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써내려간 손 글씨는 또 어떤가. 글씨체가 비뚤배뚤해도 행간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우표를 붙이고, 마음을 담아 우체통에 넣었을 편지. 단 몇 줄의 내용일지언정 울림은 크다. 굳게 닫힌 마음을 열게도 하고, 고단한 삶을 한 순간에 녹이기도 한다. 동네 우체통도 처연한가 싶어 눈길이 자주 간다. 그런데 뜻밖이다. 우두커니 선 채 빼꼼히 얼굴만 내미는가했더니 매일 편지 물량이 들어온단다. 하루 평균 열댓 통은 된다며 우체국 집배원이 환하게 미소 짓는다. 느림의 가치가 꿈틀거림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온통 빠름이 미덕인 시대에 반짝거리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노라고 다짐하는 어느 유행가 가사가 굳이 펜을 건네지 않더라도 고즈넉한 가을의 향기를 담은 편지를 꼭 써야겠다.

2017-09-13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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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나를 위로하는 시간

어디 목적지를 정하고 걸은 건 아니었다. 어스름이 내리던 시간, 나는 불빛을 적시며 거리를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친구와의 약속이 미뤄지는 바람에 발길을 돌리려다, 기왕 나선 길이니 무작정 걷기로 작정했던 터다. 모처럼 배회하는 밤거리. 가로수들이 한가로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나도 그랬다. 바람은 차고 스산했다. 그런데 가슴이 설레는 건 왜 일까. 그럴 만도 했다. 학창 시절, 불빛을 그리워하며 정처 없이 떠돌던 거리였기에 가슴 벅찼을 것이다. 문득 어느 한 포장마차가 떠올랐다. 언젠가 한 번 꼭 가보고 싶었던 곳, 때론 글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추억을 담아오자고 생각했던 곳이다. 마음이 허기증을 느끼던 내 젊은 날, 초가을의 삽화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포장마차다. 낱잔으로 팔던 대포 한 잔에 뜨끈뜨끈한 오뎅 하나면 마음이 넉넉해졌다. 어쩌다 국물 속에 큼직한 무 한 토막이 얹어지면 푸짐한 안주가 되곤 했다. 술이 한 순배 돌면 마차 안은 한 가족이 됐다. 나는 그곳에서 추억을 마실 참이었다. 그러나 그 포장마차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카바이드 등(燈)의 흔들리는 불빛을 따라 내 젊은 날의 희로애락이 물결치던 그 흔적은 없었다. 자우룩하게 피어올랐던 그 불빛은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허전해지는 가슴을 감싸주는 체온과도 같았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 따스했던 불빛을 찾을 수가 없다. 대신 길 저편에 실내 주점이 가을바람에도 끄떡없는 형광등 불을 훤히 밝히고 있었다. 그 눈부신 불빛 아래 나는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 추억을 마셨다. 계절 탓인가. 어째 혼자 술을 마시는 혼술족이 눈에 띄게 많다. 그러고 보니 작은 탁자들이 여럿 있다. 요즘 흔한 풍경이라니 술 문화 패턴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모양이다. 그 당시 어지간해선 혼술하기가 힘들었다. 바라보는 시선이 유난했다. 뜸하게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길손을 보면 무슨 큰 사연이 있는 양 색안경으로 봤다. 모두가 그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데 멀쩡할 수야 없지 않은가. 마치 실연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소주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내 추억의 포장마차는 혼술족의 아지트였다. 거기엔 외로움을 받아줄 정감이 넘실거렸다. 술보다 낭만을 마셨다. 지금은 그런 포근한 포장마차는 없다. 그래서일까. 홀로 기울이는 술잔마다 쓸쓸함이 묻어난다. 출렁거리는 술에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누군가 잔을 비우면서 저 세렝게티 초원의 한복판에 홀로 서서 치열한 삶을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들려줄 사람도, 받아줄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혼술이다. 혼술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온 자신을 다독거리고, 사투와 인내의 흔적이 보이는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어루만져 주는 것이다. 더러는 허공을 응시하면서. 술잔에는 오늘과 어제만 있는 게 아니다. 차분히 내일을 설계하는 시간표도 담겨 있다. 미래의 시간표에는 마음껏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다. 설령 공상할지언정 이 번잡한 일상에서 그런 시간을 어디서 덜어줄까 싶다. 나를 위로 하는 시간! 그랬다. 나는 어제와 오늘, 내일을 넘나들며 나를 위로하고 있었던 거다. 번민을 지우고, 아린 가슴을 달래고, 삶의 의미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며 지혜를 하나하나 일군 시간들. 그래서 일상의 갈피마다 인내하고 최선을 다하도록 북돋운 거름의 시간들. 저 아련한 추억의 포장마차가 그리워지는 건 현재를 있게 한 그때의 시간들을 쓰다듬으며 포옹하고 싶음에서일 것이다. 나는 그 보석 같은 시간들을 되새기며 불빛 적신 거리를 걷고 있었다.

