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3>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1952)
[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3>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1952) -자발적으로 치매 걸린 자의 자살 계획 현대극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대표작.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두 주인공의 기이한 대화로 구성된 부조리 문학의 정수이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그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 숙명은 삶의 소외와 현대인의 고독, 부재한 소통을 상징하는 걸까. ◆전후 부조리극의 고전 '고도를 기다리며'는 헝가리 출신 연극학자 마틴 에슬린이 정의한 부조리극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부조리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많은 전위극의 대표격으로 1950년대~1960년대 초반까지 서유럽을 풍미하였다. '반(反)연극'이라고도 하고 '아방가르드 드라마'라고도 하는데, 불합리 속에 던져진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결국 인간의 고통과 공포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부조리극의 대칭에 있는 것은 전통극 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실주의 연극이다. 사실주의 연극은 좀 폭넓게 해석하면, 기승전결이 있고 플롯이 있고, 상상할 수 있는 서사에 따라 이루어지는 구조를 갖는다. 부조리극은 이러한 전통극의 구조에서 벗어난다. 예컨대 1막과 2막이 같은 내용으로 반복되고 평이하게 같은 속도로 쭉 직선으로 진행된다. 극의 시작과 끝에서 유사한 순환적 형식이 목격된다. 소통이 이뤄지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 단절된 상태의 '비소통의 소통'이 시도된다. 전통적인 걸 다 깨는 게 반연극이고 부조리극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전통적인 걸 깬다고 해서 폐허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반연극이라는 말 자체가, 무조건적 파괴가 아니라 또 하나의 형식을 선포한다. '반(anti)'라는 게 무엇에 반대하는 것, 그것을 없애는 게 아니라 뒤집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또 다른 형식을 의미하고 그것이 하나의 새로운 구조가 된다. 주제 면에서는 인간 실존 문제를 다룬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내용에는 당시까지 이어진 실존주의의 많은 논의가 반영됐는데, 특히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에 나온 개념들이 그대로 투사됐다고 느끼게 한다. '시지프의 신화'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구조 문제를 해명하는 키이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인물들의 행위와 상태를 있는 그대로 공감할 수 있지만, 각각의 세트가 가진 구성의 모습은 앞서 얘기한 대로 카뮈의 실존주의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잘 이해할 수 없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반복해서 죽음의 문제가 제기된다. '시지프의 신화'는 철학의 가장 유일한 문제가 자살이라고 단언하며 카뮈는 이 책에서 그럼에도 자살은 답이 아니라는 다소 맥 빠진 결론을 제시한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세계 안에 던져진 존재로서 인간이, 불합리하고 모순덩어리인 세계와 대면하면서 생기는 접점에서 느끼는 감정이 부조리다. '접점'에서 부조리가 생긴다는 주장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세계가 부조리한 게 아니다. 그 부조리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흔한 방법이 자살이다. 타성적으로 살아가는, 흔하며 덜 실존적인 방법도 있다. 카뮈는 반항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제안한다. 다만 그게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데에서 카뮈 실존주의가 곤경에 처한다. 반항하면서 살아간다고 해서 그게 행복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는 길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던져진 존재로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그것밖에 없기에 우리는 세계와 대면하고 부조리를 겪으면서 자살을 선택하지 않고 반항하고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고, 이 세상이 살 만한 세상이라서가 아니라 자살할 이유가 없어서 참고 견디면서 뭔가를 꾸역꾸역해나가는 게 삶의 이유라고 하였다. ◆근대인의 고독과 고도 에덴동산에서 불멸의 존재로 창조된 인간은 죄를 지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뿐 아니라 불멸성을 상실하고 죽어야만 하는 유한한 존재로 변경된다. 이런 전락은 그러나 신이 자신의 독생자를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보내어 구원을 약속함에 따라 인간이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는 극적인 반전으로 전환된다.