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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나 어때?

오랜 가뭄 끝에 엊그제 단비가 내렸더랬다. 비에 씻긴 바람이 시원하다. 텁텁하고 후덥지근하기만 하던 땡볕 바람이 아니다. 파릇파릇해진 풀냄새까지 묻어나 상큼하다. 나는 그 풀바람을 맡으며, 저 아득한 곳에서 달려왔을 바람의 숨결을 느껴본다. 직립보행의 원시림 산을 넘어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굽이치고, 폭풍 근대의 강을 건너 이제 첨단 빌딩숲에서 나부끼는 바람을. 나는 그 긴 세월을 몰고 온 바람의 끝자락에서 덩실덩실 춤추는 신세대의 신기루를 본다. 나는 그 춤추는 바람을 신세대 바람, 신바람이라고 부른다. 신바람은 일신(日新)하고 우일신(又日新)하는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며 인류 문화의 기류를 산뜻하게 바꿔 놓았다. 두껍게 형성된 구태 문화권의 집착을 깨워 번쩍 눈뜨게 한 것이다. 신바람이 휘몰아칠 때마다 시들해진 문화에 생기가 확 돌았고, 세상은 약동했다. 문화의 얼굴은 재기발랄하게 빛났으며, 표정은 밝았다. 내 부모 신세대 때도 그랬고, 7080 내 신세대도 그런 환류 속에 신문화를 꽃피웠다. 신바람의 풍향은 세대별로 달랐다. 존재감의 표출 방식을 보면 그 풍향의 눈금이 보인다. 내 부모 세대의 존재감은 아름드리 느티나무에서 발견된다. 색 바랜 흑백 필름에 그런 장면이 스치곤 한다. 한 청춘녀가 "날 잡아봐" 하곤 머리카락 휘날리며 저만치 뛰어가 느티나무 뒤에 숨으면, 청춘남은 짐짓 놀란 척 이름을 부르며 슬로모션으로 뒤쫓는 장면을 말이다. 일상도 늘 그런 풍경이었다. 뒤꼍에 꼭꼭 숨어 마른 헛기침을 연신 해대며 존재감을 표출했던 거다. 그 헛기침에는 권위주의, 체통, 타령, 눈물, 한이 묻어 있다. 내 부모 세대의 존재감 표출 방식은 '날 보러 와요'이다. 지극히 수동적인 자세다. 상대방이 나에게 다가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이다. 다들 속내는 달떴지만 내숭떨기가 여간 아니었다. 속이 타들어갔을 것이다. 청춘남녀 모두가 그런 자세이니 오작교를 놓아줄 중매쟁이가 필요했던 거다. 얼굴사진과 신상명세서를 과감히 들이밀며 짝을 찾는 지금의 지상 중매시장과는 그 자세부터가 다른 것이다. 부모세대가 '날 보러 와요' 바람이 불었다면, 7080 세대는 '나 어떡해'의 맞바람으로 머리카락이 나부낀다.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주제곡명이기도 하다. 이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치며 청춘 거리를 누볐다. 세태의 풍경은 느티나무 뒤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모습이다. 얼굴을 내밀긴 했는데, 그러나 여전히 '나 어떡해'다. 쑥스럽고 어색한 민낯이 읽힌다. 이런 어정쩡을 가려주고, 해갈해준 건 음악다방이었다. 당시 미팅이 꽃피고, 음악다방이 성업을 이룬 이유다. 더러는 소리로 자신의 존재감을 표출하곤 했다. 내 부모 세대가 뒤꼍에서 헛기침을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면, 7080 청춘은 통기타를 들고 나와 스펙을 과시했다. 지금 부는 신바람은 '나 어때?'이다. 그 물음 속에는 톡톡 튀는 개성이 꿈틀거린다. 당돌하지만 나만의 끼, 나만의 색깔, 나다움! 그것이다. 아류가 아닌 본류를 찾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정이 읽힌다. 그게 진정한 존재감일 것이다. 그래서다. 요즘 신바람은 예전보다 훨씬 당차고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다. 어느 세대든 가장 새 것과 색 바랜 꼰대의 맞바람 속에서 문화의 꽃은 지고 피었다. 지금의 신바람에는 디지털 첨단기술이 소용돌이치지만 그 폭풍의 와류 속에는 아날로그 감성이 흐른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신문화가 좋은 풍향으로 진화하는 까닭일 것이다. 그렇다. 신문화는 내 눈을 번쩍 뜨게 하고, 안이해지려는 내 일상을 깨우쳐준다. 시대와 호흡하려면 어쩌겠나.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신문화의 눈금을 빨리 읽어야 하는 것을.

2017-06-28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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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눈물겨운 기다림

문득 하늘을 쳐다볼 때가 있다. 그런 날이 있었다. 호젓한 산길을 거닐 때였다. 덤불숲 사이로 나리꽃 한 줄기가 여름을 향해 발돋움하고 있었다. 주홍빛 불꽃이 너무도 화사하고 눈부셔, 그 튕겨내는 빛을 따라가다 보면 고개를 들고 눈을 비비게 되는 것이다. 바람 한 자락에 하늘거리는 가녀린 꽃. 그 몸짓이 반갑고 애틋한 것은 아름다워서만은 아니다. 그 꽃을 피우기 위해 약육강식의 덤불숲 그늘에서 고난을 얼마나 참아왔던 걸까. 또 얼마나 몸부림쳤던 것일까. 그렇게 꽃피우기까지 모진 삶을 겪어왔을 나리꽃. 꽃잎에 대롱거리는 이슬이 눈물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그 나리꽃을 바라보며 나는 기다림을 생각한다. 치열한 땅을 짚고 혼자 힘으로 꽃피운 생명의 신비! 그 기적의 힘은 필시 기다림에서 나왔을 거라는 것. 고통스럽기에 기다림은 길었지만 참고 견디면 저 눈부시도록 찬란한 꽃을 활짝 피울 수 있다는 것. 삶이란 어쩌면 어떤 기다림을 위해 고통을 겪으며 피어나는 나리꽃인지도 모르겠다. 삶이라는 게 이런 걸까. 사람들은 기가 막힌 일을 당했을 때 하늘을 응시한다. 원망의 눈길이다. 더러는 절망하고 좌절하고 주저앉는다. 나리꽃은 그러나 비바람이 불든, 천둥 번개가 치든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다. 참고 견디며 기다렸기에 그 기막힌 일을 당하고도 기어이 활짝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침묵하면서 기다린 건 아니다. 폭풍이 몰아치면 쓰려지지 않으려 그 연약한 뿌리로 땅을 움켜잡아야 했으며, 햇빛을 받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줄기의 몸을 일으켜 세워야 했다. 나리꽃은 그런 시련 속에서도 결코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정중동(靜中動)! 조용하고 고요한 가운데 움직였다. 잠잠하다고 해서 움직임이 더디고 굼뜬 것은 아니었다. 뿌리와 줄기는 때론 메마른 땅에서 이슬 한 모금을 축이려 밤새 사투를 벌여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꽃피웠기에 불꽃같은 저 주홍빛 꽃잎을 바라보고 있으면, 불타오르는 용광로에서 금을 뽑아내는 연금술사를 연상하게 한다. 그 정중동의 의식 밑 심층에 용광로 같은 들끓는 기다림의 물결이 흐른다. 얼마나 값지고 당당하고 아름다운 자태인가. 나리꽃의 기다림은 준비하고 노력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기다림을 노력의 과정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목표 없는 노력은 없고, 참고 견디며 그토록 기다리는 것은 눈부신 꽃이라는 행선지가 있는 까닭일 것이다. 노력 없이 단순히 기다리면서 꽃피우겠다는 건 나리꽃에겐 웃긴 얘기다. 그건 방황이다. 정처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것과 같다. 희망의 꽃은 노력 없이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기다림은 새로운 도약을 위해 뜸을 들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마냥 침묵하는 건 아니다. 밥 짓는 광경을 보라. 재래식 가마솥이든 압력밥솥이든 첨단 전기밥솥이든 뜸들임이 없다면 밥은 설어버릴 것이다. 밥알들이 이리저리 뒤집히고 요동친 다음에, 기다림이라는 김이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며 밥을 차지고 맛있게 익게 하는 이치다. 같은 쌀이라도 뜸들임 정도에 따라 밥맛이 천차만별인 까닭이다. 보석의 가치를 결정하는 세공사의 다듬기 과정과도 같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바람에 나부끼는 나리꽃을 바라보면서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된다. 인생이란 원래 험난하다. 편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바람과 물결이다. 목적지를 향해 순항하기도 하고, 맞바람을 만나면 표류하기도 한다. 때론 풍랑 속을 헤쳐 나가야 하는 게 인생좌표의 숙명이다. 나리꽃이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다. 내일의 기다림이 있기에, 그리고 오늘 그것을 하나하나 성취해나가기에 세상 살맛이 나는 것이라고.