2017-09-06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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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지하철의 가을 풍경화

벌써부터 가을을 타는 걸까.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면 까닭모를 공허함이 밀려든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바통 터치가 한창이던 저물녘, 나는 그 환절기를 피해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지하철도 그 공허함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무성격(無性格) 계절이라는 환절기! 여름인지, 가을인지 헷갈린다. 당장 천장의 에어컨이 힘들 게 생겼다. 여름과 가을,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그 착한온도를 추적하며 연신 내뱉는 에어컨 바람이 허탈하다. 그 황금비 찾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거니와 같은 사람이라도 하루 일과를 연소하는 부피에 따라 그때그때 체감온도가 다른 것을. 오락가락하는 환절기의 몸짓. 차창 너머로 스치는 실루엣을 바라보며 이런 삽화를 그려본다. 지하철 속에는 사계절의 사연들이 다 있을 거라는, 그래서 맑고, 흐리고, 개고, 때론 비바람이 불고, 그 뒤에 찾아오는 화창한 삶의 무늬들이 그려진 삽화. 지하철에는 다양한 삶의 기상도(氣象圖)가 파노라마처럼 흐른다. 그래서다. 지하철에 오르면 삶이 실감난다. 저마다 짊어진 삶의 밀도가 앉아 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거나, 스마트폰에 열중하거나, 책을 읽거나, 신문을 들여다보거나, 차창으로 보이는 자신을 응시하며 행선지를 향해 달려간다. 그 모습 이면에는 나름의 꿈과 희망이 배어 있다. 종점을 향해 내닫는 지하철의 모습은 삶의 궤적에 다름 아니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 사이 지하철은 서너 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듬성듬성 자리가 비어졌다. 왁자지껄도 잠잠해졌다. 침묵은 잠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천장의 스피커가 돌연 정적을 깨고 위안의 말을 건네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힘들지 않았느냐며 가라앉은 기류를 환기시키더니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시겠단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비행기 기장의 말투! 순간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뻔 했다.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듯 귀를 쫑긋거렸고, 더러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짧고 명료한 멘트였기에 여운은 길었다. 고단한 사람들에겐 따스함이 밀물져 왔을 것이다. 정말 뜻밖인 것은 이런 깜짝 친절들이 널렸는데도, 우리는 그 고마움을 모르고 지낸다는 점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범속한 일상에 묻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고마운 친절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호젓한 갈림길에서 만나는 안내 표지판, 대형마트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카트를 잡아주는 아르바이트생, 보도 위의 껌을 떼어내는 환경미화원, 문을 열어주고, 닫히려는 문 잡아주기 등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 수고로움의 가치를 부여할 틈조차 없이 부지불식간 스치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그래서 묻게 된다. 서비스를 받는 것에 너무 중독된 탓에, 혹여 친절에 대한 가치판단이 무뎌진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하면 복원할 수 있을까? 혹자는 말한다. 친절을 베푸는 법부터 배우라고. 그 출발은 베풀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포착하는 것에 있다고 일러준다. 그런 눈과 가슴을 가지라는 것인데 안내 표지판으로 서 보고, 커트를 잡아주고, 껌을 떼는 마음이 되어 보라는 얘기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친절이란 외투를 입으면 세상에 참 곱고 아름다운 시간이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사랑이 담긴 친절들은 그런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지하철역을 나와 동네로 들어가는 초입. 공원의 넓은 빈터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또 하나의 친절이 여름 봉사활동을 막 끝내고 철수하고 있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나절엔 그늘막이 돼주었고, 장마 땐 비가림막 역할을 해줬던 천막. 그 고마운 천막이 석양빛을 모로 받으며 하염없이 걷히고 있었다.

2017-08-30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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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옥수수가 삶을 말하다

그 많은 여름철 먹거리 중에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름을 올리는 게 있다. 갓 쪄낸 옥수수! 탱글탱글한 누런 알맹이들이 쫄깃쫄깃 차진 식감이 여간 아니다.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배어난다. 먹는 방식도 변한 게 없다. 우두둑 뜯는가 하면, 한 알 한 알 톡톡 떼어 알알이 감칠맛을 느끼기도 하고, 더러는 알맹이들을 손바닥에 모아 한입 가득 털어 넣곤 한다. 찐 옥수수 하나로 이렇게 입맛 당기는 대로 원초적 별미를 즐길 수 있는 먹거리가 또 있을까 싶다. 계절은 벌써 입추(立秋)를 지나 초가을을 노크하고 있음일까. 여름 장마가 못다 한 열정을 쏟아 붓고 있다. 비에 씻긴 산들바람이 스산하다. 이런 계절의 변주곡이 번지던 엊그제, 왜 옥수수가 그토록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장맛비 내리던 어느 여름날이었을 것이다. 처마 밑에서 뜨끈뜨끈한 옥수수를 후후 불어가며 먹던 추억이 자꾸 겹치니 말이다. 비 오는 여름 끝자락에서 맛보는 농익은 옥수수에는 이런 향수와 아쉬움이 묻어난다. 이렇게 해서 아내와 함께 서성거린 곳이 동네 전통시장. 찰옥수수는 솥단지 위 쟁반에 앉아 허연 김을 모락거리며 추억의 냄새를 저만치서부터 풀고 있었다. 노릇노릇한 게 침이 절로 괴었다. 하지만 정작 손에 들린 것은 찐 옥수수가 아니라 껍질이 달린 생 옥수수였다. 그것도 한 자루씩이나 사게 된 건 좌판 위에 수북한 자루 더미의 일각을 처리해주고픈 동정심 때문만은 아니다. 껍질을 까서 솥에 쪄내는 수고로움을 들여 옛 향수를 온전히 맛보기 위해서였다. 잘 익은 옥수수. 베란다 통유리 밖 빗줄기를 바라보며 뜯는 건 또 다른 별미다. 빗방울 구르는 처마 밑이었다면 더욱 낭만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추억의 옥수수는 늘 한 정물화로 남아 있다. 소쿠리에 담긴 옥수수! 이런 풍경을 담은 옥수수를 만나면 잊고 지내던 예전의 시간들이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이런 시절이 있었다. 학교 급식으로 옥수수 빵이 나온 시절이 있었다. 누런 옥수수 가루가 씹힐 정도로 식감은 거칠었지만 얼마나 고소하고 맛이 있었던지. 모양과 크기는 요즘의 식빵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다섯 개의 빵 덩어리가 붙은 구조였다. 그게 문제였다. 급식 시간 때마다 빵 한 줄에 다섯 명이 매달렸다. 교실은 들썩거렸다. 덩어리째 손대중으로 쪼개다보니 모양과 크기가 제멋대로 나왔다. 옆쪽 빵 귀퉁이가 딸려오는가 하면, 반대로 뜯겨나가기도 했다. 담임선생님이 쪼개주기도 했지만 희비가 엇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청소 당번을 서면 하나가 더 얹어졌다. 교실 바닥은 마루였지만 늘 청결했다. 번쩍거렸다. 옥수수 빵이 그리워지는 건 그 거칠고 투박했던 추억의 맛도 맛이거니와, 오순도순 나눠먹던 정감어린 장면이 일렁거려서다. 빵이 많이 묻어 간 쪽에서 덜 간 쪽에 떼어주는 나눔! 7080세대의 시골 초등학교에선 옥수수 빵을 통해 나눔을, 아니 도덕을 배웠다. 나눔이 던져주는 부피는 컸다. 빵 한 조각엔 천상의 맛을 품고 있었다. 몇몇 친구들에겐 눈물 젖은 빵이었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도 하지만, 가슴 저변에 애잔함이 물결친다. 사람들은 그래서 맛있는 게 생기면 누구에게 주면 얼마나 행복해할까, 생각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따금 몇몇 이웃과 간식거리를 서로 나눠 먹곤 한다. 시장에서 사온 옥수수며, 부침개며, 제철 채소가 대표 메뉴다. 일전에 이웃의 따스한 정이 가득 담긴 찐빵이 향수를 자극하며 삶의 무게와 속도를 잠시 내려놓게 해주었다. 소쿠리에 담긴 누런 옥수수는 살맛나는 삶을 향유하는 방법이 뜻밖에도 이렇게 단순하고 가까운 데 있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2017-08-23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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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종이지도가 말을 걸어오는 까닭은?

