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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미소가 봄을 만나면

시골 친구는 명랑했다. 대학 새내기 시절 '서울의 모든 아가씨들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환상에 푹 빠져 있었다. 지나가는 아가씨에게 길을 물으면 살갑도록 요모조모 안내해준다는 것인데, 하나같이 미소로 추파를 던진다는 거다. 자신에게 무슨 흑심을 품는 것 같다나. 물론 사람 나름이겠지만 그는 그럴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작달막한 키에, 배가 튀어나온 체형부터가 아이돌 스타일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양말 한 켤레를 사나흘 신는 집념을 보이는 괴짜였다. 새싹이 파릇파릇 춘 삼월로 향해 발돋움하던 딱 이 무렵, 그의 자유로운 환상도 봄 햇살을 받고 날개를 한껏 펼치고 있었다. 고교시절 백면서생처럼 공부밖에 몰랐던 그는 서울 땅을 밟은 이후 이성에 반짝 눈을 떴다. 어쩌면 오랜 전부터 갈망했을 풋사랑에 허기를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환상이 날개를 접은 건 생애 첫 미팅을 하고 난 직후였다. 생끗 미소를 짓던 파트너에게 '내가 그렇게 좋냐'며 겁 없이 영웅본색을 들이댔다가 된통 퇴짜를 맞았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던 춘 삼월의 환상은 깨졌고, 상처는 깊었다. 자존심이 유난했던 그는 한동안 소식을 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는 여자에 관한한 숙맥이었다. 그런 그 앞에 청춘을 스케치할 백지의 새 도화지가 툭 던져졌으니 가슴이 뛰었을 것이다. 굳이 민태원의 중수필 '청춘예찬'의 첫 대목을 빌릴 것도 없이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었을 것이다. 뭘 그릴까? 신세계를 만난 그는 색연필을 만지작거리는 어린아이 마냥 달떠 있었다. 환상에 젖을 만도 했다. 돋보기로 전후사정을 들여다보면 그가 착각에 빠질 만도 했다. 파트너의 '상냥한 말씨'는 무뚝뚝하고 투박한 사투리에 농익은 촌놈의 귀에는 '호감의 언어'로 번역돼 입력됐다. 파트너가 띄운 야릇한 미소는 '난 사랑에 빠졌어요'로 해석했다. 청춘 도화지에 이런 오류를 색칠했던 거다. 촌티 나는 패션에 우스꽝스러운 캐릭터의 그를 보면 웃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파트너의 입장에선 코믹한 당신을 보면 '그저 웃지요'에 불과했다. 그 웃음을 내면으로 삭이면 미소가 된다. 한 길 속을 가늠할 수 없는 것이 미소의 속성이랬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미소를 보라. 보는 사람에 따라, 마음에 따라, 시각에 따라, 시대에 따라 해석이 천차만별이지 않은가. 신비스런 미소로 읽는가 하면 더러는 슬픔을 머금은 미소로 본다. 그 미소에 담긴 의미는 510여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미스터리로 풀리지 않고 있다. 친구는 그 날 미팅 파트너의 야릇한 미소가 수수께끼로 느껴졌을 것이다. 보면 볼수록 애매모호하게 다가오는 모나리자의 미소. 그것은 한 점의 미소에는 인간의 복합적인 감정이 함축돼 있다는 방증이다. 미소 한 번 벙긋거리는데 50여개의 얼굴 근육이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니 그럴 것이다. 순백의 미소는 그러나 그 어떤 의미를 담든 거기엔 마음을 흔들어 놓는 감동의 마력이 불꽃 튄다. 호감을 갖게 하고, 가슴을 설레게 하고, 사랑에 젖게 하고, 때로는 세파에 지친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주는 그런 미소의 힘 말이다. 봄의 길목에서 서성거리는 삼월! 너울거리던 미소가 꽃 내음이 짙은 봄을 만나려 한다. 여기저기 돋아나는 새순이며, 살랑대는 봄바람이며, 찬란하게 부서지는 고운 햇살이며, 파란 하늘이며, 거기에 피어난 하얀 뭉게구름이며, 숲에서 지저귀는 산새들이며, 그렇게 약동하는 봄 향연의 도화지에 미소의 꽃을 그려 넣고 화사하게 색칠하고 싶은 계절이다. 순백의 미소가 꽃피는 봄 풍경을 마음의 화폭에 담아보는 건 어떨까.

2017-03-22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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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밥터

그것을 허물었다면 무척 서먹서먹했을 거다. 손바닥만한 밥상 한복판에 걸터앉은 칸막이! 눈높이만큼 끌어올린 그것은 프라이버시를 가려주는 커튼이었다, 숟가락 하나가 뻗칠 수 있는 한계 영역을 규정한 밥터의 담벼락이랄까.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두 방랑 식객은 그 불문율을 알기라도 하는 듯 단단히 빗장을 지른 채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서울 중심가 어느 맛 집의 혼자 먹는 밥, 이른바 '혼밥' 풍경이다. "혼자예요?" 나홀로 식객들의 귀를 쫑긋거리게 하는 질문 공세. 저만치 노른자위 밥터가 유혹하는데 별도리가 있겠나. 핏대를 세워 목청을 뽑는 종업원의 '응답하라 혼밥!'에 득달같이 화답할 수밖에.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이런 급행 서빙은 없었다. "합석해도 될까요?" 양해와 눈치의 갈등 속에 더디게 굼뜨던 완행의 서빙만 찔끔거렸다. 세상 편하게 달라진 혼밥. 혹자는 한마디 거든다. 이 식당이 아니면 누가 이 혼밥의 고민을 알아줄까? 그러나 이 절규를 풀어준 건 뜻밖에도 7080 시절의 밥집 아주머니들이었다. 아주머니들은 알아차렸다. 혼자 밥을 먹고 싶어도 쑥스럽고 어색해 식당가를 배회한다는 것을. 눈총과 홀대를 받지 않는 혼밥 향유권을 꿈꾸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그래서 혼밥의 서러움과 아픔을 힐링해줄 식당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주머니들은 알아차렸다. 모두들 그 실현 가능성에 의문부호를 달았지만 아주머니들은 그걸 해냈다. 엄마표 밥집은 그렇게 눈을 떴다. 식당은 허름했다. 주 고객은 자취생, 고시생, 직장 초년생들이었다. 너도나도 혼자였다. 뭉뚱그려 2030 혼밥족. 다들 혼자라고 해서 개별 밥상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칸막이로 장벽을 친 것도 아니다. 독서실처럼 벽을 마주보고 앉는 혼밥 전용 좌석을 갖춘 것도 아니다. 엄마표 밥집은 묘했다. 종업원이 없었다. 모든 게 셀프였다. 누구든 밥상에 숟가락을 올리면 한 가족이 됐으며, 밥상머리마다 이야기꽃이 피어났다. 한솥밥이 갖는 마력일 것이다. 밥에는 정성이 묻어났다. 늘 뜨끈뜨끈했다. 정(情)이 모락거렸다.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안고 사는 사람들에겐 찬밥은 눈물 젖은 빵에 다름 아니다. 그곳엔 그런 진한 공감대가 흘렀다. 밥집 아주머니는 이따금씩 눈물을 찍어내곤 했다. 밥은 자르르 윤기가 흘렀다. 고봉밥이었다. 밥이 보약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좀 안다는 자취생들은 밥집을 선택할 때 밥의 윤기를 보고 결정한다. 밥심이 오래갈 밥을 찾는 것이다. 엄마표 밥집은 늘 북적거렸다. 밥집 아주머니들이 긴장하는 때가 있었다. 사법고시, 행정고시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이다. 아주머니들에겐 밥심의 결과가 나오는 날이다. 모두가 숨죽여야 했다. 그날 저녁 밥집마다 희비는 엇갈렸다. 합격자 수와 대강의 합격률이 나오는 것이다. 대박, 쪽박이란 말은 이때 써먹는 줄 알았다. 희비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면 어느 밥집이 명당이니 하는 풍수지리설이 설왕설래했다. 당시 전설처럼 내려오는 밥집이 있었다. 심지어 어느 밥상까지. 그 혼밥 풍경은 세월 빠르게 달라졌다. 모처럼 맛소풍을 나왔을 혼밥족. 그들은 그러나 밥터의 향유권은 고사하고 비좁은 공간에서 쫓기듯 허겁지겁 그릇을 비워야 한다. 대화가 없는 침묵의 식사. 달그락거리는 소리로 묻고 화답할 뿐이다. 그렇다면 사색할 시간도 가질 만도 한데 요즘 혼밥 세태는 그러나 7080 엄마표 밥집과 같은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때 그 시절의 정겨운 혼밥 풍경을 반추하게 되는 까닭이다.