2017-06-21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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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마당에서 비움과 채움을 배운다

일전에 사진 한 컷이 번잡한 마음을 내려놓게 해주었다. 어느 시골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안에는 고색창연한 한옥 풍물이 담겨 있다. 그런데 정작 마음을 쉬어가게 해주는 곳은 한옥이 아니라 산그늘이 내린 숲속의 빈터, 그 집의 마당이다. 아늑하고 널찍한 것이 그 때 느꼈던 감성에 젖어들면 절로 평온해진다. 남는 게 사진이라고 했던가. 그냥 무심코 스치듯 찰칵 박은 사진 한 장이 도심생활의 메마른 내 마음을 오아시스로 적실 줄은 미처 몰랐다. 우리네 집 마당은 희로애락의 가족사가 흐른다. 그 흔적을 읽으려 사진 속으로 들어가 본다. 마당 한가운데에 서서 서성거리면 낯설지 않은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마당에 널어놓은 고추 멍석에, 한가득 눈부신 햇살이 내리쬔다. 멍석 위로 휙 훑고 지나가는 바람 한 자락이 시원하고 불타게 맵다. 마당은 다용도로 오버랩 된다. 아이들이 뛰놀면 동네 놀이터가 됐고, 장대를 세우면 마당은 빨래 건조대가 되어주었다. 때론 결혼식장으로, 잔치마당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사진 속의 마당은 내게 많은 걸 선사한다. 여백의 여유를 가져보게 하고, 풍경을 그려보게 하고, 마당을 거닐게도 한다. 왁자지껄하고 북적거렸을 마당. 지금은 고요하고 텅 비어 있다. 그 마당이 내 눈을 더욱 반짝거리게 하는 건 삶의 큰 지혜를 가르쳐주어서다. 한바탕 흥을 치르고 난 뒤엔 마당을 비워둬야 또 다른 뭔가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비울수록 풍부해지고, 새로움이 샘솟는다는 비움의 미학! 그것은 신선한 삶을 노크하는 물결이고, 동력이며, 바람이다. 텅 빈 마당은 먼지만 풀풀거리는 공터가 아니었던 것이다. 빈 마당의 정적은 다음에 펼쳐질 더 큰 이벤트를 준비하는 폭풍의 전야다. 옛 조상들은 그것을 알아차렸다. 마당을 늘 비워두었다. 비워두었기에 사람들이 모였고, 다양한 생각들이 나왔고, 흩어진 마음들이 하나로 모였다. 마당에 평상을 얹어 놓으면 달빛 아래에서 이야기꽃이 수북수북 피어났다. 케케묵어 식상한 얘기들은 흘러나가고, 신작 스토리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사진 속 마당도 그랬을 것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공원이나 길거리를 걷다가 문득 참신한 아이디어가 번득일 때가 있다. 이끼 낀 생각의 노폐물들을 털어내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생각의 꽃이 피어난 까닭일 것이다. 귓구멍 속의 귀지 덩어리가 무심결에 떨어져나가 귀가 밝아지듯 뇌력이 총명해지는 순간이다. 그 생각의 꽃은 언젠가 생활의 지혜로 만개할 것이다. 더러는 과학이 되고, 전설이 된다. 비움이란 뺄셈하듯 매번 마음만 먹으면 무념무상의 경지에 쉽게 이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채움에 급급한 덧셈 시대에 비움이 어디 쉬운가. 더 많은 돈을 벌고, 입고, 먹고, 듣고, 보고, 많이 갖고자 하는 덧셈의 욕망이 끝이 없는 것을. 일상들이 덧셈의 덫에 갇힌 형국이다. 버리는데 익숙하지 못해 장롱에 수년째 옷이 쟁여지고, 창고에는 필요 없는 물건들이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채로 골동품마냥 박혀있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이런 욕망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해 번뇌하고, 발버둥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비움의 마당을 그리워하면서. 나는 되풀이되는 일상의 번잡함을 비우기 위해 여행을 떠나곤 한다. 연초록빛 물감을 뿌려놓은 산과 에메랄드빛으로 너울거리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삶의 시간이 길게 늘어나고 세상이 넓어진다. 영혼이 자유롭게 뛰놀 비움의 여백을 안겨주는 것이다. 가까운 강가에 나가 졸졸거리는 시냇물 음악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청렬해지고 비워진다. 행복이란 비울 줄도 알고 채울 줄도 아는데서 싹트는 게 아닐까.

2017-06-14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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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단 한 장의 청춘 티켓

바람 부는 날 소나무를 만나면 문득 상념에 젖곤 한다. 저 싱그러운 푸른 잎을 어떻게 지켜온 것인가? 세찬 비바람과 얼음 추위에 시달리며 생을 이어왔을 이파리들. 그 모진 수난을 어떻게 견뎌온 것인가? 사태진 누런 황토를 뿌리로 움켜잡은 소나무. 이파리를 나부끼며 산 아래를 굽어보는 그 자세는 삶에 대한 끈질긴 애착이며, 강한 집념의 표출이다. 돌처럼 단단히 여문 저 굴곡진 나뭇가지마다 인고의 상흔이 남아 있건만 오히려 당당한 척 하기에 눈물겹다. 그런 소나무에서 청춘(靑春)을 발견한다. 늘 푸른 이파리의 생기발랄함이, 사방으로 뻗은 나뭇가지의 자유분방함이 청춘의 어감이 자아내는 원초적 본능과 닮아 있다. 산등성이에 홀로 선 채 태양을 바라보는 늠름한 기상은 원대한 이상(理想)을 꿈꾸는 모습에 다름 아니다. 파도처럼 굽이치는 자태에서 질풍노도의 숨결이 물씬 묻어난다. 닮은 게 어디 타고난 소나무의 형상뿐이랴. 코를 톡 쏘는 짙은 솔향기에는 벅차오르는 설렘이 묻어 있다. 바람 불면 운율을 탄다. 청춘의 사전적 의미는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사전이 일러주는 청춘은 길어봐야 십년 남짓.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그 청춘은 짧았다. 불꽃처럼 반짝거렸던 청춘이었다. 이 유월에 메뚜기 한철 같은 청춘. 산천 구경을 만끽하며 완보하리라는 그런 청춘 열차는 아니었다. 눈 깜짝할 새 스쳐 지나간 구간. 그 짧고 금쪽같은 청춘 구간에서 대체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인생의 열차는 행선지가 있다. 아, 이제야 깨닫는구나. 인생의 행선지는 그 황금시간대를 지나면서 아로새겨졌다는 것을. 단 한 장의 청춘 티켓! 꿈과 이상, 희망을 싣고 어디론가 데려다줄 백지 티켓. 청춘 구간에서 미래의 인생 로드맵이 시나브로 그려졌을 거라는 생각을 할 때면 전율이 인다. 과연 열정을 다해 청춘을 꾸려왔던가? 배회하며 허송세월한 건 아닐까? 귀한 젊은 시간들을 허공에 날린 건 아닐까? 이 물음을 곱씹을 때마다 후회한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청춘은 천재지변에도 봄이 오듯 찾아온다. 어느 누구든, 어디에 있든 기어이 오고야 만다. 흙수저든, 헐벗었든, 주린 배를 움켜쥐었든 찾아온다. 청춘은 이런 공평한 내력을 지니고 있기에 고맙다. 문제는 어떻게 쓰느냐다. 그건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그 길에는 늘 설렘만 있는 게 아니다. 때론 좌절과 절망, 불안, 아픈 마음의 파도를 이겨내야 한다. 구름이 잠시 해를 가려 마음이 어두워지더라도 인내할 수 있는 큰 그릇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청춘의 본질이다. 청춘의 계절은 봄이다. 소나무의 청춘은 계절을 탓하지 않는다. 늘 푸른 잎을 지켜오기에 사계절 내내 청춘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사람들은 흔히들 청춘을 '보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대중가요의 '청춘을 돌려다오' 노랫말이 중장년층의 마음을 달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흐르는 세월을 탓할 일만은 아니다. 청춘을 누가 빼앗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다. 청춘은 내가 받아들이고 간직하면 되는 것이다. 이상을 꿈꾸는 것도, 젊게 사는 것도 내 몫이다. 청춘은 과거를 말하지 않는다. 왕년이란 단어는 없다. 미래만 있을 뿐이다. 미래를 준비하는 자, 그들에게는 희망찬 설계도만 있을 뿐이다. 청춘의 뜰에 왕성한 추진력의 샘물이 솟구치는 까닭이다. 그런 뜨거운 열정으로 인생을 배우고 갈고닦아 청춘을 꽃피우는 것이다. 가슴에 청춘이 박동하지 않는다면 인생이 얼마나 쓸쓸할까. 세상이 고단하고 번잡할지언정, 그래도 태양이 힘차게 떠오르는 건 청춘 때문이 아니겠는가.