길을 잘 못 들어서자 내비게이션이 냉큼 경로를 재탐색하겠다고 목청을 돋운다. 길을 나설 때마다 듣는 이런 잔소리도 이젠 이골이 나서 그러려니 하지만 때론 핀잔으로 들리곤 한다. 그 상냥하고 친절한 길 안내를 핀잔으로 느낀다는 건 어쩌면 편리함에 길들여진 내 의식에 가하는 죽비소리를 듣고 있음일 것이다. 생소한 그 어떤 낯선 곳도 용케 길목을 짚는 영리한 내비게이션도 늘 길 공부를 해야 한다. 새로 생긴 길들을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일전에 그랬다. 내비게이션이 그토록 추천하던 길을 가다 헤맨 적이 있다. 뜬금없이 어느 으슥한 골목 안으로 재촉하기에 지름길을 안내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웬걸 막다른 골목. 내비게이션도 헷갈릴 때가 있구나 싶어 되돌아 나오니, 세 갈래의 선택지가 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중 어디로 갈까? 애타게 묻고 있었지만 내비게이션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통밥 굴러 알아서 가라는 얘긴가. 개중 민틋한 길을 선택해 들어서는데 그제야 경로를 재탐색하겠단다. 이번엔 우회전하란다. 뭔가 큰 길이 있나 싶었는데, 꾸불꾸불 이어지는 논길이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뒤를 돌아보니 초입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그 많던 집들도 저만치 아득하게 가물거린다. 그야말로 안개 속이다. 이 와중에 내비게이션은 구겨진 체면을 바로 세우겠다는 건지? 한 길만 고집한다. 번번이 엉뚱한 시뮬레이션 길 안내를 띄워놓고선 골목을 돌고 또 돌게 한다. 뒤늦게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을 가동하려니, 한나절 진땀을 뺀 배터리가 잠자고 있다. 논두렁 할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지의 미로에 갇혔을 것이다. 꾸부정한 할아버지는 망망대해에서 깜빡거리는 키 작은 등대 같았다. 너무 반가웠다. 종이에 비뚤비뚤 길을 그려주셨다. 그 복잡다단한 고차원 방정식의 미로를 이해하기 쉽도록 간명한 길로 풀어놓은 종이지도! 감사의 절을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석양에 타는 황홀한 저녁놀과 들녘, 바람 따라 물결치는 숲, 주름진 얼굴로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한 폭의 풍경화를 담아낸다. 할아버지의 손때 묻은 종이지도가 그토록 고마웠던 건 길 안내 때문만은 아니다. 종이지도는 우리의 일상생활이 첨단기기의 흐름에 내맡긴 채 흘러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라고 이런 물음을 던져서다. 굽이굽이 삶의 길목에서 길을 잃고 배회할 때 인생좌표를 밝혀줄 내비게이션 하나씩을 갖고 있는가? 희망을 품고 달리는 인생행로에 올바른 이정표를 안내하고, 조언하는 내비게이션 말이다. 그 인생좌표 내비게이션은 부모가, 스승이, 지혜로운 책이 될 수 있다. 종이지도는 또 묻는다. 편리한 타성에 젖어 혹여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도전적 야성이 퇴화되고 있지 않는가? 내비게이션이 없었던 시절, 낯선 여행길에 나설 땐 모험심과 호기심으로 가슴 설렜다. 오지에선 도로지도책은 나침반이었다. 너덜거리는 지도책 한 권으로 보물찾기하듯 시골길을 누비는 재미가 여간 아니었다. 때론 물어물어 지도에 없는 새로운 길과 먹거리, 볼거리를 개척하곤 했다.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나름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길이 있었던 거다. 인생행로는 결국 방향이다. 그 기로에서 후회 없는 삶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더러는 착오를 줄일 때까지 길을 개척하는 이른바 시행착오를 겪기도 한다. 그것은 저만의 가치를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가치를 발견하고도 갈고 닦는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는다면 골목길을 배회하며 경로 재탐색 타령만 하는 인생좌표에 다름 아니다. 인생좌표란 변화무쌍한 세상 삶에 설정돼 있기에 표류하지 않도록 열정을 다해 굳게 지켜야 하는 것이다.