2017-03-15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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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봄 이사시즌의 삽화

누군가 기약 없이 떠나는 건 쓸쓸하다. 일전에 댓바람부터 이삿짐 트럭 한 대가 아파트 현관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동틀 무렵 어슬렁거리는 이사는 십중팔구 오는 게 아니라 가는 쪽이다. 여태 통성명조차 나눈 적이 없는 이웃과의 이별. 그래도 한 지붕 아래 살았기에 이웃의 얼굴이 낯익다. 행여 추억의 한 단편이라도 있을까 싶어 톺아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갈피가 없다. 그냥 타인일 뿐이다. 그런데 왜 가슴 한 켠에 우수(憂愁) 같은 것이 스치는 걸까. 그럴 것이다. 현관 앞에서, 주차장에서, 장터가 열리는 앞마당에서 마주치고 엘리베이터를, 때론 계단을 오르내리며 시나브로 고였을 이웃 간의 정(情)이 일렁거려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 물기 마른 정을 뒤척거리며 잘 가시라 환송하자니 생뚱맞고 겸연쩍다. 유행가 가사를 들출 것도 없이 '떠날 때는 말없이'다. 꾸역꾸역 쟁여지는 짐 꾸러미에 찬바람이 스몄고, 짐을 꾸리던 노인의 주름진 얼굴에 아파트 삶의 태생적 그늘이 드리워져 있음을 보고야 말았다. 진작에 통성명을 건네 것을, 몇 마디 말이라도 섞어볼 것을. 그래서 어느 날 문득 식사에 초대해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울 것을. 이런 식으로 랑데부됐더라면 석별의 정을 나누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을 거다. 후회한 게 어디 한두 번이겠느냐마는 우리네 아파트 삶은 이런 열린 마음의 여백을 준비조차 못한다. 가만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수직 공간! 위아래 층이 막힌 '성냥갑'식 수직 프레임은 이웃을 단절시켰다. 소통할 평면 공간이 없는 까닭이다. 얼굴을 맞댈 공간이래야 엘리베이터 박스 안. 엘리베이터는 그러나 틈만 보이면 비약하고 생략하는 심보를 드러낸다. 성급한 스피드에 오염된 여닫이 버튼은 이웃을 층층이 갈라놓기에 바쁘다. 말 섞기가 무섭게 이웃의 등을 떼밀고 냉정하게 문을 닫는다. 어쩌다 낯선 사람이 끼어들면 맨송맨송한 표정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다. 시선은 층수를 알려주는 디지털 숫자판에 일제히 꽂힌다. 눈 둘 바를 모르는 것이다. 왜 이래야만 하는 걸까. 아파트 품앗이라도 있었더라면 사정은 달라졌을 거다. 우리네 수직 아파트 일상은 그러나 각자도생의 세태로 너무 달려가 있다. 정이 넘쳐나도 쉬 파편화 된다. 그 단절된 정을 새삼 더듬게 되는 봄 이사시즌엔 추억의 인기 드라마 '전원일기'의 마을을 떠올리곤 한다. 진한 향수와 감동이 꽃피고, 사람 냄새가 물씬거렸다. 그 마을이 그리운 건 내 마음속에 여전히 그런 마을을 가꾸고 있음일 것이다. 자취를 하던 학창시절이었다. 집주인 할아버지는 작별이 못내 아쉬워 대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신작로를 내다보고 있었다. 이사 가는 날 친구와 함께 짐을 꾸린 리어카를 이끌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던 길이었다. 새 자취방은 골목골목을 파고들어 처마 끝을 서로 맞댄 집들 틈에 끼어 있었다. 문간방이었다. 한 지붕 여섯 가구. 방방마다 사람들이 몰려나와 짐을 날라 주었다. 내 기억의 창고에 보물처럼 보관하고 있는 봄철 이사의 색 바랜 삽화다. 그 자취 시절 이웃 간의 정이 무엇인지 겨우 눈을 떴다. 한 지붕 여섯 가구의 집에는 정을 담을 그릇이 컸다. 마음을 더하고 뺄 공간이 넓고 아늑했다. 눈물의 짐은 서로 나누어 덜어냈고, 웃음의 짐은 보태고 또 보태 꽃동산을 만들었다. 그런 정이 홀연히 떠난 빈자리가 커 보인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봄 이사시즌이 찾아오면 그때 그 시절의 갈피 속에 꿈틀거리는 정을 일깨워 새삼 가꾸어본다.

2017-03-08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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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원시의 봄