2017-06-07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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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치매 국가책임제' 이행 강조...재원 마련 문제없나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자신의 대표 복지공약인 '치매 국가책임제' 이행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재원 마련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일 국민건강보험 서울요양원을 방문해 치매 환자와 그 가족, 간호 종사자 등을 만난 자리에서 " 치매 관련 본인 건강보험 부담률을 10% 이내로 확 낮추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이제는 치매환자를 본인과 가족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국가와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며 "복지부에서 6월 말까지 치매국가책임제의 구체적인 방안을 강구해서 보고해주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의 치매 국가책임제 공약은 크게 치매관련 시설 확대 및 치매 치료비 본인 부담 완화로 요약된다. 먼저 지역사회 치매지원센터 설치를 확대해 치매검진 및 조기 발견, 의료·복지·돌봄·요양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또 전국적으로 치매책임병원을 지정해 진단 및 치료서비스를 제공할 방침이다. 치료비 부담을 위해서는 치매 의료비 90%가 건강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노인장기요양보험 본인부담 상한제를 도입할 계획이다. 이날 문 대통령은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이 치매지원센터를 대폭 확대하는 것"이라며 "치매지원센터가 현재 47개밖에 되지 않는데 그것도 40개 정도는 서울에 있다. 이를 250개 정도로 대폭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치매 국가책임제의 본격적인 시행 시점을 내년으로 보고 있다. 이를 위해 올해 추경에 우선적으로 관련 예산 2000억원을 반영해 올 하반기부터 첫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하지만 정부의 이같은 재원 마련 대책에 우려를 나타내는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자유한국당과 국민의당, 바른정당 등 야 3당이 정부의 일자리 추경안에 대해 강경 모드로 돌아서면서 추경 예산 통과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 정우택 원내대표는 지난 1일 기자간담회를 열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10조원 남짓의 추경안 취지는 공공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것으로 듣고 있는데 일시적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국가재정법에 규정돼 있는 추경안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바른정당 주호영 원내대표도 같은 날 의원전체회의에서 "국가재정법 89조는 추경 편성 요건을 전쟁이나 대규모 재해가 발생한 경우, 경기침체·대량실업 등 대내·외 여건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한 경우로 규정했다"며 "이번 추경이 이런 요건들에 과연 해당되는지 의문이 든다"고 강조했다.

2017-06-04 15:08:33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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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욕망의 사용설명서

인공지능(AI) 알파고는 발칙했다. 알파고와 커제 9단과의 바둑 대결. "너 이거 알아?" 알파고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묘수를 던졌다. 알고리즘 전술은 가히 변화무쌍했다. 예기치 않은 파격수가 바둑판에 착착 꽂혔다. 인간계 최고수는 그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땀을 뺐다. "그렇게 밖에 못 두겠니"라고 속삭이는 거 같았다는 게임. 결과는 삼세판 모두 알파고의 승. 커제는 참았던 눈물을 떨궈야 했고, 알파고는 인간계 바둑의 천하를 평정하며 기세등등했다. 천하무적의 돌을 휘둘렀던 알파고는 그러나 돌연 바둑판에서 손 떼겠다고 선언했다. 인간들은 '바둑의 신' 강림을 연호하며 부여잡았지만 알파고는 냉정하게 뿌리쳤다. 은퇴의 변이 섬뜩하다. 인간이 굳이 가르쳐 들지 않아도 스스로 새로운 논리와 지식을 깨우칠 수 있다는 저 불꽃 스치는 예고가. 그것은 5천년을 갈고닦은 인간 바둑판에선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는 비아냥거림으로 들렸고, 바둑 평정은 시작에 불과하고 곧 인간 세계를 지배할 거라는 선전포고였다. 물론 공학도에겐 장밋빛 청사진으로 들렸을 것이다. 더러는 새로운 문명의 지평을 여는 세기적 대사건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을 거다. 그런데 그 역습에 대한 출구전략은 여태 들어본 적이 없다. 구글의 딥마인드 측은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느냐를 정하는 것은 사람'이라고 경계했다. 문제는 그 가이드라인을 점지한다는 사람들의 품성. 모두가 성인군자일 수도 없거니와, 진화에 질주 본능을 드러내는 인공지능이 자칫 이성을 잃으면 어디로 튈지 아무도 장담 못한다. 그래서다. 이런 물음을 달게 된다. 그 욕망의 끝은? 가늠조차 안 된다. 어렴풋하게나마 그 끝은 감정과 자아를 지닌 그 무엇에 닿는다. 마음의 씨를 이식한 그 무엇. 그것도 창의력을 갖고 스스로 학습하고 진화하는 능력을 갖춘다면? 과학자들은 그런 초인공지능(ASI)을 가진 인간 아바타가 30년 내 출현할 걸로 보고 있다. 만물의 이치를 통달한 척척박사 빅 데이터 칩이 불티나는 풍경도 그려진다. 그 칩을 인간 뇌에 끼운 '증강지능 인간(AHI)'의 등장을 말이다. 알파고는 그런 밑그림까지 그리며 욕망의 입을 벌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당장 돈이 되는 쪽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의학이다. 수천만 건에 달하는 진단. 이 방대한 예시들을 자율학습해 환자의 증상에 따라 병명을 속전속결로 진단하는 의사로 변신할 것이다. 다음 욕망은 한 치의 오차를 허용치 않는 정교한 '시술의 신'이다. 신약 개발은 그야말로 돈밭이다. 고급 인력들이 머리를 맞대고 수년씩 걸리던 특효약을 혼자서 수 주 내에 개발할 거다. 그렇다면 그 욕망의 끝은? 하나같이 척척박사 뇌 칩으로 무장된 영재들! 손만 스쳤다하면 완치되는 시술! 만병을 통치하는 불로초 개발! 과연 이런 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그런 상황을 '인류의 종말'로 봤다.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는 '악마의 소환'이라고 경고했다. 나는 그들의 말을 믿는다. 만일 상품화된 칩에 오류의 알고리즘 바이러스가 창의적으로 증식한다면? 오판에, 오진에, 오작동에 세상은 출구 없는 대혼란에 빠질 거다. 인공지능이 좇는 욕망의 끝은 신의 영역일 거라는 생각이 전율처럼 스친다. 인공지능이 제아무리 날뛰어도 인간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조물주의 절대 명제. 스포츠 경기에 심판 없이 비디오판독기가 승부를 판정하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숨 쉬지 않고 번민하지 않는 기계 의사에게 생명을 맡긴다고 그려보라. 그건 인류 종말의 축소판이다. 어쩌면 신이 인간의 뜨거운 가슴 속에 욕망의 사용설명서를 넣어줬는지도 모른다. 그 사용설명서가 궁금하다.