2017-08-16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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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바다에서 갓 건져 올린 소금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녘, 동해안 해변은 고즈넉했다. 새벽 바다라고 해서 잠자는 건 아니다. 짙푸른 파도가 허연 거품을 물고 줄줄이 밀려온다. 하늘과 맞닿은 저 수평선 끄트머리에서 숨 가쁘게 달려왔을 파도. 그곳에서 무슨 기별이라도 갖고 온 걸까? 부서지는 파도가 찰랑찰랑 해변에 오래 머뭇거린다. 싸악 쓸고 지나간 모래밭엔 발자국 하나 없다. 얼마나 오랜만에 맨발로 거닐어보는 새벽 해변인가. 바닷물을 흠뻑 머금은 모래알들이 발을 감싸며 사박거린다. 일상을 훨훨 털어버리고 훌쩍 떠나온 여행! 아무도 밟지 않은 해변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빈 백지의 모래 카펫에 발자국 잉크를 찍으면 속삭임이 되고, 시어(詩語)가 된다. 시선이 머문 곳은 하늘과 맞닿은 바다. 마중할 겨를도 없이, 찰나에 바다가 해를 불쑥 밀어 올린다. 이글거리는 해. 모래벌판이 해살 가득 저렇듯 반짝거린다. 바람이 살랑거린다. 그 한복판에 서서 공기를 들이켜 본다. 바다에서 갓 건져 올린 소금 내음이 신선하고 상쾌하다. 동해안 아침 해변은 언제 보아도 한 폭의 풍경화다. 해변 끝자락에 걸터앉아 갸웃거리는 고기잡이배며, 그 위로 춤추는 갈매기며, 해변을 거니는 다정스런 연인이며, 연초록 그늘이 아늑한 솔숲이며, 햇빛에 반짝거리는 희디흰 모래밭이며, 그 모래 언덕 너머 캠핑장에 똬리를 튼 올망졸망한 텐트들이 낭만적인 그림을 담아낸다. 푸른 바다 위로는 보트들이 물살을 가른다. 물보라가 시원하다. 이런 호사스런 풍경을 그냥 지나치는 건 바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여행에서 남는 건 역시 사진! 여행이란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랬다. 그러나 그냥 오는 게 아니다. 추억을 싣고 온다. 그 기록물이 사진이다. 순간순간 흘러가는 시간들을 찰칵! 멎게 한 장면들이다. 과거의 시간에 머물러 있다지만, 그것은 단순한 피사체가 아니다. 거기엔 애정, 그리움, 정겨움 같은 다양한 사연들이 담겨 있다. 스토리가 살아 꿈틀거리는 것이다. 여행의 시간들이 꿈결 같은 것도, 그 조각조각의 추억을 엮은 사진이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일상이 팍팍할 땐 사진첩을 펼쳐 추억을 반추하곤 한다. 정지된 장면 속에는 무수한 언어들이 시간 밖으로 넘나든다. 낱장마다 의미가 있고, 소중하다. 그 낱장의 필름들을 연결하면 한 편의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여행 사진은 묘하다. 볼거리 없이 괜히 생고생을 했다며 후회했던 여행지가 세월 지나고 보면 보석처럼 빛난다. 리얼리티, 그러니까 고단했던 현장감이 사진 속에 배어 있는 까닭일 것이다. 여행 끝엔 피곤함이 기다린다지만 그만큼의 생생추억을 남긴다. 사진에도 복고풍이 불고 있다는 소식이다.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 많아야 30장 밖에 못 찍고, 그것도 인화지에 사진을 띄울 때까지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 이런 단점에 매료된 소비자층이 향수에 기댄 장년층이 아니라, 뜻밖에도 유행을 좇는 청춘남녀들이라니 관련 업계가 놀랄 지경이다. 디지털처럼 무한정으로 찍을 수 없으니 한 장 한 장 정성을 쏟아야 하고,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궁금해서 설렌다는 게 복고의 배경이다. 필름에는 정성과 설렘이 있는 것이다. 카메라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넘나들며 영역다툼을 할지언정, 사진은 변하지 않는 모습 그대로다. 바래지 않는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진 겉 표면은 색 바래도, 그것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늘 현재형으로 숨 쉬는 것이다. 물리는 법이 없다. 저 활짝 핀 꽃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이 매번 색다르게 와 닿듯, 사진은 늘 새로운 읽을거리를 선사한다. 미소를 머금게도 하고, 울컥 복받치게도 한다. 해변의 일출 풍경을 담은 사진이 훗날 이야기꽃을 피워낼 것이다.

