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조양호의 삶, 한진그룹 글로벌 항공사로 우뚝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8일 새벽(한국시간) 미국에서 향년 70세의 나이에 숙환으로 사망했다.
조 회장은 1949년 3월 8일 인천광역시에서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서울에서 경복고등학교를 수학한데 이어 미국으로 유학해 미국 메사추세츠 주 Cushing Academy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인하대 공과대학 학사, 미국 남가주대 경영대학원 석사, 인하대 경영학 박사 학위 등을 취득했다.
그 후 조 회장은 1974년 대한항공 입사 후 45년간 정비, 자재, 기획, IT, 영업 등의 분야에서 일한 뒤 1992년 대한항공 사장, 1999년 대한항공 회장, 2003년 한진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조 회장은 세계 항공업계 무한 경쟁의 서막을 항공동맹체인 '스카이팀' 창설을 주도해 맞선 것으로 유명하다.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자체 소유 항공기의 매각 후 재 임차를 통해 유동성 위기를 극복했으며 1998년 외환 위기가 정점일 때는 유리한 조건으로 주력 모델인 보잉737 항공기 27대를 구매했다.
세계 항공산업이 침체의 늪에 빠진 2003년 조 회장은 이 시기를 차세대 항공기 도입의 기회로 보고 A380 항공기 등의 구매계약을 맺었으며 2008년 7월에는 저비용항공사(LCC) 진에어를 창립했다.
대한항공은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대한항공은 1969년 출범 당시 8대뿐이던 항공기는 166대로 증가했으며 일본 3개 도시 만을 취항하던 국제선 노선은 43개국 111개 도시로 확대됐다. 국제선 여객 운항 횟수는 154배 늘었으며 연간 수송 여객 숫자 38배, 화물 수송량은 538배 성장했다. 매출액과 자산은 각각 3500배, 4280배 증가했다.
특히 조 회장은 '항공업계의 UN'이라고 불리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1996년부터 IATA의 최고 정책 심의 및 의결기구인 집행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이후 2014년부터는 31명의 집행위원 중 별도 선출된 11명으로 이뤄진 전략정책위원회 위원도 맡아왔다.
조회장은 2010년대 미국 항공사들과 일본 항공사들의 잇따른 조인트 벤처로 대한민국 항공산업의 중요한 수익창출 기반인 환승 경쟁력이 떨어지자 델타항공과의 조인트 벤처를 추진했다.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개장과 함께 상승 효과를 내 대한민국 환승 경쟁력은 다시 힘을 받았다.
그러나 한진해운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외부에서 영입한 전문경영인들의 잇따른 오판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했다. 이에 조양호 회장은 한진해운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2013년부터 구원투수로 나서 1조원이 넘는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조 회장은 한진해운을 살리기 위해 2014년 한진해운 회장직에 오르고 2016년 자율협약 신청 이후 사재도 출연한 바 있다.
올해 조 회장은 대한항공 정기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했다. 국민연금이 절차 논란 속에서 연임을 반대했고 일부 시민단체에서도 연임 반대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조 회장의 유족으로는 부인 이명희(전 일우재단 이사장·70)씨를 비롯 아들 조원태(대한항공 사장·44)씨, 딸 조현아(전 대한항공 부사장·45)·조현민(전 대한항공 전무·36)씨 등 1남 2녀와 손자 5명이 있다.