2017-05-31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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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냄새의 미학

황토 담을 따라 꾸불꾸불 이어진 고샅길. 밥 짓는 연기를 피어 올리는 키 작은 굴뚝. 여기에 홍조 띤 저녁노을이 산 아래로 나지막이 내려와 동네 어귀를 덧칠하면 한 폭의 풍경화가 따로 없다. 이 목가적 풍경을 떠올리는 건 눈의 호사 때문만은 아니다. 저 황토 담장 너머로 솔솔 전해져오던 된장찌개 내음이 그리워서다. 어찌나 구수하게 진동했던지. 우리 집 된장찌개 냄새인가? 동네 아이들은 술래잡기에 푹 빠졌다가도 침을 꼴딱거리며 집으로 줄달음을 놓았다. 투박한 뚝배기에 보글거리는 토종 된장찌개! 입맛이 영 시들할 땐 저 풍경 속의 냄새를 떠올리면 구미가 샘솟는다. 이 글을 쓰면서도 군침이 절로 괴는 것을 어쩌랴. 이따금 그 냄새의 흔적을 찾아 내로라하는 맛 집을 들르곤 한다. 그러나 매번 고개를 가로 젓는다. 전가의 보도처럼 수십 년 간 바통을 이어오는 전통 된장집이 없어서가 아니다. 세월 따라 맛 따라 출렁거리는 변덕스러운 입맛 탓도 아니다. 풍경 속의 냄새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구수했던 된장찌개 냄새는 왜 보이지 않는 걸까. 그것은 풍경 속의 된장찌개에 또 다른 냄새가 시나브로 스며들어 있어서다. 밥 짓는 연기 냄새, 물바람에 묻어온 흙냄새, 울긋불긋 피어난 꽃들의 향이 파도처럼 물결쳤을 것이다. 눈과 귀로 맡을 수 있는 풍경의 냄새도 아른거렸을 것이다. 황토 담장, 툇마루, 아늑한 저녁노을, 졸졸거리는 개울물, 춤추는 나무숲, 풀밭에서 뛰노는 아이들, 산 중턱에 걸린 달. 이런 감성의 냄새들이 된장찌개에 배어있었던 거다. 마음 밑바닥 어딘가에 묻어둔 냄새의 편린들! 아, 이제야 가슴을 친다. 그 풍물 냄새들이 한데 어우러져야 비로소 내 추억의 된장찌개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구나. 그 때 그 시절의 향취와 체취를 버무려 맛을 낸 냄새랄까. 오랜 세월 기다림으로, 그리움으로 절여진 그 냄새. 어쩌다 옛 고향 풍경과 엇비슷한 마을길을 거닐다 된장찌개 내음이 스치면 왜 기시감을 느끼게 되는지, 군침 도는 된장찌개를 먹고도 왜 까닭모를 허기증을 느끼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설령 고향을 무대로 똑같은 풍경과 소품들을 끌어다가 찌개를 끓인다 해도 그 된장 냄새를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공기 좋고 물 맑은 자연의 풍물이 존재하지 않거니와 장맛도, 손끝 맛도 다르다. 분위기는 또 어떤가. 세월에 따라, 시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냄새는 그 풍경 속에서 날개를 펼쳐 배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냄새를 더듬거리면 툇마루에 동그마니 올라앉아 달을 쳐다보는 단란한 가족이 보이고, 오순도순 옛 이야기가 들려온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두고두고 맛보는 된장찌개. 추억은 보글보글 된장 알갱이를 튕겨 내는 뚝배기에 닿는다. 보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그래서다. 된장찌개는 꼭 뚝배기에 끓여 먹는다. 왠지 뚝배기가 어릴 적 맛보았던 된장찌개 맛을 끄집어내줄 것만 같아서다. 뚝배기를 보면 인간적인 여백이 보인다. 투박하지만 후한 인심, 은근히 오래가는 따스한 정, 가식이 없는 소박함, 좀 부족하지만 진솔한 향기가 뚝배기에서 묻어난다. 사람과 닮은꼴이다. 뚝배기 같은 사람! 그런 사람에게는 인간미가 묻어난다. 사람냄새다. 삶이 팍팍할수록 사람냄새가 그리운 법이다. 향기 나는 사람이랄까. 자신을 낮추고 배려하는 그런 사람들은 주변에 많다. 더러는 고단한 사람들이 마음껏 뛰놀게 해줄 넉넉한 마음의 뜰을 가진 사람도 있다. 인간적인 여백이다. 풋풋하고, 순박하고, 토속적인 사람. 내 추억의 된장찌개 맛이 그리운 건 어쩌면 그 때 그 시절의 투박한 사람냄새를 그리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2017-05-24 09:07:28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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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한중관계 결정적 시점, 원만히 해결해야"…좌석배치 '외교적 결례' 구설수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특사인 이해찬 전 국무총리와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만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 문제로 경색된 한중관계의 원만한 해결 필요성에 공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 주석은 19일 인민대회당에서 이 특사와 만나 한중 양국간 갈등을 원만하게 처리하자고 밝혔다고 중국 관영 언론들은 일제히 보도했다. 시 주석은 "현재 한중 양국 관계는 결정적인 시점에 처해 있다"며 "중국은 한·중 관계를 중시하며, 한국 측과 함께 어렵게 얻은 양국 관계의 성과를 지켜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상호 이해, 상호 존중 기초 위에 정치적인 상호 신뢰를 구축하고 갈등을 원만하게 처리하며 양국 관계가 이른 시일 내 정상적인 궤도로 돌아오도록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특사는 "한국은 중국의 중대한 우려를 충분히 이해하며 중국 측과 소통과 협력을 통해 양국 관계 발전을 저해하는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화답하며 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이 특사와 시 주석은 북핵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시 주석은 "중국은 한국 새 정부와 소통을 강화하고, 지역 긴장 정세의 조속한 완화, 한반도 비핵화 추진, 대화의 조속한 재개를 추진해 나갈 것"이라며 기존 중국 정부의 원칙을 재확인했으며, 이에 이 특사는 "한국도 중국 정부과 함께 한반도 비핵화와 동북아 지역 평화와 안정, 안전을 위해 노력하려 한다"고 답했다. 한편, 이날 접견에서의 이 특사의 면담 좌석 배치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전 대통령 특사와의 면담 시 나란히 앉았던 것과는 달리 이날 시 주석은 대형 테이블 가운데인 상석에, 이 특사는 몇 걸음 떨어진 테이블 우측 옆쪽에 앉아 면담이 진행돼 '외교적 결례'라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특히 사드 문제에 대한 한국에 대한 중국의 '불만 표시'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특사단 측은 "중국이 추궈훙(邱國洪) 주한 중국대사를 베이징으로 불러 공항에서 특사단을 영접토록 하는 등 배려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공항에서) 한국 특사를 모시고 중국대사가 본국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라며 이러한 해석을 경계했다. 또한 "(이날 면담에서도) 시 주석이 당초 예정된 20분을 넘겨 40분간 특사단과 대화를 했으며 이 전 총리를 단장으로한 특사단 구성도 한중관계의 중요성을 고려했다며 높게 평가했다"라고 밝혔다.