2017-08-09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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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한나절의 얼쑤! 드라마

찜통더위에 묻어난 땀이 한나절 내내 잘박거리며 기분을 엉클어놓는다. 번잡한 일상의 무게를 견뎌내려면 이런저런 매듭들을 풀어내야 한다는 삶의 법칙쯤은 잘 알면서도, 그깟 땀 몇 방울에 죽 끓듯 하는 변덕이 왠지 궁상맞다. 다행히 마음 끝자락이 생각을 곧추 잡는다. 무람없이 불쑥 튀어나온 그런 푸념을 다독거리며 밀어 넣는 걸 보니 조금은 기특하다. 그도 그럴 것이 거리를 걷는데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판소리 한 가락이 엉클어진 매듭을 산뜻하게 풀어놓는다. 얼씨구! 북을 치며 장단을 짚는 고수(鼓手)의 추임새다. 그 실마리를 뽑아내는 곳이 어딘가? 하고 소리를 따라가니 생선 가게에서 틀어놓은 라디오다. 추임새를 듣는 순간, 오래전 접어뒀던 기억이 불을 밝힌다. 무대는 시골의 어느 허름한 중고 음반가게. 안을 들여다보았을 땐 장면은 갈등으로 치닫고 있었다. 전축 턴테이블 위에 얹혀 돌아가는 빛바랜 음반에선 소리꾼이 목청을 돋웠고, 백발의 주인과 머리카락을 노랗게 물들인 청년이 흥정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가게 안 풍경은 드라마틱했다. 고목처럼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인, 랩과 힙합에 열광할 것 같은 앳된 청년, 소리꾼의 애잔한 판소리! 이 보기 드문 조합이 앙상블을 이룬 스케치가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것이다. 흥정을 부추기는 건 추임새였다. 주인은 그 판소리를 꿰차고 있는 것 같았다. 가락을 절묘하게 잘 탔다. 주인이 가격을 내지를 때마다 음반은 기다렸다는 듯이 얼씨구! 화답했다. 흥정이 끝날 즈음 추임새는 절정으로 달리고 있었다. 얼쑤! 좋다! 그렇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 했다. 이렇듯 추임새는 '한나절의 얼쑤!' 드라마를 극적으로 몰고 간 음향효과였다. 흥미진진했다. 흥정에 곱살끼어 분위기를 띄운 건 기본이고, 주인이 청년의 눈치를 살피며 연신 주판알을 튕길 때마다 추임새를 넣어 흥정을 도왔다. 고개를 가로젓는 청년의 마음을 되돌려놓은 것도 추임새다. 간간이 뜨악해지는 침묵의 공간을 메워주고, 서먹함을 화기애애하게 녹여주고, 그래서 엇박자로 가던 흥정에 접점을 이끌어낸 게 추임새였던 거다. 우리네 소리꾼들은 일찍이 추임새의 에너지를 간파하고 있었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중구난방을 하나로 모았다. 전통 놀이마당에서 소리꾼과 관객이 신명나게 한데 어우러지는 까닭일 것이다. 이는 우리 가슴 밑바닥에 '흥'이라는 추임새 유전자가 꿈틀거리고 있음이다. 조금만 격려해줘도 흥이 일렁거리는 우리네 국민성이다. 스포츠에도 그 고부가가치가 빛을 발했다. 월드컵경기 응원전 때마다 너나없이 하나가 되는 에너지가 물결쳤다. 이런 우리 내면의 가락을 추억의 서랍 속에 보관했다가 한마당 잔치나 스포츠 이벤트 때만 끄집어내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일상의 뜰에 초대해 마음껏 뛰놀게 해야 한다. 얼쑤! 좋다! 그렇지! 하면서 서로 추켜 주고 격려해야 한다. 저 혼자 짊어진 삶의 무게와 부피를 버텨내기에도 버거워 그런 여력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조금은 덜 한 쪽에서 위로의 추임새를 건네는 건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위로가 꽃피는 동산에는 아귀다툼이 기웃거리지 않는다. 얼쑤! 추임새의 에너지는 역설적이게도 상대의 말을 잘 듣는 데서 나온다. 추임새는 태생적으로 장단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소리꾼의 가락에 귀 기울여야 하니 그럴 것이다. 그 정성에는 배려의 마음이 꿈틀거린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면서, 위로와 격려를 사이사이 스며들게 해 상처를 치유해주는 모습이다. 그 추임새에 감동해 희망과 용기를 얻고 눈물 흘리는 광경이 이따금 목도된다. 한나절 건넨 추임새를 저울에 달아보면 무게가 얼마나 될까?

2017-08-02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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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마중물의 전설