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이향(離鄕)의 인간이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는 이러한 구상은, 이성을 앞세워 스스로를 신의 잠정적 대체물로 간주한 근대인이 나타나기 전까지의 인간에겐 크나큰 위안이자 삶의 주춧돌이었을 것이다. '그저' 죄를 자복함으로써 이 힘겨운 이승의 삶을 끝내고 본향에서의 복된 삶을 기약할 수 있다는 기독교적 확신은 아무튼 삶을 살만한 것, 혹은 최소한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주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이 확신이 오해였다는 신학적 반론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근대의 도래와 함께 '귀향'은 저지됐다. 이른바 이성을 지닌 (신을 잠정적으로 대체하는) 존재로 새롭게 계몽된 근대인은 귀향에 관한 신의 변증법적 구상에 반기를 든다. '귀향' 자체는 어쩌면 근대인에게도 매혹적인 설정일 수 있었다. 아마도 근대인이 감내하기 힘들었던 건 죄의 자복이 아니었을까. 자신을 죄인으로 단죄하는 상태에서 근대인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죄인됨'이란 존재한정은 세계정복을 앞둔 진취적인 근대인에게 불편하기 그지없는 걸리적거림이었다. 신이 만든 세계 안의 죄인이 아니라 신이 없는 세계의 정복자를 꿈꾸는 인간은 그리하여 죄를 사함 받는 존재론적 번거로움을 피하고 대신 죄를 탕감받는 합리적인 개척을 선택한다. 여기서 문제는 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죄를 탕감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인은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주체가 된다. 근대 이전의 유일한 주체가 신이었다고 할 때 근대 이후의 인간은 그러므로 형식논리상으로는 신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형식논리상) 신적인 존재에 도달한 인간이 자신의 신성을 인증할 수단은 자신의 바깥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성'이었다. 그러나 곧 이성의 권능은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만들어주었다기보다는 인간의 원초적 고독과 존재론적 한계, 인식론적 분열을 일깨웠을 뿐이라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그렇다고 이성이 아닌 다른 권능에 의지할 수는 없었다. 신과 달리 인간은 마침내 자신에게서 자신을 인증할 수단을 찾아낼 수 없다는 숙명에 직면한다. 이 숙명을 전후(戰後)의 정신적 황폐함 속에서 예민하게 지각한 것이 실존주의이며,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이러한 맥락 가운데서 카뮈의 설명을 들으면 '고도를 기다리며' 속 인물들의 행동과 상황이 이해된다. 고도는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어쨌든 살아야 하는 모종의 이유를 상징한다. 작품 속 등장인물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같은 이에게 죽어야 하는 이유이자 죽지 못할 이유가 되고 서로가 연대하고 의지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또 다른 등장인물 포조와 럭키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상기하게 한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헤겔적인 세계관을 나타내고 특히 노예가 주인을 전복하게 되면 전통극을 부조리극이 뒤집었듯 마르크스를 떠올리게 된다. 거대담론을 전개한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실존주의자는 아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관점에 따라 실존주의자일 수도 있겠지만,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실존주의자는 확실히 아닐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과 같은 극적인 해법이 배제된다. 대신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작동하는 세상이 드러내는 부조리를 극중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실존주의자들이 대면하면서 끊임없이 자기의 실존을 각성하고 대화하고 끌어안고 그러면서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서로 확인시키지만, 내일 목매겠다고 계획 때문에 오늘 당장 목매지는 않는다. 반복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이들은 내일이 와도 목을 매지 않을 것이다. 내일은 또 내일의 기다림이 주어진다. ◆자발적 치매 어떤 논자는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치매 걸린 사람의 모습과 닮았다고 한다. 흔히 치매를 피해야 할 질병이고 인간의 존엄이 파괴되는 상태라고 생각하지만, 불합리한 세상에서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스스로 원한 '디스오더(disorder)' 속에서라도 무언가를 기다리면서(혹은 기다리는 척하며) 삶을 꿋꿋하게 견뎌내는, 자발적 치매가 유일한 해법일지 모르겠다. 그건 비극적인 세상이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세상은 결코 긍정적인 세상이 아니고 비극적인 세상이다. 우리는 깨어 있으면서 그 비극을 참고 견디면서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게 실존주의의 세계관이다. 왜 삶에 던져졌는지 이유를 모르지만 말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시지프의 신화'를 연결해보자. '시지프의 신화'에서 반복해서 설명하는 돌 밀고 가는 장면에서 인간은 각각 다른 무게의 돌을 밀고 오르막을 올라가다가 각각의 정상에 도달하기 직전 돌을 확 밀어 올리면 돌이 다시 밀려 내려오지 않고 그러면 정상에 모처럼 고통 없이 올라가 돌이 아래로 굴러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내려가는 돌을 아주 잠깐 멍하니 바라보다가 황급히 곧 따라 내려가서 바닥에서부터 다시 밀어 올리기 시작하는데, 이런 모습이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모습과 같다고 하겠다.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ESG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