봄비는 기어이 일을 저질렀다. 계절을 알아차리고 슬그머니 찾아와 땅부터 적셔 놓았다. 새침데기다. 조용히 흩뿌리고선, 은근히 그러나 오달지게 적시는 봄비! 화들짝 놀란 땅은 꼭 무슨 일을 벌일 것만 같다. 연방 새싹들을 밀어 올릴 기세다. 꼬장꼬장 메마른 나무들도 생기가 돌았다. 뭉게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고개를 내미는 햇살이 따스하다. 수런대던 새들은 우르르 몰려나와 살랑대는 바람을 타고 동네 산허리를 가로지르며 한 폭의 수채화를 완성한다. 우수(雨水)를 흘러 보낸 요 며칠사이 비는 그렇게 우리 모두를 적시고 있었던 거다. 사실 봄 낌새는 몸이 먼저 알아차린다. 마음부터 설렌다. 그런데 봄은 참 묘하다. 그 심쿵거리는 마음 밑바닥에 허허로움이 겹치니 말이다. 어릴 적부터 무한대로 느꼈을, 그러나 종잡을 수 없는 신기루랄까. 그 까닭모를 감성의 맥박을 진작에 더듬고 있었다면 이토록 공허하진 않았을 것이다. 몸앓이에 가슴앓이까지, 혹자는 그런 걸 두고 봄앓이라고 했더랬다. 봄비 적신 동네 공원을 걷는 날 왜 뜬금없이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누렇게 바랜 잔디밭에서 묻어나는 흙냄새 때문이었을 게다. 한 줄기의 추억이 빗소리에 실려 온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마로니에 공원이 온통 흙바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빗줄기가 후드득 꽂힐 때 풀풀거리던 흙냄새가 좋았다. 아는 연극배우와 자주 만나던 곳이다. 무대가 끝나는 날 흙바닥에 퍼질러 앉아 비 적시며 소주잔을 기울이곤 했다. 퍽 낭만적이었다. 나는 마로니에 흙길을 거닐면서 비의 정서를 배웠다. 비 오는 날 흙바닥에 떨어진 꽃잎이 보석처럼 빛난다는 걸 알았으며, 비 젖은 텅 빈 벤치에는 기다림의 미학이 있다는 것도 배웠다. 울적한 마음을 씻어내는 것도 비다. 지금도 비를 온전히 맞는 걸 좋아한다. 어쩌다 호젓한 흙길을 만나면 반갑다. 낙엽이 흙이 된 오솔길이면 더 좋다. 그곳에서 예기치 않은 단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코를 킁킁거리며 흙냄새를 맡곤 한다. 마로니에 공원이 기억 저편에서 아른거리게 된 건 그 누런 흙바닥이 아스팔트로, 콘크리트로 코팅됐기 때문일 것이다. 원시의 흙냄새! 그 추억의 흙을 만나려 요즘 동네 산에 자주 오른다. 나뭇가지들은 앙상하지만 산은 왠지 포근하다. 흙이 산을 감싸고 있음이다. 산그늘이 앉으면 아늑하다. 비와 어울리는 산이다. 비가 추적거리면 헤아릴 수도 없는 다양한 빛깔의 흙냄새가 풋과일처럼 물씬거린다. 빗소리도 다양한 빛깔의 건반을 탄다. 동네 산 아래 공원은 왁자지껄하다. 뛰노는 아이들이 정겹다. 아이들의 질주 본능이 나온다. 그러나 바닥은 아스팔트다. 저러다 넘어지면 어쩌나. 아니나 다를까 아이의 이름 부르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뛰면 다친다는 경고의 메시지다. '하지 마라'는 소리에 유난히 길들여진 아이들은 이내 뛰는 걸 멈춘다. 아이들은 날개를 한껏 펼쳐 달리고, 뛰고, 뒹굴고 싶었을 것이다. 흙은 푹신한 솜이불 같은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도심의 아이들은 흙을 모른다. 그 웅숭깊은 포근함을, 촉감을, 숨결을, 내음을 모른다. 흙이 '흙수저'로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세월 빠르게 달라지는 세태를 어찌 탓할 수 있으랴마는 흙은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희망의 씨를 싹 틔우고, 까닭모를 허허로움을 위로해줄 마음의 쉼터가 바로 흙이라고. 단비가 풋풋한 흙냄새를 퍼올리며 봄을 재촉하고 있다.

2017-02-22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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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첫인상

첫인상은 뜻밖에도 이국적이었다. 르네상스 양식에 비잔틴 풍의 돔! 물 건너온 그런 서양 건축 양식을 차려입은 게 서울역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시골 촌놈은 서울역 광장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내 중학교 수학여행 기념사진에 박힌 한 장면이다. 시끌벅적했다. 팔도 사투리가 뒤엉켰고, 사람들은 더 엉켰다. 귀는 먹먹했고, 현란한 불빛에 눈은 휘둥그레졌다. 그 첫인상을 바꾸는데 무려 29년이나 걸렸다. 2003년 12월 지금의 현대식 고속철 역사가 준공되기까지 말이다. 저 유난했던 옛 서울역은 '문화역서울 284'로 문패를 바꿔단 채 기억 저편의 역사가 됐고, 그 바통을 이어받은 고속철 역사는 지금 재기발랄하다. 널찍해서 산뜻하고 밝다. 쇼핑 장터가 섰고. 볼거리를 제공할 무대도 설치됐으며, 먹거리 천지다. 객들은 시계바늘처럼 째깍거리지만 질서 있고 차분하다. 내 첫인상의 서울역은 이렇게 새 단장했다. 첫인상이 결판나는 건 단 3초! 사람의 경우 표정이나 동작까지 통째 그 째깍 몇 번에 결정된다니 취업 면접관의 예리한 속성 파노라마는 오죽할까.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솔로몬 아쉬의 입을 빌리면 취업 준비생들의 눈이 번쩍 뜨일 거다. 한번 박힌 첫인상은 나중에 들어오는 그 사람의 후속 스토리에 대해 좀체 귀 기울이지 않는 고집불통의 잣대가 된다는 거다. 금세 굳는 콘크리트 같은 묘한 집착. 이게 바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초두효과'라는 것이다. 일전에 고장 난 스마트폰을 수리하려 시내 서비스센터를 찾아간 적이 있다. 건물 안을 두리번거리는데 무섭게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사설 경비원에게 가로막혔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는 다짜고짜 어디 가느냐고 묻는데 고압적이었다. 문간을 지키는 경비원이 저 정도면 이 건물의 주인은? 경비원이 눈을 희번덕거리는 사이 물음표를 단 상상은 증폭됐다. 다행히 건물 안은 친절했기에 망정이지, 내 스마트폰 회사 로고의 이미지는 하마터면 구겨질 뻔했다. 취준생과 기업과의 첫 맞선! 인상 깊고, 여운도 길다. 취업시즌을 맞아 면접 체험기가 가슴 아리게 들려온다. 최악의 취업 한파 와중에 면접 갑질이 고개를 드는 모양이다. 질문 속에 학연, 지연에 대한 편견이 녹아 있는가하면 성차별, 외모 비하, 연애담에, 말 자르기까지. 디지털 시대에 입사 면접은 여전히 아날로그에 멎어 있다. 냉수 한 잔 제공은커녕 슬리퍼를 신고 나오는 면접관의 개념 없는 자세에서 그 회사의 얼굴을, 아니 미래를 본다. 취준생 면접은 기업에 대한 또 다른 면접이라는 역설을 왜 모르는 걸까. 며칠 밤을 뒤척이며 퀭한 눈으로 면접장 문을 두드렸을 청춘들! 내일은 또다시 내일의 태양이 뜬다지만 숱하게 쓴 맛을 본 좌절의 그늘은 너무 짙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 그늘을 지우려 얼마나 애썼을까. 혹여 이번에도 들러리용으로 세운 건 아닐까, 겨우겨우 면접까지 올라와 지푸라기라도 건지려는 그들은 그러나 무성의하고 생뚱맞은 질문에도 아연한 기색조차 숨죽여야 했을 것이다. 그런 청춘들의 마음 밑바닥에는 과연 어떤 생각들이 고였을까. 첫인상의 경제학적 역학이 여기에 숨어 있다. 사람 귀한 줄을 모르는 기업에 인재가 모일 리가 만무하다. 고용하는 입장에서 보면 자식, 동생, 조카 뻘 되는 청춘들이다. 요즈음 취업 한파에 밤마다 울음을 삼키는 취준생들이 부지기수다. 그 청춘의 정신적 허기를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면접은 정중하고 인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2017-02-15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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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2월의 전설