하! 후텁지근하다. 그 시원한 살랑바람은 다 어디로 간 걸까. 기껏 불어오는 굼뜬 바람도 진땀을 뺐는지 끈적끈적하다. 열대 우림에 덮인 느낌이다. 이런 찜통더위를 어디 한두 번 겪는가마는, 매번 낯 설은 여름 대하듯 호들갑을 떤다. 계절의 진통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아우성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산과 강, 들녘을 때맞춰 새 옷으로 입혀주는 그 고마운 계절을 무관심속에, 그저 오면 오는가보다 가면 가는가보다 싶게 살아왔다. 여름의 열정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피서 대열에 오르는 길. 차창 너머로 헉헉대는 사람들을 보면서 미처 몰랐던 계절에 대한 상념들이 불쑥 떠오른다. 계절은 늘 조신했다. 밤낮 모르게 조용히 저 먼저 달려와 계절의 길목에 살포시 앉아 있었다. 아지랑이를 피어 올릴 때도 그랬고, 꽃봉오리를 맺을 때도 그랬고, 싹을 틔울 땐 산고가 있었지만 결코 소리 내지 않았다. 꽃피울 땐 더 조신했다. 한 잎 한 잎 숨죽이듯 펼치더니, 무더기무더기 꽃 사태로 깜짝 놀라게 했다. 몇몇 꽃들은 제 날인줄 알고 때 이르게 나와 겸연쩍어하곤 했지만, 그 착각을 불러일으킨 땡볕바람은 여름의 길목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연초록 옷으로 갈아입은 나무숲은 산그늘 아래에서 땀을 들이며 그토록 찜통더위를 경고했건만 생각이 거기까진 닿진 못했다. 무덤덤했다. 계곡도 쉬어가라 했지만 그냥 스쳐지나갔다. 물결치는 푸른 들녘이 손짓했지만 눈길 한 번 주지 못했다. 스산한 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고서야 깊어가는 황금빛 가을이 왔음을 알았다. 울긋불긋한 단풍에 흠뻑 빠졌다가, 겨울이 온 줄도 몰랐다. 낙엽 구르는 소리조차 나지 않음을 느끼고서야 알았다. 전날 밤 조용히 흩뿌려 놓은 논배미의 싸락눈을, 산정의 첫 눈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이제 겨울인가 싶었다. 사계절은 그렇게 슬그머니 찾아와 시나브로 저들의 색을 입힌다. 볕을, 풀을, 꽃을, 단풍을, 눈송이를, 바람을, 안개를, 비를, 아지랑이를 데려와 풍경을 만들고 숨을 불어넣는 그 계절의 장엄한 신비를 그냥 스치듯 하나의 온도로만 느꼈다. 기억 한 장이 날개를 펼친다. 고향 마을의 한 장소는 유난히 사람들이 많았다. 물 펌프가 있는 곳이다. 펌프질해 땅속의 물을 퍼 올리는 수동형 수도였다. 무더운 여름날 손잡이를 쑥쑥 눌러 길어 올린 얼음물이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곤 했다. 펌프는 묘했다. 저 갈증부터 풀어주지 않으면 물 한 방울도 주지 않았다. 한 바가지 물을 부어줘야 땅속에서 잠자는 물을 콸콸 불러냈던 것이다.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펌프질에 동력을 실어줄 물이 필요했던 거다. 그 물을 마중물이라고 부른다. 물이 물을 길어 올리는 광경! 그것은 귀한 손님을 마중하는 자세이며, 식수가 되어달라고 설득하는 모습이다. 펌프는 마중물 한 바가지를 부어주면 엄청난 물로 보답해주었다. 펌프는 이런 식으로 매번 마중의 지혜를 가르쳐줬지만, 그땐 몰랐다. 펌프는 늘 속을 비워두고 있었지만, 그 속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렇다. 지금 날씨가 무덥고 짜증스런 것은 여름을 헤아리고 받아들일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없는 탓인지도 모른다. 찜통더위가, 맹추위가 닥쳐서야 겨우 계절을 눈치 채고 아우성치는 일상이다. 차안 라디오에서 누가 '무더위에 지친 몸들 힘내시라'고 던지는 말 한마디가 청렬(淸冽)한 마중물처럼 들린다. 지친 마음에 긍정의 힘을 실어주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마법의 법칙이 있다면 마중물만한 게 있을까 싶다. 한 바가지 마중물이 많은 양의 식수를 끌어올리듯, 한 마디의 마중감동이 더 큰 감동을 끌어낸다. 이 여름, 마중감동 하나씩을 마련하는 건 어떨까.

2017-07-26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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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어느 여름날의 춤추는 수채화