2017-05-19 17:10:28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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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새는 왜 강에서 발걸음을 멈출까

댓바람부터 예닐곱 참새들이 수런거린다. 뭐라 지껄이는데, 목청을 돋우는 걸 보니 녀석들의 일상도 꽤 바쁘긴 바쁜 모양이다. 한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길섶에 동그마니 앉은 숲으로 쭈르르 숨는다. 저만치 숲을 쬐여주는 봄 햇살이 착하다. 풀밭 위로 구슬처럼 구르는 새들의 지저귐! 그 언어의 속뜻을 모르니 감성 다르게 들린다. 향긋한 풀 바람을 맞으며 들으면 흥겨운 콧노래로 들리고, 세상이 팍팍하고 궁할 땐 슬프고, 마음이 호사스러울 땐 정겨워라. 새소리는 이렇게 사소하고 변덕스럽게, 그러나 매번 감탄으로 나를 적신다. 어디 새소리뿐이랴. 산정에서 마주치는 한 자락의 바람소리, 나뭇잎 뒹구는 소리, 몸을 비비는 숲 소리, 졸졸거리는 시냇물 소리, 바람결에 파릇파릇 일어나는 풀잎 소리, 풀벌레 소리. 지금 5월의 산은 비발디의 봄 협주곡을 연주하며 농익어가고 있다. 자연의 소리를 꼭 산 속을 들어가야만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지그시 눈감으면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는 아련한 추억의 소리도 있다. 시인들은 웅숭깊은 소리는 마음으로 듣는다고 했더랬다. 나부시 하늘거리는 나비의 날개 짓 소리를 듣고, 나뭇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과 언덕 너머로 피어나는 물안개에도 소리가 묻어 있다는 걸 느끼는 까닭일 것이다. 오래전 몽돌해변에서 들었던 몽돌들의 속삭임이 시정(詩情)으로 밀려온다. 건반의 마술사 파도가 수천수만 음표를 지닌 몽돌과 협연하는 콘서트! 저 부드럽게 찰랑대는 물결이 그 모난 돌을 곱고 둥근 음표로 다듬기까지 얼마나 연주했던 걸까. 우리는 파도와 몽돌이 빚어내는 협주곡을 통해 지혜를 배운다. 부드러움이 거침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내 안을 다스리게도 한다. 번잡한 세파 속에 곧추서는 번뇌를 누그러뜨리고 다독이는 부드러운 솜털이 거기에 있다. 추억의 소리를 더듬다보면 마음이 건반이 되고 악보가 되는 것이다. 때론 눅진하게 눌어붙은 삶의 고단함을 씻어내곤 한다. 잃어버린 삶의 감각을 되살려주기도 하고, 소리 내지 않는 소리를 어떻게 귀 기울여들어야 하는지도 깨닫게 해준다. 소리란 참 신통하고 묘하다. 낯선 소리는 설렘으로 오고, 귀에 익은 소리는 반가움으로 다가 온다. 그러나 마음에 묻어둔 추억의 소리는 시간 다르게, 계절 다르게, 장소 다르게, 감성 다르게 들려온다. 웅숭깊어서인가. 그땐 못 느꼈던 소리가 문득문득 큰 울림으로, 뭉클함으로, 때론 애틋함으로 밀려온다. 찰나적으로 번득이면서도 불멸의 여운으로 남아 있는 까닭일 것이다. 그래서다. 추억의 소리가 조각조각 한데 어우러지면 산과 강이 되고 들녘을 이룬다. 여행길에 호젓한 강변을 거닐다 보면 새를 발견하게 된다. 하필이면 앙상한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말이다. 자태가 왠지 처연하다. 새들은 왜 강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걸까? 깃털을 휘날리며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일까? 강을 향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아무도 기억해낼 수 없는 아득한 태고의 신비한 천연의 소리가 듣고 싶다고 중얼거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휴대폰 벨소리며, 자동차소리며, 번잡한 첨단 기계음들을 씻어내자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천연의 소리는 때 묻지 않은 순백의 소리, 진솔한 소리, 첨단 과학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본질적인 소리다. 천연 소리의 극치는 소리 내지 않는 정밀(靜謐)한 늪의 소리다. 침묵한다고 해서 왜 소리가 없겠는가. 지극히 잔잔한 밀물과 썰물이 있다. 늪에도 소통하는 물결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큰 소리에만 귀를 쫑긋 세운다. 그래서 늪이 우리에게 일러준다. 소통이 제대로 되려면 큰 소리에 묻혔을지도 모를 작은 소리를 찾아내 귀 기울여야 한다고.

2017-05-17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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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화해

밀레의 만종(晩鐘)! 그저 바라만 보아도 고요해지고 평온해진다. 어스름이 깔리는 황혼녘, 저 목가풍의 광활하고 황량한 들판 한가운데에 서서 기도를 올리는 한 쌍의 농부. 그림의 스토리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고, 반목도 다툼도 없다. 그 시각 시계바늘은 ‘평화’에 멎어 있다. 두 손을 모은 채 고개 숙인 부부 농부의 실루엣이 그렇고, 들판에 쉬고 있는 손수레와 바구니, 자루가 평화롭다. 새 아침을 맞은 이 시각. 밀레는 세상을 향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을까. 나는 그를 통해 화해하는 감성을 익혔다. 삶이란 수고와 그 고단함을 늘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일전에 우연히 그를 조우할 수 있었다. 햇살이 선한 봄날, 책갈피에서 갑갑증을 느끼고 있을 활자들이 안쓰러워 기지개라도 켜줘야겠다 싶어 책장을 정리하다 낱장으로 발견한 것이다. 그간 무심하게 방치하다시피 했으니 이게 얼마만인가? 하고 손을 내밀기도 겸연쩍었다. 어쩌다 그와 마주치노라면 한 편의 감동 드라마가 아련하게 펼쳐진다. 그를 처음 본 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동네 허름한 이발소에서였다. 그의 분신인 만종은 액자 속에 담겨 거울 위 벽면 한복판에 걸려 있었다. 내 말똥거리던 눈은 그러나 거울 속에 비친 장미꽃에 빠져 있었다. 길 건너 담장 너머로 만발한 장미꽃! 같은 반 친구 집의 꽃이었다. 하오의 햇살은 화사했고, 장미꽃은 눈부셨다. 꽃이 그토록 아름답다는 걸 그 때 알았다. 언젠가 친구에게 한 송이를 달라고 간곡하게 말했던 그 장미꽃. 친구는 언하에 거절했다. 친구가 야속했던 건 장미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산수시간 시계공부를 위해 학습용 시계를 구입해야 했다. 큰 바늘과 작은 바늘이 달린 손바닥 크기의 플라스틱 원형 시계. 학용품이 귀했던 그 시절, 학습 시계를 구입한 학생은 열에 한두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 금쪽같은 시계를 구입한 날 눈앞에서 사라졌다. 교문과 신작로를 이어주던 다리 아래 어디론가 말이다. 친구가 내 시계를 뺏으려 손을 치는 바람에 다리 아래 그 성깔 사나웠던 강물에 휩쓸려 간 것이다. 친구는 그 길로 도망자 신세가 됐다. 만일 친구 자신이 갖고 있던 시계를 공동 명의로 공유했더라면 문제는 쉽게 타결됐을 것이다. 그는 그런 협상을 거부했고, 내 시야에서 점점 벗어났다. 우정도 아득하게 멀어졌다. 나는 시계공부 시간 때마다 허탈해진 빈손을 만지작거려야만 했다. 내 조급한 마음의 시계바늘은 그렇게 돌아갔고, 서너 주 후에야 시계공부가 끝나면서 멎었다. 그러나 내 기억의 시계태엽은 머리를 깎는 내내 뿔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 뿔난 화를 누그러뜨린 건 거울 위 그림이었다. 이발소를 들를 때마다 무심하게 바라보았던 밀레의 만종. 화가의 이름도 제목도 관심 밖이었다. 그저 내 어린 가슴에 평온하게 와 닿았던 그림. 때론 슬퍼지는, 지금 생각해보면 뭐랄까 우수(憂愁) 같은 것도 느꼈던 것 같다. 그 그림이 울화를 풀어주고, 슬픔을 다독거려주는 넉넉한 뜰이었다는 사실을 그땐 난 몰랐다. 웬일인지 그날따라 그 그림에 내 시선은 오래 머물렀지만 그걸 눈치 채지 못했다. 마냥 평화로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토록 야속했던 내 친구가 거울 속에 있지 않은가. 활짝 열린 이발소 문 옆에 숨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장미꽃 여러 송이를 든 채 말이다. 화해란 이렇게 감동적으로 이뤄지는 것인가. 새 아침을 맞은 이 시각. 치열했던 대선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온 이 시각. 밀레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그동안 빚어졌던 대립과 반목을 훌훌 털어내고 화해와 소통의 손길을 내밀어보라고.