2월의 대학 교정은 쓸쓸했다. 교정은 내 젊은 날의 추억이 살아 숨 쉬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지난 주말 나는 그 흔적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크고 작은 뜰엔 잔설이 희끗거렸고, 시선은 낯익은 소나무 숲에 오래 머물렀다. 졸업사진의 풍경으로 수놓았던 소나무 숲! 아련함이 가슴을 차고 올라왔다. 눈은 시렸다. 입춘을 알아차린 소나무 숲은 초록빛을 따스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대학 졸업식 즈음이면 더욱 짙은 물감을 풀 것이다. 2월이 오면, 아니 졸업의 계절이 오면 내 기억의 창고엔 허허로움이 스친다. 졸업하던 그날의 추억이 거센 숨결로 밀려왔다. 졸업식 날 취업한 과동기들이 눌러쓴 사각모는 눈부시도록 빛났으며, 그 가족들 주변엔 따스하고 향기로운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걸 봤다. 대학원 진학을 빼고 취업 못한 동기는 손꼽을 정도였다. 개중 한 사람이었던 나는 사각모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시골서 올라온 가족들은 그 엇갈린 표정을 읽고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까. 2월은 냉혹했다. 나는 교문을 나서면서 '자취방 학생'에서 '실업자 김 씨'로 바뀌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취직한 친구들에겐 교문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개선문이었지만, 나에겐 무너진 상아탑이었다. 그땐 그렇게 보였다. 2월의 밤은 처연했다. 그날 밤 자취방을 나와 흰 눈을 펑펑 맞으며 소나무 숲 부근 교정을 배회했다. 살을 에는 눈바람. 소나무 숲은 침묵했고, 나는 그 아래 웅크린 채 울먹거렸다. 눈바람은 뜨겁게 젖은 얼굴을 죽비처럼 마구 때렸다. 불현 듯 교문을 나서는 학생들의 긴 그림자에서 내 2월의 아픈 뒤안길을 본다. 졸업철이다. 60대 이상의 실버 취업자 수가 20대 청년을 앞지른 취업구조. 설렘과 기대 속에 교문을 나서는 졸업생들도 있겠지만 내 아픈 2월을 답습할 졸업생은 또 얼마나 많을까. 혹자는 '마무리와 시작이 공존하는 2월'이라고 하지만 미취업생들에겐 '마무리와 시작이 충돌하는 2월'이다. 그 충돌의 스파크 속에 그들의 가슴은 타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 말자. 졸업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 윈스턴 처칠은 영국 옥스퍼드대 졸업식에서 이런 축사를 했더랬다. '포기하지 말라.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는 얘기일 것이다. 성공은 꿈꾸는 자에게 있고, 그 꿈의 뿌리는 희망이다. 희망이 흔들리면 꿈이 흔들린다. 그래서 혹자는 '실업보다 더 무서운 게 꿈과 희망을 잃는 것'이라고 했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절망하지 않아야 하는 까닭이다. 마음이 추울수록 따스한 봄을 기다리는 꿈은 더욱 간절해지고, 단단해지는 법이다. 나무줄기에 매달려 저 꿈틀대는 고치를 보라. 그 무엇이 고치껍데기 밖 세상에 나오려 발버둥치는 광경을 말이다. 그건 취업을 갈망하는 졸업생들의 몸부림이자 절규에 다름 아니다. 안쓰럽다고 해서, 고치껍데기를 섣불리 벗겨주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거기에서 나비는 온전할까. 과연 날개를 펴고 제대로 날 수 있을까. 아니다. 날개의 힘! 그것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고치를 수없이 떼밀어냈을, 그 고통을 감내해야 비로소 훨훨 나는 나비가 되는 것이다. 병아리가 달걀의 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이치와 같다. 인고의 세월을 건너뛰어서는 비상할 힘, 세상 급류를 헤쳐 나갈 생존본능이 생기지 않는다. 그 고통의 허물을 벗고 사회의 첫 발을 힘차게 내딛는 건 온전히 자기 몫이다. 내 2월의 전설이 가르쳐준 체감 교훈이다.

2017-02-08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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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완행열차의 3분

어쩌다 덜커덩거리며 완행하는 기차를 보면 만남과 이별이 교차한다. 그리운 임 만나려 버선발로 달려가는 기차는 출발부터 설레지만, 변심한 임을 실은 기차는 붙잡아도 뿌리치며 냉정하게 발차한다. 행선지는 같아도 사연에 따라 기차는 색감 다르게 사무치는 것이다. 오랜 세월을 달려온 기차의 녹슨 창틀의 모습엔 그런 애환이 비친다. 명절날의 기차 이미지는 만남과 설렘. 매서운 추위가 종종걸음을 재촉하던 이번 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른 아침 서울역 플랫폼 앞에 들어선 KTX 고속 열차는 허연 입김을 푹푹 뿜어내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몸을 싣자 KTX는 미끄러지듯 역을 빠져나가더니 금세 속도에 탄력이 붙였다. 시속 300㎞의 속력! KTX가 그 질주본능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전날부터 한껏 부풀었던 설렘이 무뎌지지 않았을 거다. 번득이는 스피드는 시간과 공간만 좁힌 게 아니었다. 강퍅한 세파를 누그러뜨리며 어렵사리 싹 틔우는 감성의 여유조차 좁혔다. 아련하게 스케치하던 향수의 낱장들을 동심의 물감으로 채 물들이기도 전에 어서 내려라 한다. 플랫폼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눈 깜짝할 새 증발하는 기차를 바라보는 연인의 심경은 또 어떨까. 맨바닥에 퍼질러 앉아 목 놓아 울기엔 기차는 너무 쏜살같다. 찔끔 눈물 한 방울도 허용하지 않는 냉정한 속도다. 헉! 이 짧은 외마디의 카타르시스로 이별 정거장이 종영되는 이런 어색함도 없다. 스피드의 속성은 야멸차다. 뿌리치는 기차를 원망할, 감정을 추스를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세상은 그러나 빠르고 편리하게 진화하는 것이기에 스피드를 탓할 순 없다. 빠른 속도에 매료돼 우리네 심장박동은 뛰었고, 그렇게 불붙은 속도 경쟁은 정보 통신(IT) 강국으로 일궈냈기에 그렇다. 스피드는 부와 성공을 안겨주었고, 그 두 단어의 대명사가 됐다. 사람들은 성공했을 때 '앞만 보고 달렸다'는 표현을 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가히 스피드가 미덕인 세상이다. 객차 창밖 시골 풍경의 필름은 달리는 속도에 압도돼 숨 가쁘게 돌아갔다. 컷마다 스토리를 담아낼 완행 정물화는 실종됐다. 사람들이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커튼을 치고 잠을 청하는 까닭이다. 더러는 무슨 영문인지 스마트폰과 열심히 싸운다. 널따란 창에서 손바닥 크기의 IT 화면으로 대체된 생각의 공간. 옆 사람과 말을 나눌 여유는커녕 눈길조차 던지지 않는 시대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수런수런 이야기꽃이 피어나던 저 완행의 추억이 그래서 그립다. KTX가 경부선의 중간 역인 대전역에 정차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그 기회가 찾아왔다. 객실 창 너머의 무궁화호 열차! 그 무궁화호가 시곗바늘을 30년 전으로 되돌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완행열차 통일호를 마주하게 해준 것이다. '쉬어간들 어떠리'라고 벽계수의 말고삐를 잡는 황진이 같았던 통일호는 속도에 갇혀 지워진 낭만을 떠올려주었다. 객차의 덜컹거림이며, 군침 돌게 하던 삶은 계란이며, 왁자지껄 밤새 이야기꽃을 피우던 모습을…. 대전역엔 잊을 수 없는 추억 한 장이 담겨 있다. 1980년대 당시 플랫폼 부근에 간이 우동집이 있었다. 우동 먹는 재미가 여간 아니었다. 정차시간은 3분. 내리고 타고, 우동값 계산하고, 기다리는 시간을 빼면 채 2분도 안될 거다. 주문은 쇄도했고, 초를 다투며 몇 가닥을 입속에 넣으려다 기차를 놓칠 뻔했다. 기차는 움직였고, 스톱! 외치고 또 외쳤다. 기차는 멈춰 서줬다. 그 인정 넘치던 낭만 완행열차가 그립다.