울창한 가로수의 잎들 사이로 여우볕이 들었다. 햇빛에 찰랑대는 잎 물결이 눈부시다. 현란하게 춤추는 것 같다. 바람 부는 가락에 따라 춤추는 수채화! 이 여름날, 시골의 가로수는 이렇게 리드미컬한 풍경을 담아내며 길손들을 맞는다. 꼬불꼬불 굽이치는 그 춤추는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정겹다. 풋풋한 풀내음이며, 상큼한 꽃내음이며, 풀풀거리는 흙내음은 덤이다. 그러나 도심의 가로수들은 이런 풍경이 아니다. 찌든 공해를 털어내려 몸부림치듯 춤추고 있다. 만약 사람에게 음악과 춤이 없다면 어찌 되었을까? 문득 이런 물음표를 달게 되는 건 비단 찌든 스트레스를 털어내는 도심 가로수의 춤 때문만은 아니다. 한 인기드라마에 작열하는 신혼부부의 춤이 그랬다. 그들은 스트레스를 푸는 해법이 막춤에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있었던 거다. 댓바람부터 날아든 스트레스! 그들은 신나는 음악을 틀더니,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막춤을 추는 장면은 신선하다. 그들의 입가엔 어느새 미소가 걸렸고, 출근길 발걸음은 경쾌했다. 축 처진 입 꼬리를 올려놓는 음악과 춤. 이런 흥겨움이 없었더라면 세상 풍경은 과연 어땠을까? 음악과 춤이 있어도 이토록 메마른데, 그런 상상만으로도 가슴 밑바닥은 바싹 마른다. 세상은 각박하고, 으르렁대는 군상들이 득실거릴 거다. 음악과 춤으로 다스려온 울화는 길을 헤매며 배회할 거다. 넓게는 지구촌 언어들이 하나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감대가 사라지고 만다. 그러고 보니 형언할 수 없는 운율과 율동의 표현들이 삶을 따스하게, 넉넉하게 해주었구나. 번잡한 도심 거리에서, 전동차 안에서, 버스 안에서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젊은이들을 보라. 더러는 가락에 맞춰 발장단을 친다. 때론 어깨를 들썩이곤 한다. 공공장소에서 저 정도면 마음은 땀을 흘리며 정열적으로 흔들어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원색적 체면을 덜어주기 위해 등장한 게 나이트클럽과 노래방일 것이다. 신나는 음악을 들으면 왜 춤을 추게 되는 걸까? 아니, 사람들은 그 흥겨움을 춤으로 표출하지 않으면 왜 가슴이 답답해진다는 걸까? 이런 우문에 인체과학자들이 어떤 해석을 내놓든 분명한 경험칙은 있다. 음악을 듣고, 벅차오르는 그 흥을 춤이라는 언어로 표출하다보면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다는 것. 기쁘면 웃고, 슬프면 눈물을 흘리듯이, 쌓인 스트레스가 손으로, 다리로, 엉덩이를 통해 밖으로 배출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삶의 애환과 한을 속에 담아 두지 않았다. 휘영청 달 밝은 밤에 거문고를 타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살풀이 굿판을 벌여서라도 스트레스를 풀었다. 춤은 왜 하필이면 상대방이 다 알아보도록 몸짓으로 표출되는 걸까?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생리적 감정 표현으로 봐야 하는 걸까? 분명한 건 춤에는 자신의 기분을 알아달라는 본능이 꿈틀거린다는 사실이다. 사랑, 기쁨, 슬픔, 즐거움, 우울함, 스트레스 등을 커튼으로 가린 언어들이 춤춘다. 가슴 한 켠에서 혼자 웅크린 채 콩닥콩닥 그치기엔 너무 답답한 것이다. 그 표현이 정제되지 않고 분출되는 게 막춤이다. 그래서 혹자는 가장 솔직한 춤이 막춤이라고 했더랬다. 요즘 우리네 어른들은 이런 춤의 감정 표현을 억누르고 산다. 가슴 뛰는 감성을 체통이라는 단단한 프레임에 욱여넣어 스스로 무디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 밭에서 신선한 젊음을 싹 틔운다는 건 어렵다. 춤이라고 해서 유별난 동작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팔다리를 움직이는 모든 동작은 춤이다. 기지개를 켜고, 크게 활보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이다. 소소한 것에도 경이로움을 느끼고, 그 감흥을 노래하고 어깨춤이라도 덩실덩실 춰보자.

2017-07-19 09:03:28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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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시간은 늘 청춘이다

우리는 시간에 너무 쫓겨 산다. 온몸으로 울려대는 자명종 소리, 씻으랴 밥 먹으랴 옷 입으랴 부산한 아침, 북적거리는 지하철역, 길을 재촉하는 버스안내전광판, 카운트다운을 세며 깜박거리는 신호등, 보채듯 빵빵대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 소실점을 향해 질주하는 기차, 길게 늘어선 계산대 앞, 줄기차게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즉석 단위로 날름거리는 전자레인지, 촌각을 다투듯 쏟아내는 뉴스들, 여기저기서 터지는 스마트폰 벨소리. 분주한 사람들로 넘실대는 거리. 그렇다. 우리네 도심 주변에 흘러 다니는 시간은 성마른 표정들이다. 시간이 사람을 가만두지 않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시간은 우리를 데리고 과거를 지나 그 끝을 알 수 없는 행선지를 향해 달려간다. 늘 사람과 함께 호흡한다. 그런데 같은 공기를 마시면서도 사람은 늙어가지만, 시간은 늘 청춘이다. 쫓기듯 데려가더니 웬 세월의 더께란 말이냐. 그 야속한 시간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으면 어느 대중가요는 '세월아 너는 어찌 돌아도 보지 않느냐'고 슬퍼했을까. 일전에 시내 한 미술관에 들려 감상한 기원전 고대미술 작품들이 이런 잿빛 시간들을 지워주었다. 수천 년의 시간이 박제된 작품들! 거기엔 깊고 넓은 부피와 무거운 질량의 시간이 감돈다. 그래서다. 그 앞에 서 있노라면 거대한 시간의 파도가 머리 위로 아른거리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된다. 태고의 시간들이 층층이 응축된 가파른 파도일 것이다. 작품은 우리에게 말한다. 높다랗게 느껴지는 현재의 파도는 그 시간 앞에선 그저 사소한 잔물결과 점에 불과하다고. 그토록 쫓기듯 집착하던 시간이 왠지 부질없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세월을 담아낸 작품들은 매번 이렇게 시간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고 가슴 치게 하는 것이다. 우린 씨줄과 날줄로 엮은 거미줄 시간에 갇혀 얼마나 조바심 내며 발버둥을 쳤던가. 얼마나 몸살을 앓아왔던 걸까. 반짝거리는 작품들은 도시생활에 찌든 내 무채색의 시간에 큰 너비로, 두께로, 무게로 걸어온다. 그 큰 너비는 넉넉한 여백을, 두께는 등을 기댈 기둥을, 무게는 겸손을 선물해준다. 이따금 기웃거리는 박물관에는 신비로운 시간이 흐른다. 그곳 풍물을 이해하려면 시차의 강을 건너야 한다. 문화와 종교, 민족, 인종이 파도치는 강을 광폭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겹겹이 쌓아온 시간들을 풍물들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니 몰이해할지라도 어렴풋하게나마 그 시간의 맥박을, 냄새를, 사연을 느끼고 들을 수 있다. 시간은 살아 숨 쉬는 생명체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 시간의 너른 강을 휘적휘적 누비는 것만으로도 내겐 벅차다. 고대 미술품을 보면 고색창연한 시간의 물감을 풀어놓았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 때가 있다. 기막힌 풍경들을 만들어주고 사라진 시간들의 흔적이다. 그러나 죽은 시간은 아니다. 그 때 그 청춘의 시간이 여전히 발효하면서 부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저 오랜 세월을 머금고 있는 작품을 보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는지도 모른다. 잠시나마 시간 밖 뜰에서 뛰놀게 하는 순간이랄까.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났기에, 그 시간만큼은 천천히 마디게 흐른다. 이런 시간들을 가끔 꺼내볼 수 있다면 좋겠다. 있긴 있다. 마음속의 박물관! 시간 속에 떠다니는 삶들을 담아 내 박물관의 밭에 심어 한 폭의 삽화를 만들고 싶다. 그래서 아등바등 시간에 쫓길 때마다 그 박물관을 노크하련다. 허물어진 시간들을 성찰하고, 다듬어 바로 세우고 싶다. 유난하게 야단스럽고 변덕스런 시간들을 보듬어주고 싶다. 내 박물관 출입문에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시간의 주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시간에 끌려 다닐 것인가.