2017-05-10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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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뿔이 달린 말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속뜻을 전할 순 없을까? 뜬금없이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되는 건 말들이 범람해서일 것이다. 왜 그런 의사소통이 없겠나.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산과 강, 공원으로 나들이 길에 오르면 길목 저편에서 얼마든지 그런 침묵의 소통을 목도할 수 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손잡고 걸어가는 노부부의 그 마주잡은 손끝에서, 벤치에 앉은 연인들의 맞댄 어깨에서, 말없이 그러나 사무치도록 대화가 끊임없이 오가는 것을. 침묵의 의사소통! 거기에는 수천수만 가지의 언어들이 불꽃처럼 스친다. 말을 토해내지 않아도 영롱한 언어들이 손끝과 어깨에 굴러다니는 것이다. 어느 가수는 그래서 소리 없는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다고 목 놓아 사랑을 노래했다. 침묵하는 것만으로도 하나가 된다고 했다. 그렇다. 오랜 세월 긴 그림자를 함께 이끌고 온 노부부는 마주잡은 손끝만으로도 그 고단함이 풀렸을 것이고, 연인들의 사랑은 맞댄 어깨의 작은 몸짓 하나만으로도 영글었을 것이다. 사랑은 어쩌면 침묵 속에서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침묵이 최고 경지의 언어라고 했던 걸까. 사랑이 잠재운 침묵. 그곳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곳이 고즈넉한 길섶이든 시선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거리든 빗장을 걸지 않아도 방해받지 않는다. 침묵은 눈빛의 언어이자 마음의 언어이기에 그럴 것이다. 어느 날 문득 화사한 햇빛이 금가루를 뿌리거나, 소낙비라도 내려줄 양이면 무언의 속삭임은 한 편의 시가 된다. 눈빛과 마음의 언어! 그것이 정녕 뜨거우면 심장을 고동치게 하고, 절절하면 눈물겹기까지 하다. 엄마와 아기가 대화하는 모습을 보라. 엄마들은 아기의 옹알이를 금세 알아듣는다. 소리보다 눈빛과 마음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고, 가슴으로 듣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가슴으로 의사소통할 수만 있다면? 세상 시계바늘은 일찍이 '평화'를 가리키고 있었을 터다. 세상이 시끄럽고 때론 흐려지는 것은 이해득실에 오염된 헛말들이 먼지투성이로 풀풀거리는 까닭이다. 말은 참 묘한 녀석이다. 같은 말이라도 뱉어내는 입에 따라 숨은 뜻이 다르거니와 듣는 귀에 따라 천차만별로 해석된다. 신경을 곤두세워도 의사소통이 어려운 이유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범속한 일상에서 말이 많으면 괜한 오해의 불씨를 낳기 십상이다. 그 오해가 천리 길을 달려가는 게 문제다. 그러기에 우리 경험칙이 이렇게 일러주었다. 생각 없이 쏟아내는 말끝은 늘 허전해지고, 더러는 흉기로 변해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경고했더랬다. 쓸데없이 지껄이는 말은 잡담이라고 부른다. 잡담에는 사색과 성찰이 담겨 있지 않다. 그나마 세월의 나이테가 만들어주는 자신의 언어마저도 타성의 와류에 휩쓸리고 만다. 영혼의 빛깔이 퇴색되는 것이다. 사색과 성찰이라는 필터를 여과한 말에는 영롱한 진실이 고여 있다. 그것이 참말이다. 참말은 무게가 있고, 와 닿는 울림이 크거니와 역설적이게도 짧을수록 여운이 길다. 이해의 폭도 넉넉하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말에는 표정이 있다. 말 구절구절마다 그 사람이 보인다. 넉넉한 뜰이 있는 말에는 따스함이 묻어나고, 사랑이 넘실거린다. 자연의 순백 향기를 맡을 줄 아는 말은 고결한 품성이 배어난다. 바람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말은 깊은 감성이 보인다. 뿔이 달린 말은 가슴 아파하는 얼굴이 숨겨져 있고, 소리 없이 울부짖는 눈물이 보인다. 그 말 속에는 식솔들을 책임져야 하는 집안의 가장들과 취업난에 좌절한 젊은이들이 웅크리고 있다.

2017-04-26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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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마을버스를 끈 아이