2017-02-01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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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눈물 젖은 자장면

한 폭의 삽화가 추억의 날개를 펼치려하는 걸 보니 설날이 다가왔나 보다. 어떤 그리움이 성큼 달려와 노크하는 육감이랄까. 설맞이 할 즈음이면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세월은 흘려갔어도 여전히 가슴에 남아 심쿵거리는 게 있다. 복조리 아르바이트! 복조리는 1980년대 초 대학생 아르바이트 히트 상품이었다. 디지털시대에 이 색 바랜 추억이 외려 곧추 세워지는 건 동네방네 메아리치던 복조리 장수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아쉬움 때문일 게다. 요즘처럼 시급 아르바이트를 한 건 아니었다. 짚으로 엮은 그 까칠한 조리를 도매상에서 직접 떼와 구색 갖춘 완제품으로 만들어 거리에 나선 아르바이트. 떼 온 조리 물량은 자그마치 2000여개. 언덕 같은 수량이었다. 우리는 동네 가게에서 빌린 손수레가 비척거릴 정도로 실어 날라야 했다. 누가 보면 무슨 큰 사업하느냐고 했을 거다. 무슨 돈으로 그 많은 조리를? 우린 땡전 한 푼 없었다. 그렇다고 부모가 한 밑천 대준 것도 아니었다. 그 많은 조리가 손수레에 실리기까지 곡절은 기막히다. 무일푼 선물거래! 이 제안에 도매상 주인아저씨는 아서라 손사래를 쳤다. 급기야 아저씨는 팔짱을 꼈고, 말똥거리는 학생들의 눈을 한참이나 바라봐야 했다. 이 당돌한 계약이 성사됐을 땐 물건 값을 꼭 갚겠다는 우리의 간곡하고도 애절한 모습이 이슬 맺힌 주인의 동공에 맺혀 있었다. 학생증이 유일한 보증서였고, 저당권이었다. 세상물정 모르던 대학생 셋이 벌인 설날 이벤트는 그렇게 이뤄졌다. 복조리는 낱개의 조리를 한 쌍으로 묶어야 완제품. 섣달 그믐날 한 명은 조리 두 개를 철사로 묶었고, 또 한 명은 붓 펜으로 복(福)자를 써넣은 노란 리본을 달았다. 나머지 한 명은 상품에 하자가 있는지 검품을 했다. 그렇게 만든 복조리가 1000여쌍. 세 대의 손수레는 얼음바람을 씽씽 가르며 동네를 누볐다. 손수레가 바닥을 드러내기까지 꼬박 이틀 걸렸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걸 어떻게 다 팔았을까 싶다. 남은 복조리는 허름한 집에 무료로 넣었다. 설날 복조리 아르바이트는 '친구 구하기' 이벤트였다. 급작스럽게 형편이 어려워진 친구의 학비 조달을 위해서였다. 아르바이트를 결산하던 날 자장면을 먹으면서 눈물을 훔치던 그 친구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모두가 손발은 얼어붙어 있었고, 눈물은 눈물을 낳았다. 혹여 친구가 눈치 챌세라 밑으로 억눌렸던 눈물은 가슴을 적시더니 끝내 눈가로 밀려왔다. 너도나도 울었다. 눈물 젖은 자장면을 먹으면서. 요즘 자장면을 먹다가도 그 친구 비슷한 사람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왜 하필이면 맛나는 자장면이냐 말이다. 그 친구는 지금 정형의과 의사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그다. 습관처럼 됐다. 지금도 셋 친구가 모이면 추억의 복조리만으로도 이야기꽃이 한껏 만발한다. 1000여 집 가까이 돌았으니 1000여 송이의 꽃이 핀다. 그 집집마다 각각의 표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 허물어져가는 집에도 행복하게 미소 짓는 걸 봤다. 복조리 아르바이트가 소중한 교훈을 가르쳐줬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어른이 된 후였다. 내 마음 속에 걸어둘 복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행복은 그 복조리에 무엇을 담느냐에 달렸다는 것을 일깨워줬다. 일찍이 옛 선인들은 복이란 선한 일을 했을 때 찾아오는 경사라고도 했다. 복조리를 벽에 건다고 해서 복이 오는 건 아니다. 이 겨울 마음의 대문에 '희망'을 담은 복조리를 걸어보자.

2017-01-25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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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헌책방의 겨울이야기

옷깃을 세우는 겨울날 헌책방을 만나게 되면 까닭모를 허허로움이 사무친다. 낱장마다 누렇게 바랜 헌책들을 보라. 층층이 부둥켜 움켜잡고 나달나달 떨고 있는 자태가 처연하다. 그 자태에서 아픈 세월을 본다. 무서운 속도로 엄습해오는 첨단 디지털의 와류에 부대끼고, 또 싸워온 흔적이다. 쇠락하는 시간의 공간과 기억의 창고를 사수하려니 그랬을 것이다. 촌각을 다투며 얄팍한 지식만 사냥하는 변덕스런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도 짙게 배어 있다. 동네 헌책방은 좁다란 골목길 안 으슥한 곳에 들어앉아 있다. 초대형 서점과 초스피드 인터넷 책방에 주눅 들어서일까. 쭈뼛거린다. 남세스러웠는지 간판조차 없다. 간판이랬자 골목 밖까지 등 떼밀려나와 켜켜이 키를 세운 덩치 큰 대백과사전이 대신하고 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서성거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호객꾼이다. 추억의 헌책방이 겨우 숨 붙이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손짓한다.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골목 안쪽을 기웃거리게 된다. 누구든 헌책방 책시렁 앞에 서면 그 재촉하던 걸음이 이상하리만치 느림보가 된다. 보물찾기라도 하듯 설렘도 생긴다. 헌책방의 묘한 마력이다. 숨결을 느끼려 더듬거려본다. 겨울날의 책들은 그러나 잔뜩 굳어 있다. 풀풀거리던 해묵은 먼지도 얼어붙었다. 그 꽁꽁 얼어붙은 책갈피에서 절규를 듣는다. 제발 구시대의 고물로 평가하지 말라! 아우성친다. 시대가 첨단화될수록 유물에 내제된 고부가가치의 지혜가 언젠가 빛을 발할 거라면서. 헌책방엔 없는 책이 없다. 참고서며, 교양도서며, 전집류며 눈 밝은 사람들은 반짝거리는 보물을 캔다. 줄을 서서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풍경은 사라졌어도 수많은 활자들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살가운 체온도 느껴진다. 다들 베스트셀러를 꿈꿨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구절구절 그 고통의 흔적이 읽힌다. 저마다 사연이 있고, 모진 삶이 묻어난다. 혹자는 왜 헌책방에 들려면 인간적이 된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헌책방이라 해서 과거만 있는 게 아니다. 현재, 미래가 호흡한다. 그 격변의 세월과 공존하고, 공명하는 것이다. 때론 성찰의 시간을 갖게도 한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을 붙드는 헌책방의 끈질긴 생명력이다. 책방 주인아저씨는 우리 동네 도서관 관장이다. 널브러진 헌책 더미 속에 어떤 보물이 꼭꼭 숨어 있는지 꿰차고 있어서다. 손님들이 찾는 책을 귀신같이 단방에 뽑아내 먼지를 툴툴 털어낸다. 손때 묻은 책은 늘 체온이 느껴진다. 그 누군가의 체온이다. 책을 읽다 밑줄을 그은 대목에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와 나의 삶이 겹쳐지는 것이다. 이심전심이랄까. 책에는 마음이 담겨 있다. 연인들은 그런 마음을 전하려 책을 선물하는 것이다. 응축된 시집이 연인 선물 1호가 된 까닭이다. 시구절을 통해 사무치는 사랑을 투영하고, 그 간절한 사연을 연인과 어깨를 맞대고 울음을 삼키고 싶은 것이다. 책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끈이다. 그런 책을 쌓아둔 책방은 그래서 만남의 명소가 됐다. 교보서적이 그 명소이고, 한 때 종로서적이 그랬다. 그 종로서적이 종로타워에서 부활했다니 감회가 새롭다. 동네 헌책방에도 만남은 있다. 동서고금 많은 사람들을 불러낼 수 있다. 몸을 움츠리게 하는 이 겨울 헌책방에 들려 책시렁에 잠자고 있는 위인들을 깨워 겨울이야기를 나눠보는 건 어떨까.

