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그들만의 리그]1.히포크라테스의 통곡
정부의 의대 증원 결정에 반발한 의료계가 결국 무기한 파업을 시작한다. 17일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들이 무기한 휴진에 돌입하는데 이어 18일부터는 전국 병의원 개원의들이 속한 대한의사협회가 주도하는 집단 휴진이 시작된다. 전공의에 이어 의대 교수들, 동네 병의원들까지 파업에 동참하며 역대 최대 규모의 의료 파업이 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전공의 집단 사직으로 시작된 의료계 파행이 4개월 가까이 악화일로를 걸으며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에 돌아갔다. 의료진을 찾아 병원을 돌다 사망하고, 수술이 미뤄지는 중증 환자들이 급증하면서 시민단체와 환자단체는 물론 병원노동자들까지 비난의 화살을 의사에게 돌리고 있다. 숭고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스스로 저버리고 '의사제국'으로 고립되고 있는 의료계의 문제를 짚어본다. <편집자 주> "나는 환자의 이익이라 간주하는 섭생의 법칙을 지킬 것이며 심신에 해를 주는 어떤 것도 멀리하겠노라." 의사들이 지켜야 할 의무가 담긴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일부분이다. 의과대학 졸업 및 학위 수여식에서 모든 졸업생들은 자신의 오른손을 들고 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낭독한다. 오랜 기간 의료인들이 지켜온 의무를 되새기며, 예비 의사로서의 소명 의식을 다시 한번 다지는 것이다. 지난 11일 경기 성남시 분당서울대병원에 걸린 '히포크라테스의 통곡'이란 제목의 대자보에도 같은 선서문이 실렸다. 붉은색 대자보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스스로 저버린 의사들을 향해 "휴진으로 고통받는 이는 예약된 환자와 동료뿐"이라며 "의사제국 총독부의 불법파업결의 규탄한다"고 비난했다. 대자보를 붙인 이들은 다름 아닌 의사들과 함께 근무하는 분당서울대학교병원노동조합이었다. 의정 갈등으로 환자를 등 진 의사들을 향한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등 5개 환자단체가 속한 중증질환연합회는 "의사들의 행태가 조직폭력배와 다를 바 없다"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고, 간호사와 행정직원 등 함께 일하는 동료들조차 반감을 드러냈다. 대화와 타협도 거부한 채 넉달 가량 이어지고 있는 의사들의 파행은 명분을 잃고, 동료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그들만의 리그'로 끝날 가능성도 높아졌다. ◆잘못된 '의료권력'의 패해 커진다 정부가 제출한 '의사인력 임금 추이' 자료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상급종합병원, 개원의를 모두 포함한 의사 9만2570명의 평균 연봉은 3억100만원으로 집계됐다. 안과 개원의의 연봉은 6억1500만원, 정형외과(4억7100만원)와 이비인후과(4억1300만원) 개원의 연봉은 4억원이 넘는다. 연봉과는 별개로 의사 집단은 다른 조직과는 비교되는 상당한 권력을 갖는다. 병원 내 모든 진료와 수술은 의사 뜻대로 이루어지고, 환자는 물론 간호사와 직원들까지 의료인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이 막강한 '의료권력'이 환자를 살리는 것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쓰일 경우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다. 16일 의료계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산하 4개 병원(서울대학교병원,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강남센터)은 17일부터 정규 외래 진료 및 수술을 중단을 강행한다. 휴진 참여 현황에 대한 조사 결과, 첫 주인 17~22일 전체 교수 54.7%가 참여 의사를 밝혔다. 이른 바 '빅5' 병원들도 동참 의지를 밝히고 있다. 세브란스병원·강남세브란스병원·용인세브란스병원 소속 교수들 역시 오는 27일부터 응급·중증환자 진료를 제외한 무기한 휴진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서울병원 등 성균관대 의대 교수 비상대책위원회는 휴진에 대한 논의 설문 조사를 예고했다. 서울성모병원과 서울아산병원 교수들도 추가 휴진 여부를 논의 중이다. 18일부터는 의협 소속 개윈의들이 집단 휴진에 돌입할 가능성이 높다. 의협이 집단행동에 관해 찬반 투표를 벌인 결과 73.5%가 휴진 참여 의사를 밝힌 상태다. 의료 파행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는 환자들에게 돌아간다. 진료와 수술이 무기한 미뤄지며 중증 환자들의 피해와 공포심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한국중증질환연합회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료와 치료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의 진료가 지연되거나 거부되는 등 심각한 피해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며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가 최근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암환자 281명 중 67%가 진료 거부를 경험했고, 51%는 치료가 지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태현 한국루게릭연맹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조직폭력배와 같은 행동을 보고 죽을 때 죽더라도 학문과 도덕과 상식이 무너진 이 사회의 엘리트로 존재했던 의사 집단에 의지하는 것을 포기하겠다"며 "법과 원칙에 따라 의사 집단의 불법 행동을 엄벌해달라"고 촉구했다. ◆집단 휴진 '그들만의 리그'로 끝나나 병원 내부의 반발도 거세지는 추세다. 의사들과 함께 일하는 병원 구성원들은 임금이 줄어들고 일자리가 위협을 받는 피해를 입고 있는 탓이다. 특히 외래와 수술이 취소되면서 피해를 본 환자들의 비난을 감내해야하는 간호사와 행정직원들의 피로도 역시 한계에 달하고 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는 최근 "진료·수술 연기와 예약 취소는 환자들에게도 고통이지만, 끝없는 문의와 항의에 시달려야 하는 병원 노동자들에게도 엄청난 고통"이라며 "교수들이 직접 진료예약 변경을 하라"고 통보했다. 명분 없는 집단 휴진을 철회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서울대병원 노조 등이 속한 민주노총 산하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는 "교수들은 전공의들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의협은 의사 증원 전면 재검토라는 요구로 휴진을 예고하고 있지만, 이는 합리적 판단이 아니며 그 목적지는 파국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보건의료노조는 "넉 달째 진료를 거부하는 전공의들이 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설득하는 대신, 전공의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의대 교수들이 진료를 팽개치는 것은 정당성이 없다"며 "중증·응급환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치료 적기를 놓치게 만드는 집단 휴진을 철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계 내부에서도 자성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분만병의원협회와 대한아동병원협회에 이어 뇌전증지원병원 협의체 등이 집단 휴진을 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이다. 참여를 거부하는 의사들이 늘어나면서 무기한 휴진 결의가 흐지부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의협이 총궐기대회를 예고한 18일 휴진을 신고한 의료기관은 전체 3만6371개소 중 1463개소로 4.0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세경기자 seilee@metr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