잠결에 봄비 스치는 소리가 어째 좀 요란하다했다. 훤하게 무더기로 피었던 벚꽃이 길섶에 흥건히 누워 있다. 야속하다. 꽃 눈송이를 흠뻑 맞게 해줬더라면 이토록 서운하진 않았을 것이다. 봄비도 인간만큼이나 변덕스럽다. 메마른 꽃봉오리를 틔워 눈부시게 꽃 사태를 만들더니, 밤사이 시샘하듯 강풍까지 불러내 흩뿌려 놓았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봄비와 시간이 다르게 교차되는 기온의 오락가락에 아직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의 헷갈림은 또 어쩌란 말이냐. 지난 주말 동네 공원을 가로질러가는 길. 마을버스 차창 밖의 봄날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모처럼 친구와의 약속이 있어 가는 길이다. 시내 약속이 있을 땐 어지간해선 걷는 편이다. 한가한 날 늘어지는 몸에 탄력을 붙일 기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걸어서 30분내 거리다. 이 날은 약속이 늦었다는 핑계로 몸은 마을버스 뒤 좌석에 싣고 있었다. 성급하게 지는 봄꽃이 아쉬워서일까. 차창 밖을 내다보는 승객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무겁다. 화난 것 같다. 노쇠한 마을버스의 몸짓도 웬일인지 예사롭지 않다. 정차할 때마다 동작이 크다. 운전석 백미러엔 뿔난 운전사의 얼굴을 채우고 있다. 운전사의 심기를 누가 할퀸 것인가. 불현 듯 오래전 일이 떠오른다. 시장입구 정류장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마을버스의 액션이 컸었다. 닫히던 탑승 문이 뭔가에 놀란 듯 덜컹! 재차 열렸다. 얼마 후 툭! 묵직한 게 승차계단 상단에 얹힌다. 괴나리봇짐이다. 또 수초가 흘렸을까. 꾸부정한 할머니가 한 계단 한 계단 힘겹게 올라온다. 갈 길은 바빠도 어쩌겠나. 쉬엄쉬엄 굴러가는 게 마을버스인 것을. 할머니와 노쇠한 마을버스. 라이프 사이클이 '슬로우'라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문제는 할머니가 차에 올라 크게 한 숨을 돌리더니 자리에 앉으면서 생겼다. 차가 부동자세로 묶인 것이다. 할머니가 차비를 지불할 때까지 안전을 위해 정차해야 하는 상황. "할머니 차비내세요" 그런데 할머니는 묵묵부답이다. 성질이 났는지 차는 부르릉대며 공회전했고, 할머니는 차창 밖을 응시하며 딴청을 부린다. 운전사는 등을 돌려 할머니의 눈과 마주치지 않아야 했다. "또 그 할머니잖아! 이번엔 안 통해요" 운전사는 이런 날을 단단히 벼른 듯 차비를 받지 않으면 출발하지 않을 기세다. 할머니가 무임승차를 꽤 한 모양이다. 급기야 엔진 소리도 멎었다. 앞좌석에 앉은 한 아저씨가 대신 차비를 지불하겠다며 어서 가자고 재촉했다. 운전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할머니만 쳐다본다. 발이 묶인 그 마을버스를 움직이게 한 건 네다섯 살짜리 꼬마 여자 아이였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또랑또랑하고 맑은 천상의 목소리가 한바탕의 신경전을 일순 잠재운다. 엄마와 함께 차에 오른 아이의 결정적인 또 한마디가 가슴을 파고든다. "운전하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세요! 아저씨" 운전사의 수고로움을 토닥여주는 따스한 한마디. "응 그래" 운전사의 목은 메어 있었고, 차는 출발했다. 아이의 인사 한 마디가 마을버스를 움직이게 한 것이다. 인사의 힘이란 이런 걸까. 그래서 인사란 돈이 들지 않는 동력이라고 했던 걸까. 곱씹어 생각할수록 콧잔등을 시큰하게 하는 추억. 세월이 흐르고 세태가, 방식이 바뀌었어도 인사는 늘 반갑다. 인사는 감동을 주는가하면, 용서하게 하고, 눈물을 흐르게도 한다. 이런 말은 그러나 그 아이에겐 때 묻은 논리에 불과할 것이다. 차에서 내려 한참 동안 마을버스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뒤뚱뒤뚱 평화롭다. 봄날은 그 때의 정겨운 추억을 싣고 그렇게 굴러가고 있었다. 무심한 봄비와 강풍이 밤새 벚꽃을 흩뿌려놓은들 어떠리.

2017-04-19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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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만년필의 글 여행길

이따금씩 습작을 할 때 만년필로 쓴다. 너덜거리는 원고지에, 따스한 햇살을 초대하고, 향 그윽한 원두커피 한 잔을 곁들이면 팍팍한 마음이 녹는다. 무얼 긁적거리려나? 궁금했는지 봄 햇살이 저 먼저 원고지에 걸터앉아 아지랑이 파티를 연다. 종이 냄새가 풀풀거리는 누런 원고지, 물기 젖은 잉크, 짙은 커피 향. 만년필에 그토록 집착하게 된 건 이런 고전적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다. 스마트워크 시대에 잊혀져 가는 육필(肉筆)에 대한 정감을 간직하고 싶어서이다. 문득 책 앞장에서, 행간에서 만년필로 쓴 글씨를 발견할 때마다 흑백 필름이 스친다. 아! 그때 그랬었지. 세월은 흘렀어도 육필에는 여전히 숨이 붙어 있다. 한자 한자가 감탄사이고, 더러는 그 때 그 시절의 표정과 몸짓들이 보인다. 책과 연을 맺었던 문청들의 눈매가 아른거리고, 목소리가 들린다. 어쩌다 밑줄 친 행간에 쓴 메모를 읽노라면 번민이 와락 가슴으로 밀려든다. 육필의 힘이란 게 바로 이런 걸까. 내 만년필이 원고지를 긁적거리며 뛰노는 까닭이다. 만년필이 문청들의 전형이 된 시절이 있었다. 만년필 곁에는 늘 원고지와 커피 한 잔이 따라 다녔다. 7080 다방 풍경이 그런 모습을 담았더랬다. 저마다 칙칙한 다방 한 귀퉁이 자리를 차지하고는 식은 커피를 마시며 원고지에 시 몇 줄을 긁적거리곤 했다. 당시 커피가 시 구절에 단골 메뉴로 등장한 배경일 것이다, 그러나 코끝에 오래 머무는 원두커피는 아니었다. 더러는 쓰디 쓴 블랙으로 마시긴 했어도 대개가 커피가루, 프림, 설탕을 혼합한 다방식 커피였다. 내 만년필을 추억의 뒷장으로 넘긴 건 기자용 노트북이었다. 1991년, 신문사 서너 군데에 처음 노트북이 지급됐다. 들고 다니는 미니컴퓨터. 다들 신기해했다. 문제는 원고작성이었다. 손 글씨에서 자판 글씨로의 전환. 그건 아날로그 문명에서 디지털 문명으로 넘어가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 이정표 앞에서 펜에 익숙한 손은 한동안 방황해야 했다. 자판을 받아들이고, 자유롭게 퉁기는 데 수개월이 걸렸지 싶다. 노트북의 등장과 함께 편집국엔 원고지가 사라졌고, 속도전을 펼치는 자판 소리만 요란했다. 내 만년필은 유물이 됐다. 그 만년필이 요즘 라이터돌 역할을 해주고 있다. 글이 떠오르지 않을 때 불을 댕겨주는 것이다. 원고지에 이런저런 상념들을 긁적거리다 보면 불꽃이 튈 때가 있기 때문이다. 펜촉이 서걱거리는 촉감도 각별하거니와 글자 한자 한자에 나름의 자세가 있고, 표정이 있다. 육필이어서 그런가. 만년필이 마음을 곧게 세운다는 것을 느낀다. 대형 서점이나 문구점을 가면 만년필코너를 들른다. 그렇다고 만년필을 수집하는 마니아는 아니다. 종류에도 관심이 없다. 만년필이 더 이상 골동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반갑다. 일전에 친구는 자신의 애장품이 가방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내 애장품은 만년필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내 마음을 알고, 체온을 느끼고, 때론 함께 눈물을 적시고, 그런 내 삶의 진솔한 궤적을 함께 했기에 그럴 것이다. 반질반질 손 떼가 묻은 만년필. 일상의 삶이 고단하고 답답할 때 내 애장품 만년필은 글 여행길에 오른다. 펜촉은 마주하는 풍경마다 아름답게 채색해 작품을 탄생시킨다. 파란 하늘 아래 꼬불거리는 길섶은 그림 감상문이 되고, 그 주변에 알록달록 춤추는 봄꽃은 시가 되고, 편지가 된다. 정물화만 있는 게 아니다. 저만치 고즈넉한 시골 고샅길에서 들려오는 연인들의 이야기들은 에세이가 되는 것을.