2017-01-18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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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달걀뎐

그의 이름은 세 번씩이나 바뀌었다. 처음에 '닭의 알'로 불리다가 인간의 세 치 혀에 익숙해지도록 까다로운 문법 절차를 밟아야 했다. 소유격 조사의 '의'가 단모음화로 '이'가 되면서 '닭이알'이 됐고, 이것이 오늘날의 '달걀'로 압축 진화됐다. 낱소리마다 톡톡 튄다. 보름달처럼 달뜨게 하는 '달'은 탱글탱글한 샛노란 노른자위를 연상케 하고, '걀'은 굴러다니는 음색이 샹송풍의 뉘앙스를 풍긴다. 그는 인간들이 주로 불러주는 계란(鷄卵)이란 호도 갖고 있다. 호든 이름이든 알집을 풀면 그냥 '닭이 낳은 알'에 불과하다. 그로서는 '알' 딱지를 떼어준 것만으로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다른 가금류 알들의 호칭을 보라. 칠면조알, 메추리알, 오리알 … . 떡하니 '알'만 곁다리로 갖다 붙인 꼴이다. 그들이 이런 개념 없는 홀대를 진작에 눈치챘더라면 침을 튀기며 이빨을 드러낼 일이다. "왜 우리는 '칠면쟐', '메추랼', '오랼'이라고 품격 있게 불러주지 않느냐"면서. 달걀은 호칭에서부터 여느 알과는 격이 다른 것이다. 그는 '알'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생명을 낳는다'는 신비의 상징이었고, 부활의 주력을 지닌 신성물이었다. 말하자면 영혼의 용기(容器)로 대접받았다. 부활절과 풍년제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까닭이다. 우리네 명절 차례상에 올라오는 필수 품목이다. 그의 조상묘도 있다. 경주시 황남동 155호 고분. 고대 신라시대의 흔적이 담긴 그곳 유물함 토기에서 그들 조상이 발굴돼서다. 스무여 알의 껍데기. 전혀 부패되지 않았으니 인간들은 그 신묘함에 감탄사를 발했다. 그런 그의 화려한 운명을 기구하게 만든 건 인공부화! 1840년대 중국과 이집트에서 발원된 부화술은 세계 축산 농가들을 덮쳤다. 국내에도 상륙해 노크했지만 처음엔 시큰둥했다. 부화술은 그 신통력을 부리지 못한 채 닭장 뒷간에서 한 세기 넘게 숨 고르기만 했다. 그러다 압축 성장으로 헐떡거리던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양계산업도 숨 가쁘게 돌아갔다. 그는 알까기에 매진했고, 씨암탉은 그 수량과 스피드에 놀란 듯 눈을 깜박이며 '판박이 알'을 마구 찍어냈다. 대량 산란의 산실이 된 닭장. 당시 도심의 나이트클럽이 닭장으로 불린 건 우연이 아니다. 닭장도 북적거렸고, 클럽도 북적댔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인간과의 함수에 도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과유불급! 닭장 알받이에 그들이 차고 넘치면 계란판 신세가 된다는 것을. 요즘 그 차고 넘치던 달걀이 품귀다. 조류인플루엔자(AI)가 닭장을 초토화해서다. 살처분된 가금류만도 3000만 마리. 이 가운데 알받이 산란계 2300만 마리가 영문도 모른 채 죽어 나갔다. 그의 종족은 가파르게 급감했다. 인간들은 '달걀 절벽'이라 불렀다. 속수무책인 그들은 탄식한다. 전남 해남에서 처음 AI가 발원됐을 때 촘촘한 방역망을 쳤더라면 이토록 씨가 마르진 않았을 거라고. 현실은 참담했지만 그의 몸값은 갑절 이상 뜀박질했다. 식당가와 반찬가게에는 달걀 반찬이 사라졌고, 제과업계는 일부 품목을 중단했다. 그것은 그동안 싼값에 날로 먹은 인간들의 탐식에 대한 경고였고, 만만한 게 달걀이 아니라는 아우성이었다. 인간들의 장바구니 물가가 들썩거린다. 갑자기 올랐으니 그 체감도 클 것이다. 급기야 미국에서 164만 개의 달걀을 공수해와 투하하기로 했다. 국내 달걀사에 용병달걀이 등장한 거다. 할당관세를 없앴다지만 국내산 값과 엇비슷하다. 엄마 품에 한 번도 안기지 못하고 인간에게 강제로 헌납했던 그들은 말한다. 부화술이 아니라, AI를 막아낼 중장기적인 방비술을 빨리 개발해달라고.

2017-01-11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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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때문에' VS '덕분에'