2017-07-12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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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눌은밥의 힘

내 하루의 파이팅은 눌은밥에서 나온다. 노르스름한 밥 알갱이들이 숭늉 안에서 보글거리는 눌은밥! 먹음직스런 색감도 그러거니와 그 눋는 냄새의 구수함에 오감(五感)이 먼저 알고 깨어난다.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샘솟는 게 파이팅을 외치는 것 같다. 아침마다 그 호사로움에 한 그릇은 뚝딱이다. 영양성분에 대해선 잘 모른다. 그러나 내 생활 영역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활력에 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단조롭고 후줄근한 삶에 의욕이라는 불을 댕긴다. 사전에서는 눌은밥을 '솥 바닥에 눌어붙은 밥에 물을 부어 불려서 긁은 밥'이라고 풀이한다. 쉽게 말해서 솥 바닥에 눌어붙은 밥이 누룽지이고, 거기에 물을 부어 불려서 긁은 밥이 눌은밥이다. 그러나 내 일상에서 느끼는 개념은 그 사전 밖에 있다. 눌은밥에는 김이 모락거리는 숭늉과 노릇노릇한 밥 알갱이들만 담겨 있는 게 아니다. 삶의 무게를 풀어주는 따스함과 넉넉함, 위안, 정성, 감동, 고향 같은 상념들이 한데 어우러져 눌은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눌은밥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개념 그 이상이다. 호호 불어가며 한 술 뜨면 훈훈해지는 것이 마음마저 따스해진다. 어이쿠 시원하다! 눈꺼풀은 여전히 무거운데 입에선 이런 감탄사가 터지곤 한다. 눌은밥을 먹는 시간은 적어도 내겐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시간이며, 오늘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의 시간이다. 하루를 개시하는 팡파르다. 눌은밥의 힘이라는 게 이런 걸까. 하루를 활기차게 살아낼 실마리를 눌은밥이 따스하게 풀어준다고 생각할 때가 더러 있다. 그게 한 끼 식사가 되겠냐고 누가 물음을 해오면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을 한다. 눌은밥에는 식욕의 끄트머리에서 서성거리는 허전함까지 채워줘야 마음이 놓이는 애틋함이 배어 있다. 말하자면 맨 마지막까지 남아서 한 끼 식사를 끝마무리해야만 부엌문을 닫는 우리네 밥상문화 본연의 유전자가 거기에 흐르는 것이다. 먹은 거 같지도 않게 먹었는데도 포만감을 느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걸쭉한 것이 포만감을 완성하면서도 속이 편한 게 눌은밥의 본질이다. 우리 집 눌은밥은 양은냄비로 만들어낸다. 깜짝 놀랄만한 특별한 레시피는 없다. 그저 냄비 바닥에 얇게 눌린 밥을 약불로 5분만 눋게 하면 맛난 누룽지가 만들어진다. 여기에 물을 자작하게 넣어 끓이면 숭늉과 함께 눌은밥이 완성된다. 가마솥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꼬들꼬들한 식감도 별미이지만 입맛을 당기게 하는 건 구수한 냄새와 노르스름한 빛깔이다. 그렇다 해서 센불에 오래 태우면 그 황금 비율의 빛깔과 구수함이 나오지 않는다. 이게 레시피의 비책이다. 눌은밥은 계절을 따지지 않는다. 굳이 계절에 맞서지 않아도 땡볕 여름에는 오히려 속을 시원하게 해주고, 얼음 겨울에는 속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맛은 사계절 내내 한결같다. 식으면 식은 대로 그 나름의 식감이 있다. 유별난 반찬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김치를 곁들이면 칼칼한 맛으로, 비릿한 생선은 고소한 맛으로 재탄생시킨다. 나물이며, 풋고추며 어떤 찬이든 맛있게 받아들이고 소화해낸다. 간장 한 종지를 만나도 아침을 개운하게 하는 신통력을 부린다. 나는 눌은밥을 먹으면서 지혜를 배운다. 어떤 것이든 받아들일 줄 아는 배려와 포용력을. 세월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어도 그 변함없는 맛에서, 큰 바람과 큰 풍랑을 견뎌내는 한결같은 뚝심을 배운다. 인스턴트가 세상에 쏟아져 나와도 눌은밥은 늘 그 자리에 있기에 마음의 고향 같은 음식인 것이다. 오늘 아침 눌은밥을 먹으며 이만한 고부가가치 음식이 있나 싶다. 포만감에, 활력과 지혜의 가치들이 보태져 약동하는 것을.

2017-07-05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