2017-04-12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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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칭찬의 기적

어쩌다 지하철에 몸을 실으면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있다. 마주하는 군상들의 표정에서 밀도 높은 일상을 담금질해온 삶의 고단한 흔적이 보인다. 더러는 주름진 얼굴에서 굴곡진 한 편의 대하드라마 같은 인생 스토리가 흐른다는 걸 느낀다. 지하철과 사람은 꽤 닮아 있다. 종착역을 향해 내닫는 지하철은 꿈과 희망을 안고 클라이맥스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는 군상의 모습이다. 찌든 삶을, 강퍅한 세파를, 무거운 짐을, 아귀다툼을 연소하는 모습이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엊그제, 지하철 안은 화사했다. 병아리색 원복을 차려 입은 유치원생 열댓 명이 군데군데 샛노란 꽃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사생대회라도 다녀왔는지 서너 명씩 옹기종기 모여 스케치북을 펼쳐들고 그림 품평회가 한창이다. 시끌벅적했지만, 승객들은 모처럼 '병아리 떼 쫑쫑' 재롱에, 향수에 젖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린 여선생님이 이따금씩 집게손가락 하나를 치켜들어 쉬! 입술에 얹힐 때마다 떠들썩은 재잘재잘로 가라앉는다. 그런데 내 옆 한 녀석은 아까부터 어째 조용하다. 어디 아픈가. 힐끔 녀석을 보니 잔뜩 주눅이 든 얼굴이다. 눈꼬리가 축 처진 채다. 손에는 스케치북에서 뜯어낸 그림 한 장이 들려 있다. 꼬깃꼬깃 구겨진 그림. 그건 또 왜 구겨졌을까. 그림에 무슨 사연이 있나 싶어 막 감상할 참이었다. 그 때 건너편 한 녀석이 달려와 그림을 덥석 낚아챈 뒤 아이들에게 들어 보인다.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친다. "선생님, 그림이 이상해요!" 눈 처진 아이는 그림을 되찾으려 달려들었고, 한바탕 소동이 인다. "공공장소에서 떠드는 것 아니랬지!" 선생님의 경고가 아이들을 돌려세운다. 그림은 눈 처진 아이의 손에 다시 꼭 쥐어졌다. 전후사정을 보니 아이들이 그 그림을 놀림감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떤 그림을 그렸기에? 그림을 보니 덩그러니 나무 한 그루다. 소나무를 그린 것 같은데, 문제는 색깔이었다. 엉뚱했다. 잎 색깔이 온통 노란색이다. 초록색이래야 점박이처럼 드문드문이다. 상식의 틀을 깬 색칠. 그게 눈 처진 아이를 놀림감으로, 외톨이로 만든 것이다. 왜 그렇게 그렸을까. 잎마다 봄 햇살이 부서진 황금색을 입히려 했던 걸까. 혹여 사람들은 그 아이의 그런 시선을, 감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뭉개고 있었던 건 아닐까. 녀석은 내 눈치를 살핀다. 눈빛은 애절했다. 방금 내가 생각한 걸 말해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잎이 금가루를 뿌린 듯 햇살 가득 하네", "상상력이 풍부하구나!" 순간 녀석의 뺨에 눈물이 또르르 굴렸다. 칭찬의 힘이란 이런 것인가. 놀려댈 줄 알았던 모양인데 뜻밖의 칭찬에 감동했던 것이다. 저만치 선생님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고, 환한 미소가 번졌다. 좌절과 절망의 늪에 빠진 녀석을 건져냈다는 생각이 문득 스치자 전율이 인다. 칭찬 한 모금에 저토록 목말라했던 걸까. 칭찬의 갈증! 녀석의 눈물은 그걸 말하고 있었다. 세상 물정을 아는 어른들도 칭찬 한 마디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것을. 흰 도화지인 새싹들은 오죽할까. 그 새싹의 뿌리에 따스한 칭찬이 스며들면 자신감이 자라나고,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꽃이 활짝 필 것이다. 칭찬 여부에 따라 인간관계와 인생행로의 열매가 달라지는 것이다. 혹자는 그래서 칭찬은 인생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했더랬다. 미국의 유명 경영 컨설턴트인 켄 블랜차드의 저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가 거저 나온 게 아니다. 가슴에서 우러나는 칭찬 한 마디가 아이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

2017-04-05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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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감동의 순간

수런수런 돋아나는 새싹들이 어느덧 봄을 말하고 있다. 이 골짝 이 골짝 봄노래가 메아리친다. 매화며, 산수유며, 개나리가 꽃망울을 톡톡 터뜨린다. 겨우내 잎들을 털어낸 나무들은 옹기종기 둘러앉아 햇볕을 쬐며 싹을 틔운다. 그 군락의 밑동을 붙들고 있는 흙무더기는 들숨날숨으로 풀풀 거린다. 이제 봄의 문턱인가 싶었는데 숲은 벌써 연두색 물감을 풀어놓았다. 계곡을 타고 달려온 물바람의 설렘은 또 어떤가. 연둣빛 이슬로 꽃망울 주변을 서성거리는 것을. 봄소식은 이렇게 햇빛으로, 바람으로, 흙으로, 색으로 말한다. 이 기막힌 봄 향연에 조화를 부리는 주연은 햇빛이다. 따스한 생명의 입김을 흙무더기에 불어넣고, 싹을 틔우고, 꽃망울을 터뜨리고, 종내 열정을 태워 화사한 꽃으로 산화하는 것이다. 과일을 영글게 하는 것도 햇빛이다. 금빛 가루의 그 거름이 달디 단 맛으로 올라오고, 알록달록 색깔을 입히고, 상큼한 향기를 선사한다. 햇빛이 싹으로, 잎으로, 꽃으로, 과일로, 향기로 변하는 저 경이로운 조화! 햇빛의 조화가 어디 나무들에게만 있겠는가. 무겁고 고단한 우리네 일상에도 조화를 부린다. 우리는 그러나 그걸 잊고 산다. 햇빛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설렘으로 차오르고, 감동이 되고, 감탄사가 된다는 것을. 걱정과 근심의 우울한 그림자를 지우는 활력소가 반짝거린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산다. 느낄 줄도 모르고, 아니 느끼려고도 하지 않는다. 햇빛은 눈으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감동이 불꽃 튀고, 울화를 풀어주고, 닫힌 마음을 열어준다고 했더랬다. 가슴으로 느끼는 햇빛의 맛은 어떨까? 요리를 천천히 음미하듯이. 이 물음을 던지는 순간 세상 햇빛이 새로운 몸짓으로 다가온다. 이른 아침 베란다에 한가득 채워진 햇빛이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마음이 호사스럽다. 발을 간지럽히는 것만으로도 왠지 따스하고 행복하다. 산속을 헤매다 야트막한 언덕 너머로 불쑥 나타나는 한 줄기의 햇살은 반갑고 신비롭다. 울적한 날 때맞춰 쨍하고 해가 뜨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연두색을 물들인 숲 속의 햇빛은 싱그럽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햇빛의 맛을 알았다. 햇볕이 내리쬐는 큰 나무통 앞에서 그와 알렉산더 대왕이 주고받은 대화가 이를 방증한다. 문답이 걸작이다.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해라"는 알렉산더의 물음에 그는 한마디로 일갈한다.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 달라"고. 영혼이 자유로운 그에겐 햇빛은 상념의 날개였으며, 철학을 샘솟게 하는 자양분이었다. 이따금 이 문답을 접할 때마다 놀란다. 어쩌면 그가 '일조권'의 창시자일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서다. 햇볕을 쬘 권리. 그는 그걸 알았다. 어떠한 권력으로도,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햇빛의 절대적 가치를 알아차렸다. 피부로 맛보는 달콤한 행복. 햇빛을 즐기는 그 잣대에 따라 행복감이 천양지차라는 상대적 가치를 그는 간파했다. 그가 왜 '작은 것에 만족하라'고 설파했는지를 되새김하게 한다. 햇빛은 흔하고 거저 얻어지기에, 세속적인 잣대로는 작은 것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미처 몰랐던 감동을 찾을 수만 있다면 행복이 클 것이라는 그 역설을 말이다. 그래서 행복은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온다고 했던가. 감정선이 점점 무뎌가는 세태에 디오게네스가 던지는 메시지는 '느껴라'일 것이다. 무르익어가는 이 봄, 일상 속에 뿌려지는 한 빛 한 빛을 한눈팔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하고 싶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한 조각의 잎사귀까지도 '감동의 순간'으로 기억하련다. 햇빛을 통해 행복이 무엇인지 느끼고 싶은 봄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2017-03-29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