새해가 밝았다. 마중 나갈 겨를도 없이 '대한민국 2017' 개봉작은 커튼부터 올렸다. 총 365부작의 대하드라마! 어쩌면 점입가경으로 전개될지도 모를 그 실화 장면을 미리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신의 영역이거니와 그나마 대강의 시놉시스가 가물거리는 건 이월된 전년도의 극적인 소재가 지천에 널려서일 것이다. 하루하루가 행복한 삶이 되게 해달라고 축원할 뿐, 오천만 국민 관람객은 새해벽두부터 그 예측불허의 각본 없는 스릴러에 한껏 노출됐다. 그랬다. 히트를 예감한 정객들은 흥행에 불을 댕겼고, 개봉작은 초장부터 클라이맥스를 향한 질주 본능을 드러냈다. 새해는 그렇게 불쑥 찾아왔다. 재깍거리며 달려오는 새해 개벽의 시간은 설렘과 낯설음이 교차하기에 얼떨떨하다. '대한민국 2017' 개봉작의 전반부 장면은? 정국 혼란과 경제침체 속에 헐떡거리는 모습이 아른거린다. 다들 꿈을 찾아 행장을 꾸려 길을 나섰지만, 갈 길이 먼 노정이다. 새해 첫 날 새벽녘. 동네 산에 오르는 길은 구불구불 굽이친다. 하지만 어느 길을 택하든 큰 길로 이어져 늘 반갑다.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호젓한 오솔길을 걸으면 상상 한 점이 날개를 펼친다. 저 아득한 옛날 사람들은 이 길을 통해 길벗이 되고, 산 너머 마을 소식도 이 길을 타고 전해졌을 거라는 상상. 왜 이런 풍경이 불현듯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첩첩산중에서의 길이 행여 다툼과 증오와 마주하는 길이 될까 노파심이 일어 그랬을 것이다. 산 정상에 부서진 첫 햇빛은 찬란했다. 불그스레한 앳된 얼굴의 해는 산 아래 빌딩숲 사이로 비쳐들며 잠을 깨운다. 밤새 뒤척였는지 빌딩숲은 칙칙한 표정으로 거리거리에 누워 있다. 새해는 그러나 그 뒤척이는 시간과 관계없이 찾아왔다. 있는 힘을 다해 올라오는 해를 바라본다. 새해 첫 해를 보고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되는 건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찾고자 함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막연히 산을 오르는지도 모르겠다. 공기를 한껏 들이켜 본다. 새해 첫 날 막 나온 것이기에 산뜻하다. 산소 알갱이마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첫 해를 바라보며 희망을 노래했으니 산 밑으로 내려가는 해맞이 길손들의 걸음걸음이가 한결 가볍다. 그런데 해묵은 넋두리가 메아리친다. 살기가 팍팍하다, 사업하기가 힘들다, 집값이 너무 올랐다, 물가는 더 올랐다는 볼멘소리가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그 종착역은 늘 '~ 때문에'라는 남 탓으로 귀결되는 게 문제다. 지청구를 쏟아낸다. 새해벽두부터. '때문에'의 속성은 마이너스적이다. 그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돌려세울 수는 없을까? 호주 멜버른의 한 샌드위치 가게가 그 일을 해냈다. 가게는 7층. 테이크아웃치곤 높다. 목돈이 없어 임대료가 값싼 곳을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됐다. 사람들은 곧 폐점할 거라고 했다. "그래도 가게는 구했잖아" 가게 주인은 감사해 하며 마이너스 요소를 플러스로 생각을 바꾸었다. 샌드위치를 낙하산에 매달아 고객에게 공수하는 반전을 꾀했다. 공전의 빅 히트를 쳤다. 도처에 걸림돌이 왜 없겠나. 걸림돌마다 '때문에'로 핑계 삼는다면, 마음의 곳간에 희망이 채워지겠는가. '때문에'는 좌절과 절망이 숨어 있다. 새해에는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로 바꿔보자. 부정적 마음이 아니라 긍정적 마음.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적 마인드. "새해의 복 많이 받으세요" 덕담으로 주고받는 그 복은 매사에 감사하는 '덕분에' 마음을 가진 자의 것이다. 행복지수를 높이는 것도, 스트레스지수를 높이는 것도 자기 자신이니까.

2017-01-04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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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세밑의 명(名)장면

'2016년호' 열차도 소실점을 그리고 있다. 산 아래 휘돌아나가는 기찻길의 낭만 열차였더라면 저토록 처연한 삽화로 가물거리지 않았을 거다. 여느 세밑인들 쓸쓸한 여운을 남기지 않겠냐마는 올해가 더욱 유난한 것은 불투명한 정치상황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 때문일 게다. 추위까지 스며들었기에 세상 풍경은 어수선하고 스산하다. 잔뜩 웅크린 마음들은 칙칙한 옷차림으로 표출됐고, 그 위축 심리는 기어이 소비 경기를 바닥으로 침몰시켰다. 세월을 뿌리치듯 떠나는 '2016년호'에 왜 아쉬움이 없겠나. 현란한 점등 아래에 번지는 애잔한 발라드 가사에 귀를 모으게 되고, 거리를 배회하는 군상들의 표정에 시선이 오래 머무는 것을. 세밑이란 그런 것인가. 찬바람이 깊은 새벽녘 책상 서랍에 오래 묵혀 너덜거리는 주소록을 뒤척이며 친구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해낸다. 십 수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친구도 맞닥뜨린다. 그 흑백 필름을 돌리다보면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세밑이 공허한 건 내세울만한 일 없이 또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것일 게다. 한 해의 궤적을 복기해보면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열정적인 청춘의 시간들이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그 금쪽같은 시간을 혹여 허투루 쓴 게 아닌지 반추하게 된다. 벅찬 새해를 맞을 때만 해도 순간순간을 정성들여 살겠노라고 다짐했건만 그게 그리 쉬운가. 세밑은 그래서 태생적으로 가슴 적시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되는 작업이 여간 씁쓸한 게 아니다. 세밑 풍경 하나가 작은 울림으로 가슴 때린다. 서울 한복판 명동 어느 중국음식점. 삐거덕 출입문이 열리자 모든 시선은 한 곳으로 집중됐다. 남루한 옷차림에 퀴퀴한 냄새를 동반한 손님. 노숙인이었다. 그의 눈은 모퉁이쪽 딱 하나 남은 빈 테이블에 꽂혀 있었다. 거동이 불편한 듯 발걸음을 뗄 때마다 뒤뚱거렸다. 사람들은 소마소마했다. 다들 본능적으로 엉덩이가 들썩거리는데, 여종업원이 달려가 부축하며 예의 안내하는 것이었다. 천만다행이었다. 흐뭇했다. 유니폼 차림의 여종업원과 꺼무죽죽한 노숙인의 앙상블. 내가 꼽은 훈훈한 세밑 명장면이다. 여종업원의 표정은 시종 밝았고, 얼어붙은 노숙인의 얼굴은 따스하게 펴져 있었다. 그는 짬뽕 곱빼기를 주문했다. 문제는 다음 장면이었다. 그의 응어리진 마음 밑바닥을 미리 헤아리기라도 했다면 사람들은 저 괴괴한 편견을 갖진 않았을 거다. 그는 냉큼 밥값부터 선불로 냈다. "걱정들 마시라!" 속으로 얼마나 외쳤을까. 왜 그래야만 하는 걸까? 가슴 쳤을 것이다. 그랬다. 밥값은 그의 막장 자존심처럼 보였다. 자신을 내팽개친 불신 사회와 단절한 그이기에 그럴 것이다. 불신 세상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이랄까. 그는 그러나 운명처럼 다가오는 냉정한 사회적 불신을 선불로써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왜 그가 가슴 죄며 그 무거운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다. 세밑 무렵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왜 '배려'인지를 일깨운다. 사람 사이에 배려가 스며들면 신뢰가 싹튼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이다. 배려가 비단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자신을 향한 배려도 있다. 자신을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배려한다는 건 모순. 우리는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한 삶을 재촉했다. 자신(self)에게 선물(gift)을 주고 싶다는 이른바 '셀프트(selft)족'이 등장한 이유가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가물거리는 이 세밑. 자신에게 따뜻한 '격려'를 선물하며 다독여주자. 고단한 긴 그림자를 이끌고 왔을 자신에게.

2016-12-28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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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떡볶이와 고등어

강퍅하게 번성한 아파트 군락에서 홀로 핀 전통시장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억척스럽긴 해도 그나마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침이 튈지언정 오가는 흥정 속에 넉넉한 인심이 묻어나는 건 여전하다. 대형 마트들은 이 전통시장의 전매특허에 노다지가 숨어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흥정은 '1+1 덤', 인심은 '고객만족서비스'로 대체하고, 느긋한 저잣거리를 성급한 에스컬레이터 길로 포장하면 돈방석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을. 대형마트는 그러나 용도변경을 하지 못한 게 하나 있다. 오랜 세월 전통시장에 더께로 내재된 정감! 어릴 적 향수가 기시감으로 와락 밀려드는 그 유전자 말이다. 답답할 때 시장 바람을 쐬면 까닭 모르게 복받쳐 오르는 설렘이랄까. 그 옛날 접어뒀던 시장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그 곳과 오버랩 되면서 미소를 머금게 하곤 한다. 예나 지금이나 볼거리가 많은 한 폭의 풍물화에 다름 아니다. 그 시장을 품고 있는 아파트에 십 수년째 눌러 앉은 까닭이다. 장보는 재미가 여간 아니다. 시장 초입부터 반기는 좌판들. 부추, 양파, 대파, 양배추, 감자, 고구마가 널브러져 있다. 어느 할머니의 호객 구호가 이색적이다. "이런거 저런거!" 이 많은 채소를 줄줄이 알사탕으로 읊으려니 버거웠을 것이다. 그걸 뭉뚱그렸을 터인데 기막힌 표현이다. 그런데 묶음마다 크기가 들쭉날쭉이다. 그러니 고객도 '이런거 저런거'를 고르게 된다. 그러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등에 시선이 얹히면 가격을 묻지 않게 된다. 부르는 대로 지불한다. 시장 속을 들여다보면 흥미진진하다. 몇 달 전 떡볶이 장터에 큰 지각변동이 일었다. 한산했던 한 떡볶이 집이 방송을 탔다. 전국의 내로라는 떡볶이 마니아들을 흥분시켰다. 방영된 장면은 사진에 담겨져 간판으로 내걸렸고, 고객은 줄을 이었다. 그 옆 꽈배기 집과 김밥 집은 때아닌 대목을 만나 손놀림이 바빠졌고, 시장 안은 덩달아 북적댔다. 떡볶이가 미끼 상품이 되면서 시장 집객력이 높아진 거다. 시장 사람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모두가 반긴 건 아니다. 그동안 불티나던 그 안쪽 떡볶이 집 주인은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맛에 대해선 사람들은 그게 그 맛이라고 했다. 하루아침에 대박과 쪽박의 기로에 선 두 집. 대박 집은 여세를 몰아 점포를 확장했고, 아르바이트생도 고용했다. 쪽박집도 이에 질세라 의자를 새 단장하고 인심을 강화하는 전략으로 단골들을 돌려세웠다. 지금은? 예전 상황으로 돌아갔다. 고객수가 엇비슷해지더니 언제부터인가 대박 집 아르바이트생이 사라졌다. 생선가게는 춘추전국시대를 맞았다. 여섯 군데나 되니 경쟁이 치열하다. 가장 많이 팔리는 국민생선 고등어가 승부처다. 한 가게는 댓바람부터 휘늘어진 뽕짝을 튼다. 아침 손님은 그 집 차지다. 부부가 운영하는 가게는 하루 분량만 매대에 올린다. 일찌감치 동나니 안달이 나는 쪽은 고객이다. 얼마나 맛있길래? 손님이 끓이질 않는다. 재고가 없으니 싱싱한 편이다. 가격 대비 맛도 있어 일명 '가맛비'도 좋다. 한계효용의 희소가치를 간파한 실속파 부부다. 또 다른 한 가게는 수북하게 진열한다. 회전율이 낮아 며칠째 묵는 구조다. 발길이 휑하다. 고객몰이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시장이 공사에 들어가면서 그 집만 개점한 적이 있다. 손님이 쏠리는 풍선효과를 보긴 했는데, 이때다 싶어 묵은 재고품을 처리한 게 문제였다. 고등어의 신선도는 구워보면 드러난다. 고객을 창출할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소비위축이 7년 만에 최고라는 소식이다. 소비진작의 타이밍이 절실한 때다.

2016-12-21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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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픽미(Pick Me)족'의 족보

수박이 청춘남녀의 인연을 맺어주던 시절이 있었다. 계곡 저편에 수박을 띄워 짝을 유혹하는 청춘사업! 그 뻔한 술수를 누군들 모르겠냐마는 짐짓 모르는 척, '날 잡아봐!' 수박을 터치해 랑데부하곤 했다. 남녀유별의 울화가 여전했던 7080. 그 흑백 필름의 시절에도 왜 들끓는 신세대가 없었겠나. 색 바랜 청바지, 흥청대던 생맥주 시음장, 가슴으로 뜯던 통기타의 젊음이 가슴마다 내재했다. 다들 내숭을 떨긴 했어도 수박을 매개로 조각조각 마음이 달떴다. 낭만풍의 랑데부 삽화! 사람들은 삽화 속 청춘남녀들을 '수박족'이라 불렀다. 신세대 족보의 시조가 태동한 배경이다. 그 이후 참외족, 사과족이 종횡무진 활약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족보엔 없다. 정작 문중에 이름을 올린 건 '오렌지족'. 명품으로 치장하고 외제차를 굴리며 유흥을 즐기던 해외유학파들이다. 한창 수입산 오렌지가 국내에 상륙하던 때였으니 그 과일로 문패를 내걸었다. 오렌지족의 등장은 우리네 소비패턴에 변화를 몰고 왔다. 족보의 시조 수박족은 쪽도 못쓰고 사라졌다. 오렌지족의 아류도 등장했다. '낑깡족'. 맹목적으로 따라하려는 사회적 병폐가 탄생시킨 별종이다. 그들은 오렌지족의 동작뿐 아니라 정신세계도 닮으려 했다. 흉내 내는 것까진 좋았으나 소비 형태를 닮으려 한 게 문제였다. 경제적 체력이 약한 뱁새가 황새의 광폭 씀씀이를 무슨 수로 따라잡으랴. 유흥가에선 '노는 물이 달라'라는 유행어도 그 때 파다하게 돌았다. 낑깡족은 곧 소멸됐다. 정작 신세대 데이트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건 '야타족'이었다. 명령조의 '야! 타!'를 붙여 급조된 신조어.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길거리 헌팅에 나선 족속들이다. 오렌지족과는 사촌지간. 주 무대는 서울의 압구정동과 홍대 입구. 안하무인에 이기적인 사고가 배어 있었지만 뭇 여성들은 그 오만한 입심에 외려 매혹에 빠졌다. 와중에 튼튼한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 다니며 데이트를 하겠다는 순정파 '뚜벅이족'도 거리를 누볐다. 세월을 뒷장으로 막 넘기려는 2016년 끄트머리. 신개념의 족속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디지털 시대가 낳은 '픽미(Pick Me)족'. 말하자면 스펙을 갖췄지만 선택받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하는 고단한 세대의 한 부류. 그래서 그들은 아우성친다. '나를 뽑아줘!'라고. 그들의 사전엔 과시성 소비란 없다. 오렌지족의 펑펑 소비 형태와는 거리가 멀다. 오로지 나와 현실에 가치를 부여하는 합리적인 소비를 추구하는 실속파다. 예나 지금이나 신세대는 소비와 유행의 주역이다. 그래서다. 내년 소비트렌드가 벌써부터 나왔다. '욜로(YOLO)' 트렌드다. '한 번 사는 인생(You Only Live Once)'의 약어다. 불투명한 미래를 두려워하기보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려는 2030세대의 실리적인 가치관이 숨어 있다. 트렌드는 디지털에 편승해 무서운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눈 깜짝할 새다. 제품이 세상에 나오기가 무섭게 평가가 쏟아진다. 보는 눈이 촘촘하고 기민하니 어지간해선 퇴물 되기 십상이다. 까딱 한 눈 팔다간 이방인이 되는 오늘날이다. 사회발전 단계설을 연구했던 스펜스도 이렇게까지 사회가 진화하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사이버 신인류가 확대 재생산하는 입소문의 쓰나미를 상상이나 했겠나. 표심에 민감한 정치인들은 그들의 트렌드를 읽고 있을까?

2016-12-14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